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랫폼 기업에서는 직원들이 영어 닉네임을 사용하는 경우가 많다. 외부 사람이 들으면 무슨 온라인 커뮤니티 아이디처럼 느껴져서, 회식 자리에서 서로를 부르는 모습은 마치 동호회 정모를 보는 듯하다. 닉네임에 한국식 호칭인 ‘님’까지 붙은 국적 불명의 호칭은 듣는 이에게 묘한 이질감을 준다.
그러나 닉네임 문화에는 한 가지 장점이 있다. 마치 내가 또 다른 사람이 된 듯한 기분이 들게 해준다. 직장에서 본명으로 “OO씨” 불리며 상사에게 꾸중을 들으면 내 인생 전체가 부정당하는 듯한 압박을 받을 수 있다. 하지만 닉네임으로 불릴 때는 그 비판이 직장인으로서의 ‘제한된 나’에게만 향하는 것처럼 느껴져서, 직장 생활과 개인적 삶이 자연스레 분리되는 효과가 생긴다.
마르크스는 자본주의의 발전 과정을 설명하며 주식회사를 새로운 사회의 싹이라고 말했다. 19세기 중반, 산업 자본주의가 본격화되면서 기계·제철·철도·선박 같은 거대 중공업이 성장했지만, 이를 육성하기 위해 필요한 막대한 자본을 개인 한두 명이 감당하기는 불가능했다. 이때 여러 사람으로부터 자금을 모으고, 각자에게는 제한된 책임만 지우는 주식회사 제도가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주식회사가 등장하기 전에는 사업체와 개인이 사실상 동일했다. 개인은 자기 돈에 은행 대출을 보태 상점이나 식당을 열고, 수익으로 이자를 갚으며 운영을 이어갔다. 그러다 실패하면 투자 원금은 물론 빚까지 고스란히 떠안아야 했고, 신용불량자로 전락하기도 했다. 이러한 무제한 책임 구조에서는 일정 규모 이상의 투자를 유치하기 어려웠다.
주식회사 제도는 이 한계를 극복했다. 여러 사람이 한 사업체에 지분을 나누어 투자하고, 설령 손실이 나더라도 출자한 범위 내에서만 책임을 지게 한 것이다. 사업체와 개인을 분리해 위험을 분산시킨 덕분에 과감한 투자가 가능해졌고, 대규모 자본 축적과 거대 산업의 발전에도 속도가 붙었다. 주식회사는 자본주의를 한 단계 도약시킨 획기적인 장치였다.
주식회사가 사업체와 개인을 분리해 리스크를 줄였다면, 플랫폼 경제에서는 개인 창작자들이 본인의 정체성을 쪼개는 방식으로 위험을 분산시킨다.
본명을 걸고 시간과 아이디어, 자본을 들여 콘텐츠를 제작하다 실패하면, 창작자는 단순히 캐릭터만 잃는 것이 아니라 개인 생활에서 쌓아온 사회적 신뢰까지 함께 무너질 수 있다. 그러나 별도의 정체성을 만들어 ‘분산 투자’한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실패해도 손상되는 것은 그 캐릭터일 뿐이고, 본명으로 쌓아온 경력과 신뢰는 그대로 남는다. 반대로 성공한다면 그 성과는 실제 삶에 흡수되어 창작자에게 이득을 안겨준다. 이는 주식회사의 유한책임 원리와 구조적으로 닮아 있다.
대표적인 사례가 유튜버 침착맨이다. 그의 본명은 이병건으로 한 가정의 가장으로 살고 있지만, 네이버 웹툰에서는 ‘이말년’이라는 작가명으로 활동하고, 유튜브에서는 또 다른 이름인 ‘침착맨’으로 정체성을 구축했다. 셋은 분명 동일한 인물이지만 활동 영역과 색채는 각각 다르다. 시청자들은 어떤 맥락에서 그를 접하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캐릭터를 경험한다. 동시에 이 세 정체성은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다. 침착맨이 인기를 끌면 이말년의 웹툰도 다시 주목받고, 둘 중 하나가 성공하면 결국 인간 이병건의 삶은 더 윤택해진다. 그러나 어떤 이유로 침착맨이라는 캐릭터가 사라지더라도 이말년과 이병건은 여전히 남는다.
연예인들의 ‘부캐’ 활동도 같은 맥락이다. 개그우먼 이수지는 린쟈오밍, 제이미맘, 육즙수지 등 다양한 캐릭터를 연기했고, 최근에는 ‘햄부기’라는 이름으로 음반까지 발표했다. 끊임없이 새로운 캐릭터를 만들어 시장 반응을 확인하고 활동 영역을 넓혀가는 방식은, 마치 주식회사가 자회사를 세워 새로운 사업에 진출하는 모습과 닮아 있다. 성공하면 외연을 확장하는 셈이고, 실패할 경우 정리하면 그만이다. 어느 하나가 실패하더라도 본체는 안전하게 유지되는 구조다.
정체성 분리는 부캐에서 멈추지 않는다. 얼굴과 외모까지 가상의 이미지로 대체한 버추얼 유튜버, 즉 버튜버가 플랫폼 경제의 핵심 주체로 떠오르고 있다. 최근 AI 합성 기술이 고도화되면서 창작자들은 자연스럽게 움직이는 가상 캐릭터를 전면에 내세우고, 개인 생활에 미칠 부정적 영향을 최소화한 채 콘텐츠를 제작할 수 있게 되었다.
버튜버의 영향력은 수치로도 확인된다. 플레이보드가 집계한 2024년 전 세계 유튜브 슈퍼챗 순위 상위 10위 안에는 미나토 아쿠아, 후와모코, 사카마타 클로에 등 세 명의 버튜버가 포함됐다. 이들은 모두 수백만 명의 구독자와 거대한 팬덤을 보유하며, 콘텐츠 판매로 막대한 수익을 창출하고 있다. 시장 규모 또한 빠르게 확대되고 있다. 글로벌 버튜버 시장은 2021년 약 2조 3천억 원에서 연평균 35.5%씩 성장해 2028년에는 약 25조 원에 이를 것으로 전망된다.
한국은 일본이나 글로벌 시장에 비하면 아직 대중화 단계는 아니지만, 버추얼 아이돌을 중심으로 빠르게 성장하고 있다. 2021년 데뷔한 걸그룹 이세계아이돌은 2025년 5월 고척돔 단독 콘서트에서 2만 명 이상의 관객을 동원했고, 보이그룹 플레이브는 데뷔 1년여 만에 멜론 빌리언스 클럽(10억 스트리밍 달성)에 뉴진스보다 빠른 최단기간으로 등극했다. 이러한 성과에 힘입어 네이버, 카카오, SOOP 등 주요 플랫폼들도 앞다투어 버추얼 스트리밍 분야에 투자를 확대하고 있다.
버튜버는 창작자의 개인 생활을 보호하는 동시에 새로운 기회의 장을 연다. 외모나 이미지의 한계로 주목받지 못했던 사람들, 사생활 노출 우려로 활동을 주저했던 이들, 통념을 깨는 독창적인 시도를 하고 싶었던 크리에이터들에게 가상의 정체성은 강력한 도구가 된다. 실패 위험을 크게 줄인 채, 더 쉽게 시장에서 본인의 창의력을 발휘할 수 있는 발판이 되는 것이다.
주식회사가 사업체를 지분으로 쪼개 리스크를 줄이며 산업 투자의 폭발을 일으켰듯, 가상 정체성은 개인의 정체성을 나누어 과거라면 인생에서 한두 번밖에 시도할 수 없던 창작을 여러 번, 심지어 수십 번 시도할 수 있게 만드는 창작의 촉진제가 된다. 크리에이터들은 마치 스타트업처럼 다양한 정체성을 빠르게 시험해 성공 가능성이 높은 캐릭터를 찾아내고, 또 다른 정체성으로 확장할 수도 있다.
플랫폼 입장에서도 이러한 변화는 환영할 만하다. 다채로운 정체성이 끊임없이 콘텐츠로 생산·소비되는 구조 속에서 트래픽이 몰리면 플랫폼은 막대한 이익을 얻는다. 시청자들은 새로운 캐릭터의 등장에 지루할 틈이 없기에 더 오래 머무르며, 이는 곧 광고와 상품 판매로 이어진다. 창작자와 플랫폼 모두가 이득을 보는 윈윈 구조가 형성되는 것이다.
따라서 플랫폼은 앞으로 이런 가상 정체성 문화를 더욱 확대할 수밖에 없다.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여러 정체성을 자유롭게 오가며 창작과 소비, 공적 활동과 사적 생활을 병행할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흐름 속에서 자신의 정체성 포트폴리오를 자유자재로 다루는 데 능숙한 버튜버들은 플랫폼 경제의 새로운 주역으로 자리 잡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