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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인도 Sep 24. 2023

카카오페이와 아비투스

편의점에서 처음으로 카카오페이로 결제하여 물건을 샀던 순간이 잊혀지지 않는다. 음료수의 바코드 띡, 그리고 내 스마트폰의 바코드 다시 띡. '이렇게 그냥 들고 가면 되는건가' 한동안 멀뚱멀뚱 계산대 앞에 서 있었던 기억이 난다. 그야말로 간편한 결제 경험이었다.


카드를 주로 사용할 때는 그래도 지갑에 현금 좀 고 다녔는데, 이제는 외출할 때 스마트폰 하나만 들고 나가니까 도통 현금을 쓸 일이 없다. 카카오페이 외에 삼성페이, 애플페이, 네이버페이 등 온갖 간편결제 서비스가 등장해 주머니를 가볍게 만들어 주었다. 온라인으로 상품을 구매하거나 음식을 주문하고 표를 예매하는 것도 간편결제를 이용하면 훨씬 쉽고 빠르다.


쉽고 편리한 건 좋은데, 이렇게 간편결제로 일상의 모든 구매를 다 처리하고 있으니까 무언가 찝찝한 느낌이 든다. 마치 누군가 일기장을 훔쳐보는 기분이랄까. 내가 언제 무엇을 얼마나 자주 사는지 나의 구매 패턴과 취향을 간편결제 기업이 모두 알 수 있으니 말이다. 그리고 데이터가 몇 년 이상 장기간 누적되면 나라는 사람에 대해 철저하게 분석과 분류가 가능해지겠다 싶은 생각이 들어서 말이다.



가능성의 장(場)에 갇혀 사는 개인


피에르 부르디외는 저서 <구별짓기>에서 아비투스의 개념을 소개한다. 사회가 성장하고 고도화되면 전체 집단은 여러 가지 다양한 그룹으로 분화 되는데, 이는 산업 발전에서의 분업화 원리에 따른 결과이다. 사업, 공무원, 자영업자, 교사, 직장인 등 특정 그룹에 속한 사람들은 해당 그룹에 기대되는 고유한 역할을 수행하며 사회가 돌아가는 데 공헌한다. 그리고 공헌에 대한 보상을 받아 가족을 부양하고 자녀를 낳아 대를 이어 같은 역할을 맡을 구성원을 재생산한다. 이 때 부모는 자식에게 경제적·문화적으로 자신이 속한 그룹에서 일반적이고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는 사고와 습관의 믹스를 물려주는 데 이를 아비투스라 부른다.


아비투스는 각 그룹의 생활조건에 최적화 된 상태로 생산된다. 사용할 수 있는 시간과 자원은 한정되어 있는데, 각 그룹의 구성원이 되기 위해 필요한 자질과 역량은 크게 다르기 때문이다. 어떤 그룹은 공교육과 국가제도에 크게 의존하는 반면, 어떤 그룹은 개인교습이나 여행, 예술 감상에 더 많은 시간과 돈을 투자한다. 또 어떤 그룹은 학습을 통해 지식을 획득하는 일에 큰 비중을 두는가 하면, 다른 그룹은 사교모임과 예의범절에 대한 감각을 키우는 문화적 활동에 집중한다. 그 결과 동일한 사회 안에서도 다른 그룹에 속한 사람들끼리는 세상을 바라보는 서로 다른 시각과 감수성을 갖게 된다. 반대로 같은 그룹에 속한 사람이라면 처음 보는 사이에서도 편안함과 친근감을 느낀다.


"상이한 생활조건은 상이한 아비투스를 생산하기 때문에, 상이한 아비투스에 의해 생성된 실천은 차별적 격차 세계의 형태로 생활조건 안에 객관적으로 각인되어 있는 차이를 표현하는 특성들의 체계적인 배치도처럼 보인다. 이것은 생활양식으로 기능하는 상관적 속성들을 구별하고, 해석하고, 평가하는데 필요한 지각도식과 평가도식을 갖고 있는 행위자들에 의해 감지된다."


어려서부터 부모에게 물려받은 아비투스에 의해 지배당하는 개인은 자신이 속한 그룹이 활동할 수 있는 영역의 테두리인 '가능성의 장(場)' 안에서만 돌아다니게 된다.  이유는 각 그룹에 속한 가정이 평균적으로 벌어들이는 경제적 수입이 비슷하면서, 동시에 그 자원을 이용해 자녀가 획득해야 하는 역량과 그 역량을 얻기 위해 자원을 분배하는 비율이 비슷하기 때문이다. 주거비, 의류비, 식재료비, 교육비, 문화생활비, 여가활동비 등 그룹 별로 우선시되는 항목부터 가장 큰 비중을 할당하고, 별로 중요하지 않다고 느껴지는 항목들에는 적게 자원을 투입할 수 밖에 없다.


따라서 개인은 자유롭게 사회공간 속에서 이동하는 듯 보이지만, 가능성의 장이 가지고 있는 관성의 힘에 붙들려 해당 그룹에게 주어진 궤적(혹은 팔자)에 따라 살 수 밖에 없다. 송충이로 태어나면 커서도 송충이로 자라도록 딱 필요한 양의 솔잎만 공급되는 셈이다. 다른 그룹으로 넘어가기 위해 무리해서 유학을 가고, 고급 예술과 스포츠를 즐기려 해도 현실에 벽에 부딪치고 만다. 한 궤적에서 다른 궤적으로의 이행은 전쟁이나 격변, 또는 결혼이나 어떤 만남 등에 의해 가끔 일어나는 사건이다.



'무엇을 구매하는가'가 곧 나 자신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내가 무엇을 구매하는지가 곧 내가 누구인지 말해준다. 돈은 솔직하다. 말로는 "오 너무 좋은데" 얼마든지 립서비스 할 수 있지만, 정작 내 돈을 사용해야 되는 시점에서는 수준에 맞지 않거나(가능성의 장을 벗어나거나) 진심으로 원하고 필요로 하지 않는다면 구매하지 않는다. 입으로는 유기농 음식을 즐긴다고 말하면서, 정작 구매 이력을 살펴보았을 때 인스턴트 식품으로 도배되어 있다면 무엇이 더 그 사람의 사회적 위치에 관한 진실에 가까울까.


물론 자신을 포장하고 남들에게 본 모습과는 다른 이미지를 보여주기 위해 한두번, 짧은 기간 동안 무리해서 억지로 구매할 수는 있다. 하지만 수십 차례, 장기간 지속될 수는 없다. 결국 그 사람에게 가장 핵심적인 소비만 오래도록 지속가능한 상태로 남는다. 그리고 대부분의 사람은 자신이 속한 그룹의 가능성의 장 안에서 핵심적인 소비를 한다.


그렇다면 구매 데이터가 충분히 쌓였을 때 간편결제 기업은 각 개인이 어떤 그룹의 가능성의 장 안에서 활동하고 있는지, 또는 앞으로 어떤 그룹의 구성원이 될 가능성이 있는지 예측 가능해진다. 왜냐하면 특정 그룹에 속한 구성원들은 같은 가능성의 장 안에 있기에 비슷한 구매 패턴을 보일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너 내가 누군지 알아" 물어보면 간편결제 기업은 "응 알지. 너보다 내가  정확하게 알껄" 하고 대답할 수 있게 된다.



천생연분을 찾아 드립니다


이렇게 각 개인이 속한 그룹과 가능성의 장을 파악하게 된 간편결제 기업이 할 수 있는 사업은 무궁무진하다. 그 중 제일 흥미로운 사업은 데이팅 플랫폼이다.


수많은 종류의 고유한 아비투스를 가진 그룹 사이에는 서로에게 보완적이고 끌릴 수 밖에 없는 천생연분의 조합이 존재한다. 예를 들어 경제자본의 비중이 높은 금융투자자와 문화자본의 비중이 높은 교육자 혹은 예술가는 잘 어울리는 한쌍일 수 있다. 마치 MBTI 궁합과 비슷한 메커니즘이지만, 훨씬 더 객관적인 방법이고 데이터가 누적될수록 한 그룹이 다른 어떤 그룹과 친화성을 갖는지 정확도를 향상시킬 수 있다.


"취향은 중매자이다. 색깔과 사람뿐만 아니라 '천생연분'인 사람들을 맺어준다. '일차적 집단'을 구성해내는 모든 호선행위는 지식행위의 주제들을 통해 타인들을 아는 행동, 또는 이보다 덜 현학적인 용어로 표현해 보자면, 기호를 해독하는 작업으로, 바로 이것을 통해 하나의 아비투스는 다른 아비투스들과의 친화성을 발견하게 된다."



게다가 간편결제 기업은 개인의 차원에서도 한 사람 한 사람의 디테일한 취향까지 다 알고 있다. 어제 어떤 식당에 방문한 사람을 며칠 전 똑같은 식당에서 식사한 적 있는 상대와 만나게 해준다면 매칭 성공률이 높아지지 않을까. 마찬가지로 서점에서 책을 구매하는 횟수, 같은 유형의 문화생활을 즐기는 정도, 외출 빈도 등이 비슷한 사람(아니면 오히려 반대인 사람이 더 잘 맞을 수도 있다)을 이어줄 수 있다면 더 이상 짝을 찾기 위해 시간을 낭비하고 헛된 감정소모를 하지 않아도 된다. 매칭된 이후에는 서로가 만족할만한 데이트 장소와 선물을 추천해주며 관계를 계속 이어나가는 데도 도움을 줄 수 있다. 이렇게 보면 틴더가 주시해야 하는 경쟁 상대는 글램이나 위피가 아니라 카카오페이인 셈이다.


 하나 가능한 사업은 신원조회 서비스다. 딸이 왠 이상한 놈을 남자친구라고 데려왔을 때 누군가를 붙여 뒤를 캐는 대신 그냥 간편결제 기업에 이 친구가 믿을만한 사람인지 물어보면 된다. 그럼 간편결제 기업은 남자친구가 어떤 그룹에 속해 있으며, 해당 그룹의 사회적 지위와 신뢰도, 범죄 확률은 몇 퍼센트인지, 또 예상되는 평생 수입과 사망 연령, 딸이 속한 그룹과의 궁합, 심지어 바람피울 확률과 불임 가능성까지 온갖 정보를 제공할 것이다.


비슷하게 기업에서 인재를 채용할 때도 지원자가 우리 회사 문화에 어울리는 사람인지, 믿을 수 있는지, 예상되는 근속 기간이 얼마나 될지, 성과는 얼마나 나올지 신원조회 서비스를 통해 가늠해 볼 수 있다. 신원조회 결과는 입사 지원자가 평생에 걸쳐 쌓아온 구매 습관의 산출물이기 때문에 하루 아침에 바뀌지도 않고, 이미 회사에 그와 같은 그룹에 속하는 사람이 있다면 처음 보았음에도 '음 이 지원자는 재무팀의 김대리와 같은 부류의 인재구만'하는 식으로 기초 이미지 형성이 가능하다.



예비범죄자도 찾아 드립니다


간편결제의 확장 가능성  가장 파괴적인 지점은 구매 데이터가 충분히 쌓여 극히 낮은 오차범위 내에서 각 개인의 미래를 예측할 수 있게 되는 순간이다.


실제로 간편결제 기업들이 가장 먼저  는 후속 사업이 보험대출업이다. 건강에 얼마나 관심을 가지고 돈을 쓰는지, 위험하거나 해로운 물질을 구매하는지, 식습관은 어떤지, 벌어들이는 수입 대비 지출 규모는 어떻고 항목별 비중은 어떤지에 대해 데이터를 쌓고 그 결과를 활용해 그룹 단위 또는 개인 단위로 위험도를 측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 위험도의 오차범위는 데이터가 쌓일수록 점점 줄어들고, 기업은 더 낮은 금리 또는 보험료의 상품을 자신감을 가지고 판매할 수 있게 된다.


그리고 사회안전보장과 관련된 서비스도 제공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시스템 상에 구분된 100개의 그룹 중 범죄율이 높은 상위 10개 그룹을 범죄자 그룹으로 지정하고, 거기에 속하는 구성원들의 구매 패턴을 요주의 항목으로 입력해놓는 것이다. 그리고 범죄자 그룹에 속하지 않는 어떤 사람이 갑자기 범죄자의 구매 패턴을 보이기 시작한다면 그를 선제적으로 예의주시하고 범죄가 일어나기 행동에 제약을 가할 수 있다.


이는 영화 <마이너리티 리포트>에서 묘사했던 미래의 모습과 유사하다. 다만 영화 속에서는 영적 능력을 가진 3인의 예지자의 힘을 빌려 미래를 예측하고 범죄를 예방했다, 간편결제 기업은 축적된 구매 이력 데이터를 상호비교하여 확률로 계산한다는 차이가 있다. 최근과 같이 묻지마 범죄가 잦아지고 마주치는 누군가가 위해를 가할 수 있다는 위기감이 커진 상황에서, 누가 범죄를 저지를 확률이 높고 조심해야 하는 인물인지 알려주는 서비스는 꽤나 매력적일 수 있다. 어쩌면 각 개인별로 범죄를 일으킬 확률을 본인의 스마트폰에 새기고 다니며 '나는 안전한 사람입니다' 증표를 보여주어야만 특정 장소에 입장하거나 모임에 참여할 수 있는 날이 올지도 모른다. 코로나 시즌에 이미 유사한 경험을 해 보아서 사람들이 그리 거부감을 느끼지도 않을 것 같다.



새 학기엔 친구들 신원조회 해봐야지


오늘도 간편결제를 하며 나의 아비투스를 보여주는 구매 데이터를 하나씩 더 쌓는다. 매일의 습관이 쌓여 미래가 된다고들 하더니. 매일의 구매 내역이 쌓여 내가 속한 그룹과 가능성의 장, 사회적 위치가 드러난다. 이제 더 이상 신분세탁이나 거짓말로 남들을 속일 수 없다. 신원조회 한 번만 해보면 평생의 기록이 다 나와버리니 말이다. 혹개인 데이터를 몰래 수정해주는 서비스나 해킹 기술이 나온다면 모를까.


요즘 일부 학생들은 같은 반 친구들의 사회적 위치를 알아보기 위해 친구가 사는 집의 등기를 떼서 자가인지 전세인지 담보는 잡혀있는지 알아본다고 하는데, 나중에는 옆 자리에 앉은 애가 어떤 그룹에 속하는지 간편결제 기업에 신원조회 해보지 않을까. 한국 사람들이 재산 비교하기와 MBTI를 좋아하는 걸 보았을 때, 일단 서비스만 될 수 있다고 하 금방 유행처럼 퍼져나갈 것 같다.


다행인 점은 그래도 아직 하나의 절대적인 시장 지배 기업이 나오진 않아서 여러가지 페이를 돌려쓰면 내가 누군지 조금 헷갈리게 만들 수 있다는 점이다. 근데 또 막상 그렇게 하려면 너무 귀찮아진다. 이렇게까지 해야하나. 쓸데없이 망상만 많아서 피곤하게 사는 거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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