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문을 할 수 있다는 것
사람은 지식이 많거나 경험이 쌓일수록 자신의 주장이 강해진다.
세상을 조금 더 알게 되었고,
이 일은 이렇게 돌아간다는 것도 알게 되었고,
사람들이 왜 그런 선택을 하는지도 어느 정도 이해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느 순간부터 우리는 단정적으로 말하기 시작한다.
“그건 틀렸어.”
“그건 그렇게 하는 게 아니야.”
“내가 해봐서 아는데.”
확신이 생긴다는 것은 좋은 일이다.
확신이 강해질수록 질문이 줄어든다.
왜냐하면 질문을 한다는 것은 가능성을 열어두는 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미 답을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 가능성은 필요 없는 것이 된다.
말에 마침표가 늘어나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귀를 닫기 시작한다.
내 말이 틀렸다는 것은 단순히 의견이 틀린 것이 아니라
지금까지 내가 쌓아온 경험과 판단이 틀렸다는 의미가 되기 때문이다.
그 순간 사람은 논리를 세우기보다
자신의 위치나 권위를 이용하게 되기도 한다.
역사를 보면 이런 모습은 낯선 일이 아니다.
19세기 말, 전기를 둘러싼 거대한 경쟁이 있었다.
우리가 흔히 “전류 전쟁”이라고 부르는 사건이다.
토마스 에디슨은 직류 전기(DC) 시스템을 밀고 있었다.
한 방향으로 흐르는 전기였다.
하지만 직류에는 문제가 있었다.
전기를 멀리 보내기가 어려웠다.
전압을 자유롭게 조절하기가 어려웠기 때문에
발전소에서 조금만 멀어져도 전력이 크게 손실됐다.
반면 니콜라 테슬라가 주장한 교류 전기(AC) 는 달랐다.
전압을 높였다 낮추는 변압기를 사용할 수 있었기 때문에
장거리 송전에 훨씬 유리했다.
그래서 가끔 이런 생각을 하게 된다.
에디슨은 정말 이 사실을 몰랐을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에디슨은 당대 최고의 발명가이자 사업가였다.
전기 산업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던 사람이었다.
분명 교류의 장점을 몰랐을 리는 없다.
하지만 에디슨은 끝내 말 끝에 마침표를 찍고 귀를 열지 않았다.
그 결과
1893년 시카고 세계박람회에서
테슬라와 웨스팅하우스의 교류 시스템이 선택되었다.
비용이 적게 드는 교류가 이긴 것이었다.
그렇게 박람회장은 수많은 전등으로 환하게 밝혀졌다.
이 이야기를 떠올리면 나는 가끔 이런 생각을 한다.
어쩌면 에디슨에게 부족했던 것은
지식이 아니라 질문이 아니었을까.
“내가 틀렸을 수도 있지 않을까.”
그 질문 하나만 있었더라도
이 이야기는 조금 다른 모습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이와 정반대의 태도를 보여주는 이야기가 하나 있다.
공자에 관한 이야기다.
《논어》에는 이런 장면이 나온다.
어느 날 공자가 태묘, 즉 왕실의 사당에 들어갔다.
제사를 돕기 위해서였다.
그는 제사의 절차를 하나하나 물어보기 시작했다.
“이것은 어떻게 하는가.”
“이 절차는 언제 하는가.”
“이 그릇은 어디에 놓는가.”
그 모습을 본 사람들이 수군거렸다.
“저 사람이 예를 안다고 하지 않았나.”
“그런데 왜 모든 것을 묻고 있지?”
그 말을 전해 들은 공자가 말했다.
“그것이 바로 예다.”
공자의 말은 단순했다.
예라는 것은 머릿속에 알고 있는 지식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상황에 맞게 정확하게 행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이미 알고 있는 사람이었지만 확인하기 위해 계속 질문했다.
사람들은 그것을 무지라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겸손한 지혜였다.
생각해 보면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은 질문조차 하지 못한다.
무엇을 모르는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오히려 어느 정도 아는 사람만이 질문을 할 수 있다.
그래서 질문은 무지의 표시가 아니라 이해의 출발점이다.
그리고 때로는 지식보다 질문이 더 중요할 때가 있다.
마침표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하지만 물음표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이렇게 생각하는데 너의 생각은 어떤가.”
마침표는 확신을 보여준다.
하지만 물음표는 생각이 계속 이어질 공간을 남긴다.
그래서 나는 점점 마침표보다 물음표가 더 좋은 문장이라고 느낀다.
물음표는 모른다는 뜻이 아니다.
이미 알고 있지만
그래도 당신의 생각을 더 듣고 싶다는 태도인 것이다.
그래서 결국 중요한 것은
얼마나 많은 답을 알고 있는가가 아니라
얼마나 질문할 수 있는가이다.
우리는 마침표보다는 물음표로 끝을 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