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혜령 멘토님이 남겨주신 칼럼입니다.
지속가능한 마케터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어떤 조건이 필요할까.
기업의 마케터가 되려면 우선 입사 시험을 통과해야 한다. 이때 보여주어야 할 것은 크게 두 가지. 그 기업의 인재상에 적합한 신입사원임을 증명해야 하고, 플러스 해당 기업의 제품에 대한 열정과 마케팅에 대한 관심을 보여주어야 한다. 그렇게 마케터라는 타이틀을 얻을 수 있다. 그렇지만 계속 마케터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다른 조건들이 필요하다. 살아가기 위해서라고 표현했지만, 작금의 ‘피로사회’에서 살아간다는 말은 사실 살아남는다는 것과 같은 뜻이다. 앞으로 나아가기는 커녕 그냥 제 자리를 지키며 사는 것에도 노력이 필요하다. 뒤쳐지지 않기 위해 끊임없는 업그레이드를 해야 한다. 업종과 상관 없이 마케터로 살아가기 위해 어떤 조건들이 필요한지 정리해 보았다.
마케터와 통찰력(Insight)
신입사원이 되어 처음 마케팅 팀으로 발령받았을 때, 부서 선배에게 마케팅을 잘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물어보았다. 그 선배의 말은 ‘감’이 좋아야 한다는 것. 감은 타고 태어나는 능력 아닌가, 노력과는 무관하게 하늘에서 부여받는 능력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매우 실망했다. ‘머리가 좋아야 한다’는 말과 무엇이 다르리요. 결국 “감이 좋아야 조사도 잘 하고…” 라는 대목에서 못 참고 “모르니까, 알기 위해서 조사를 하는 것 아닌가요?”라고 질문을 했다. 그것이 아니란다.
마케터는 조사를 하기 전에 무엇을 증명하기 위한 조사인지 가설을 세워야 하는데, 이 가설을 제대로 세우기 위해서는 ‘이럴 것 같아’, ‘이것을 위해서는 이 부분을 체크해 봐야 해’와 같은 감이 있어야 하는데 바로 이것이 ‘감’에서 나온다는 설명이었다. 사전에 세워둔 가설 없이 조사를 진행한다면, 조사 대상자에게 단편적인 사실을 물어보는 조사밖에는 할 수 없다. 이렇게 할 경우 물어 본 것은 많으나, 답변끼리 짝이 안 맞기도 하고 결론을 어떻게 내야할 지 애매모호해진다. “아, 이것을 물어봤어야 했는데!” 돈 낭비했다는 상사의 눈총은 물론이요, 자신의 능력부족에 대한 자책과 탄식이 저절로 나온다.
반면 자신의 가설이 있다면, 그것을 검증하기 위해 어떤 조사들을 해야 하고, 어떤 것들을 물어보고 어떤 기준으로 의사결정을 하겠다, 까지 자연스러운 흐름이 생긴다. 불필요한 조사를 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에 효율적이고 조사의 질도 좋아진다(문항 수가 많아지면 조사의 질은 떨어진다). 그러니 이 가설을 뽑아내는 ‘감’이란 것이 매우 필요한 능력일 밖에. 감이란 ‘이것은 이렇지 않을까?’ ‘저것은 이것과 이런 관계일 것 같다’는 자신만의 의문과 심증이다. 감에 대한 검증은 무심히 신문을 읽다가, 전혀 상관없는 책을 읽다가 혹은 일상 생활에서 유사한 사건을 겪으면서 얻어진다. 이렇게 모은 감들이 여러 번 걸러져 단단해진 것이 통찰력(insight)이다. 핵심을 찌르는 카피로 유명한 제일기획의 최인아 전 부사장은 통찰력을 ‘사물을 입체적으로, 깊이 있게 볼 수 있는 능력’이라고 했다.
통찰력은 현상이 왜 생겨나는지 그 본질을 파악할 수 있는 힘이다.
통찰력이 있으면 현상을 전혀 새로운 각도에서 바라볼 수 있고, 지표에서 전혀 다른 사실을 추론해 낼 수 있다.
회사에는 어떤 이슈가 생겼을 때 대책보고를 한다. 그 때 상사가 늘 하는 질문. “이것만 하면 이 문제가 해결되는 거야?” 그 질문에 자신 있게 “그렇다”라고 대답할 수 있다면 본질을 제대로 안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은 “그렇다” 라고 대답하지 못한다. (꾸지람과 야근으로 이어진다) 마음 한 구석에 ‘정확한 답은 모르겠지만, 이것은 아닌 것 같은데…’ 라는 의심이 있기 때문이다. 본질을 모르고 일을 하면 같은 일을 하면서도 막대한 시간과 비용을 지불해야 한다.
마케터에게 통찰력이 중요한 이유는 이제 대량 생산과 대량 소비를 하는 매스 마켓의 시대가 끝났기 때문이다.
물건을 더 팔고 싶다면 소비자의 드러난 욕구를 충족시키는 것은 물론, 소비자 자신이 미처 알지도 못하는 욕구까지도 미리 헤아려서, 일정 규모의 시장을 만들어야 한다. 나는 전자 제품을 구입할 때 인터넷 후기를 많이 찾아본다. 얼마 전에는 태블릿 PC를 구입하고 싶어서 검색을 해보았다. 전자 기기에 대해서는 까막눈이라 가격을 제외한 숫자 사양에는 별 관심이 없으며, 그다지 알고 싶은 생각도 없다. 여러 후기가 많지만 나에게 도움이 되는 것은 내가 쓸 용도로 해당 제품을 사용해 본 사람들의 글이다.
그 후기에 나를 겹쳐 보면서 제품의 성능에서 내가 포기할 수 있는 것, 포기할 수 없는 것들을 구분해 본 후 최종적으로 제품을 선택한다. 그러나 A 목적을 가지고 사용하기에는 이런 점이 부족하고, B 목적을 가지고 사용하기에는 저런 점이 부족한, 아쉬운 점들이 보인다. 이는 상품 기획자들의 타겟에 대한, 통찰력의 2~3% 부족이 아닐까 싶다. 상품기획자들은 누가 이 상품을 쓸까, 타겟의 프로필을 디테일하게 뽑아내고 그 사람들이 끌릴 만한 상품을 설계한다. 언뜻 생각하면 조사하면 되지란 생각이 들겠지만 조사는 만능이 아니다. 조사의 한계점까지 감안한 기획과 지표를 넘어선 해석, 그리고 가장 기본적인 ‘가설’을 세우기 위해서는 마케터의 통찰력이 필요한 것이다.
일본의 생활용품 및 화장품 기업인 카오의 도키와 후미카츠 전 사장은 조사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는데 이는 또한 마케터에게 왜 통찰력이 필요한지를 시사해주고 있다. “마케팅 세계에서는 사람 수를 표현할 때 ‘n’이라는 기호를 자주 사용한다. 만일 n=1,000이라는 표현을 사용한다면, 이는 1,000명을 조사했다는 의미다. 지금까지는 ‘n=1000명’과 같은 방법으로 고객조사 자료를 측정해 왔다. 즉 고객 1,000명의 평균값을 구해 전형적인 소비자 상을 그려내고자 하는 방식이다. 하지만 이 같은 방법을 통해 얻어진 소비자 상은 일종의 허상이 아닐까 싶다. 1,000명의 고객이 있다면, 이는 하나의 ‘n=1,000’과 같이 집단화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즉 마케팅 기획자는 ‘n=1’이 ‘1,000개’ 존재한다고 생각해야 한다. 따라서 어떻게든 ‘n=1’에서 마케팅을 성공시킬 수 있는 단서를 찾아내야 한다. 이렇게 n=1의 욕구를 찾아내면 그 욕구에 공감하는 집단이 새로 생기기 마련이다. 구청이나 지하철 등의 공공시설에 가면 휠체어 사용자를 위한 계단 없는 경사로가 있다. 그렇지만 그 입구를 이용하는 사람들은 휠체어를 탄 사람들만이 아니다. 유모차를 끄는 사람, 목발을 짚은 사람, 짐을 나르는 사람 등 층계를 오르내리기가 불편한 모든 사람들이 이 입구를 이용한다. 경사로를 도입할 때의 세그멘테이션segmentation 기준은 ‘장애인과 비장애인’이었을지 몰라도, 실제 사용자 층은 ‘층계 사용이 불편한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으로 달라진 것이다. 이렇게 한 타겟에 충실하면 당초 생각지도 않은 수요가 생긴다. 즉 시장 규모가 커지는 것이다. 시장의 크기를 키우는 것은 마케터의 임무 중 하나라는 점을 상기해보라.
또한 마케터가 통찰력이 있다면 효율적으로 비용을 사용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조사비용이나 상품개발에 투입되는 비용은 일종의 잠긴 비용 sunk cost으로, 런칭 실패시 그대로 손실로 이어지는 돈이다. 이 우물 저 우물 파다가 중단하기를 반복할 것이 아니라, 물이 나올법한 한 자리를 선택하고 집중적으로 파는 것이 비용면에서 훨씬 효율적이다. 마케터가 통찰력을 가진 눈으로 될법한 한 자리를 선택하고 파헤친다면 실패확률이나 투입 비용 등을 많이 줄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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