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기업과 가톨릭 사제

by 아인도

마틴 스콜세지의 영화 <사일런스>는 17세기 일본으로 선교를 떠난 예수회 사제의 이야기를 그린다. 일본 정부의 혹독한 박해 속에서 주인공 로드리게스는 배교를 강요받고, 자신 때문에 고통받는 신자들을 바라보며 왜 간절한 기도에도 주님은 침묵을 지키시는지 괴로워한다. 낯선 타국에서의 임무 과정 속, 한 개인이 겪는 깊은 내적 갈등을 차분한 연출로 풀어낸 작품이다.


가톨릭 사제들의 삶은 늘 '순명'과 함께한다. 서품과 함께 순명의 서약을 하고, 교구나 수도회가 필요로 하는 지역으로 파견된다. 그리고 그곳에서 자신에게 맡겨진 임무를 수행한다. 특히 예수회 사제들은 아침 식탁에서 접시를 들어 올렸을 때, 그 밑에 새 임무가 적혀 있으면 곧바로 전 세계 어디로든 떠난다. 함께 지낸 동료와 정든 마을을 뒤로한 채, 수천 킬로미터 떨어진 낯선 곳이라도 주저하지 않는다.


최근 교황으로 선출된 레오 14세도 시카고 출신의 미국인이지만, 20년 넘게 연고 없는 페루에서 성직자로 봉사했다. 성 아우구스티노 수도회 총장 시절에는 전 세계를 누비며 수도회를 이끌었고, 한국에도 다섯 차례 방문했다. 나고 자란 곳에 뿌리내리기보다, 부름이 있는 곳으로 기꺼이 이동하는 삶. 이것이 곧 사제들이 살아가는 방식이다.



거대 조직의 효율적 인재 관리


“살아남는 자가 강하다”는 말이 사실이라면, 가톨릭 교회는 오늘날 지구상에서 가장 강한 조직일 것이다. 한 명의 창업자와 12명의 창업팀으로 시작한 작은 스타트업은 2천 년 동안 수많은 위기를 견뎌내며 살아남았다. 이제는 전 세계 14억 명의 신자와 40만 명 이상의 사제, 막대한 자산과 국제적 영향력을 보유한 거대한 글로벌 조직으로 성장했다.


이 거대한 조직의 핵심 과제 중 하나는 바로 인재 관리다. 특정 지역에 인재를 묶어두는 것은 비효율적이다. 환경은 끊임없이 변하고, 내부 상황도 시시각각 달라진다. 어떤 지역은 인재가 넘쳐나지만, 다른 곳은 늘 부족하다. 그래서 교회는 인재를 순환 근무시키며 필요한 곳에 재배치한다. 사제가 정든 고장을 떠나 낯선 땅에서 평생을 보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하지만 이는 개인에게 막대한 희생을 요구한다. 익숙한 지역, 안락한 삶, 안정된 관계를 내려놓고, 조직의 필요에 따라 언제든 낯선 곳으로 떠나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교회는 순명이라는 덕목을 무엇보다 강조한다. 순명에 기반한 인재 배분 덕분에 교회는 방대한 규모에도 불구하고 슬림한 관리 구조를 유지할 수 있었고, 그 결과 수천 년의 역사를 간직한 강력한 조직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인재를 붙잡는 글로벌 기업의 방식


오늘날 성공적인 글로벌 기업은 여러 면에서 가톨릭 교회를 닮아 있다. 전 세계에 지점을 두고 고객을 확보하며, 곳곳에 유무형의 자산을 보유한다. 창업자의 카리스마는 교황의 권위와 비슷하고, 기업의 로고는 십자가에 비견되며, 기업의 비전은 천년 왕국을 약속하는 종교적 메시지를 닮아 있다.


이처럼 전 세계의 고객과 자산을 관리해야 하는 글로벌 기업은 교회와 마찬가지로 인재 관리라는 과제에 직면한다. 우수한 인재를 순환 배치해 조직의 수준을 일정하게 유지하는 동시에, 국제 정세의 변화나 전략 수정, 자원 재배치의 필요에 따라 언제든 인력을 자유롭게 이동시킬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기업은 교회처럼 순명을 강요할 수 없다. 대신 필요한 인재를 붙잡기 위해 다양한 보상과 혜택을 제공한다. 높은 연봉과 학비·주거비 지원, 두터운 복지제도, 글로벌 브랜드 소속이라는 자부심, 사회에 영향력을 미치는 프로젝트 참여 기회, 남들이 쉽게 얻을 수 없는 경력 자본, 개방적인 기업 문화 등이 대표적이다.


특히 RSU(양도제한조건부주식)와 같은 주식 보상은 장기적인 헌신을 유도하는 핵심 장치다. 미국 상장사의 65%가 도입했을 정도로 보편화된 RSU 제도는, 직원이 회사의 성과와 함께 성장하고 그 이익을 공유하도록 만든다. 이를 통해 직원은 조직의 요구로 인한 불편을 감내하면서도, 장기적으로 회사와 운명을 함께할 동기를 얻게 된다.



전통적 삶과 커리어 사이에서


글로벌 기업의 영향력이 커지고 그들의 인재 관리 방식이 보편화될수록, 미래형 인재상은 점점 사제와 닮아간다. 사제들이 그러했듯, 촉망받는 인재라면 한곳에 정착하지 않고 언제든 떠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결혼이나 가족, 친구, 단골 가게 같은 익숙한 일상의 편안함보다 끊임없는 이동과 커리어 축적 과정에서 얻는 새로움과 도전을 더 중시해야 한다.


그러나 이러한 삶은 우리가 오랫동안 당연하게 여겨온 전통적 방식과 크게 다르다. 과거 농촌 사회나 산업화 시대의 인재는 한 지역에 뿌리내리고 가정을 꾸리며 공동체와 함께 성장했다. 하지만 오늘날 데이터와 네트워크를 기반으로 활동하는 글로벌 기업이 경제의 중심에 서면서, 지역 사회와 직장의 연결 고리는 점차 약해지고 있다.


피터 드러커는 <프로페셔널의 조건>에서 현대 조직은 사회나 지역 공동체와 달리, 구성원 간의 유대가 아니라 수행하는 과업에 의해 규정된다고 지적했다.


사회와 지역 사회는 그들 구성원 간의 유대 관계에 의해 규정되는데, 이 유대 관계는 언어, 문화, 역사 또는 지리적 근접성 등에 의해 형성된다. 반면에 조직은 자신이 수행하는 과업에 의해 규정된다.


오늘날의 글로벌 기업은 오직 과업과 목적에 집중하며 더 이상 지역 사회와 깊게 얽히지 않는다. 그 결과, 글로벌 기업에서 성장을 추구하는 인재라면 사제가 겪는 것과 비슷한 시련을 마주하게 된다. 가족과의 이별, 정든 고장에서의 이탈, 낯선 환경에서의 적응, 그리고 외로움까지도.



보편화 되는 서품식


가톨릭 사제는 서품식에서 십자 모양으로 엎드렸다가 다시 일어난다. 이는 세속적 자아가 죽고, 새로운 사명을 지닌 사람으로 거듭남을 상징한다. 그가 내려놓는 것은 고향에서 가족과 친구와 함께 살아가며 결혼하고 뿌리내리는 삶, 보통 사람이라면 누구나 당연하게 선택하는 길이다.


과거에는 이런 결단이 종교적 헌신을 택한 소수에게만 요구되었다. 그러나 글로벌 기업이 확장된 오늘날, 평범한 직장인들 역시 비슷한 과정을 겪는다. 더 나은 직장과 커리어를 위해 정든 고장을 떠나 더 큰 도시로, 나아가 세계 곳곳으로 이동한다. 기업들도 언제든 필요한 곳으로 이동할 준비가 된 인재를 점점 더 선호한다.


하지만 직장과 커리어를 위해 가족과 친구를 떠나 타지에서 홀로 지내는 일은 결코 쉽지 않다. 그 과정에는 혼란과 괴로움이 따른다. 그래서인지 사제들의 서품식은 ‘죽은셈 치는’ 의례로 자리 잡았다. 종교적 믿음으로 견뎌냈던 이 ‘다시 태어남’을, 우리는 과연 어떤 방식으로 받아들이고 극복해 나가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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