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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아이티백

20년차에게 회사가 원하는 걸 몰랐어요.

27년차 서비스 기획자, 오잉

by 아이티백
서퍼였어요. 잡지에서 인터뷰도 하고 그랬어요. AI 나온 후에 프롬프트 엔지니어가 새로운 직종으로 뜨잖아요. 그때 1999년에 저는 서퍼였어요. 인터넷 바다를 헤엄치는 서퍼였죠.
여자들은 자기한테 주어진 일을 잘 하는 게 굉장히 중요하고, 리더십을 가졌더라도 팀원들의 만족에 좀 더 집중을 하는데 20년차에게 회사가 원하는 건 그거는 아닌 거잖아요. ‘나한테 원하는 건 일 잘하는 게 아니었네’ 라는 걸 깨달은 후에 내가 할 수 있는 게 없었어요.
‘못해도 괜찮다’ 라고 생각하는 게 필요한 것 같아요. 잘하려고 하니까 손사레 치고 나는 못 할 것 같아 라고 하는데 못하면 어때. ‘야 거울 봐. 네 얼굴을 봐. 이미 완벽하지도 않은 얼굴로 살면서 뭘 그렇게 완벽하게 하려고 하냐’ 이런 얘기를 많이 해요.


오늘 누굴 모셨을까요? 아이티백의 터줏대감 오잉님을 모셨습니다.
안녕하세요. 오잉입니다.

다른 분들 인트로를 해주시는 것만 듣다가 안녕하세요 오잉입니다. 듣게 되니까 기분이 새롭네요. 어떠세요?
[오잉] 다른 건 상관없는데 터줏대감이 무슨 의미인지 제가 너무 궁금하고요.
[찌니] 오잉님의 나이를 고려한 멘트인 것 같아요.
[오잉] 터줏대감은 조선시대에 쓰던 말 아닌가요?
[써니] 검색해 봤더니 한국 토속 신앙에서 집터를 지키는 땅의 신이라고 할아버지 사진이랑 같이 나오고 있어요.
[찌니] 국어사전 보니까 집단의 구성원 가운데 가장 오래된 사람
[오잉] 그건 찌니님 아닌가요?
[찌니] 아니 메인으로 메인 MC
[오잉] 네 알겠습니다. 아이티백 터줏대감 오잉입니다.

오잉님의 간단한 자기소개 듣겠습니다.

저는 IT 서비스 기획자로 25년, 26년 차인가 잘 모르겠지만 1999년에 라이코스 코리아에서 처음 일을 시작한 사람입니다. 이게 자기 소개 맞겠죠?

라이코스를 모르는 친구들이 계실 것 같은데 어떤 회사였는지 여쭤봐도 될까요?

라이코스는 미국의 검색 엔진 업체였어요. 대한민국에 1999년에 검색 엔진 서비스를 하던 곳은 야후 코리아가 주름 잡고 있었고 라이코스 코리아가 막 들어와서 라이코스는 원래 미국에 있는 회사였고 한국의 지사처럼 그러니까 미래 산업의 정문술 회장님 투자로 합작한 회사가 라이코스 코리아였고요. 검색 엔진 업체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라이코스에서 처음부터 서비스 기획자로 일을 시작하신 거예요?

제가 일을 시작할 때는 서비스 기획자라는 개념이 적어도 라이코스 코리아에는 없었고요. 라이코스라는 미국 서비스가 한국에서 출시하려고 한다. 근데 검색 엔진 업체이긴 했지만 그 당시에는 검색할 수 있는 웹 페이지가 많지 않았고 웹 페이지가 많지도 않았는데 그거를 검색해 내는 기술이라는 게 전무했다고 봐야 해요. 그때는 홈페이지라는 게 막 생기기 시작할 때였어요. 사람들이 홈페이지가 뭔지도 잘 모르던 시절, 이런 집이 아니고 인터넷에 무슨 집이 있다던데 그게 바로 홈페이지야. 약간 이런 느낌이었어요.


싸이월드 전이군요?
싸이월드는 정말 젊은 서비스죠. 혹시 까치네나 미스 다찾니 이런 거 아시나요?

응답하라 1988에서 봤어요.

맞아요. 그 시절이라고 생각하면 되고 서비스 기획자라는 개념보다는 홈페이지들을 분류 체계, 그때는 디렉토리라는 게 있었어요. 웹 검색 전에 사이트들을 특정한 분류 체계 안에 담아두는 그래서 야후도 디렉토리를 가지고 있었고 라이코스 코리아도 역시 디렉토리가 있었어요. 그래서 그 당시에 IT 쪽으로 문헌정보학과 출신들이 많이 왔어요. 분류 체계를 알아야 하니까. 저는 그때 막 생긴 서퍼(Surfer). 그때는 서퍼라고 했어요.


포지션 이름이 서퍼예요?
그렇죠. 서퍼였어요. 그래서 잡지에서 인터뷰도 하고 그랬어요. 새로운 직종. 요즘에 AI 나온 후에 프롬프트 엔지니어가 새로운 직종으로 뜨잖아요. 그때 1999년에 저는 서퍼였어요. 인터넷 바다를 헤엄치는 서퍼였죠.


서퍼는 무슨 일을 해요?

웹상에 떠돌아 다니는 사이트를 서핑해서 분류 체계에 맞게 따다닥 정리해 주는 사람


수동으로 넣는다고요?
그렇죠. 분류 체계 안에
[찌니] 그때는 웹 사이트 자체가 많지가 않았으니까. 더구나 국내에는 많이 없었으니까 사람들이 검색으로 뭘 찾기보다는 그냥 전화번호부 찾듯이 내가 무슨 업체에 뭐 해야 될 때, 그 때 제일 많았던 게 꽃배달인데 꽃배달 업체를 꽃배달로 검색 할 수도 있지만 디렉토리 안에서 꽃배달을 찾아서 들어가는 거예요. 그럼 꽃배달 업체 중에 홈페이지를 가지고 있는 업체들을 찾아가지고 거기다가 다 등록을 해 놓는 거죠.


서퍼로 몇 년간 일하셨어요?
지금은 기획자, 디자이너, 개발자 어떤 이름을 가지고 사람들이 움직이지만 그때는 IT가 막 시작되던 때여서 너는 서퍼니 너는 기획자니 이런 느낌이 아니었어요. 그냥 모든 걸 다 하는 거죠.

그럼 어떻게 소개해요? 요새는 IT 스타트업에서 마케팅 일 하고 있는 누구입니다. 이런 얘기를 하잖아요.
소개할 일이 없죠.


부모님이 아니면 주변에 누가 오랜만에 만나서 '요새 뭐 하고 지내니?' 이렇게 하면 저도 UX 디자인 설명하는 데 오래 걸렸거든요. 그래서 그냥 앱 만들어요 이렇게 말했었단 말이에요.
지금은 그래도 앱 만들어요 라고 하면 ‘아 이걸 만드는구나’라고 아시잖아요. 그때는 인터넷, 홈페이지 이런 개념도 우리 부모님은 알 수가 없죠. '그게 도대체 뭐 하는 거야?' 그래서 그걸 설명하는 게 너무 어려웠기 때문에 부모님도 묻지 않았어요. 왜냐하면 물어도 자기들이 이해를 할 수가 없으니까. 근데 지금은 네이버야 네이버 다녀 그러면 본인들도 쓰니까 알죠. 그 시절에 우리 부모님들은 인터넷을 쓰는 사람이 몇 명이나 있었을까요? 스마트폰도 없었고 다 컴퓨터인데 그렇기 때문에 설명해도 알 수가 없었죠. 나를 아는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너는 도대체 무슨 일을 하는 거야?’라고 물었다가 내가 조금 설명해 주려고 하면 ‘아 머리 아파. 우선 알았다’하고 끝나는 그런 과정이었다고 보면 돼요.

오잉님은 어떤 과를 졸업하셨어요?

저는 경영정보학과를 졸업했고 경영정보학과는 경영학과 정보통신을 함께 했어요. 그 당시에 저는 꿈은 그게 아니었는데 아빠가 ‘너는 경영을 해야 돼’ 라고 하셔서 저는 사실 하고 싶지는 않았는데 그런가 하고 갔을 뿐이고 갔더니 무슨 데이터베이스나 C++ 이런 것도 배웠어요. 저도 개발 배웠어요.

선진학과였네요. 지금은 이제 융합학과가 나오고 나서야 문과랑 통합되는데 거기는 엄청 빠른 거 같아요.
맞아요. 저의 과거를 돌이켜 보면 모든 거에 시작을 다 제가 했다고 보면 됩니다. 내가 만들었다는 게 아니고 그런 경험들.

근데 경영학과잖아요. 그러면 갑자기 라이코스라는 회사로 서퍼라는 직무로 가기가 쉽지 않으셨을 것 같은데

90년대에 태어난 사람들 앞에서 90년대 학번인 제가 얘기하는 게 이해가 안 될 것 같아요. 시대가 달랐다는 걸 전제하는 게 좋고요. 대학을 졸업하고 졸업반일 때 저의 고민은 그때는 여자들이 사회생활을 그렇게 다 하는 게 아니었어요. 그렇기 때문에 나는 주부가 될 생각은 없었으니까 사회생활을 해야 될 것 같은데 여자가 사회 생활을 할 때는 그 때 유니폼을 입는 경우도 있었고 아니면 정장을 입고 화장을 하는 게 필수이기도 했고 심지어 그때는 토요일에도 근무를 하던 시절이었어요. 그래서 저의 졸업반 때의 고민은 ‘내가 회사라는 데를 다녀야 하나, 다녀야만 하지만 다닐 수 있을까’ 이런 게 좀 많이 고민하던 때였고 신문을 보다가 우연히 광고에서 정보통신대학원대학교라는 곳에서 6개월 과정으로 풀타임 교육 과정이 있었어요. 기획, 디자인, 개발 이렇게 세 분야의 사람들이 교육을 받고 그 다음에 팀으로 프로젝트를 하는 6개월짜리 과정이 신문 광고에 나와서 여기를 가볼까?


부트캠프 1세대?

맞아요. 그 전에도 뭐가 있었을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 시절이 제가 너무 존경하는 김대중 대통령님께서 대한민국을 IT 강국으로 만들기 위해서 굉장히 많이 노력하던 때였어요. IMF 직격탄이고 막 이래서 일반 기업에서 정리해고 당해서 쏟아져 나오는 사람들이 있고 우리나라가 다음 먹거리는 정보통신이다라는 것 때문에 굉장히 거기에 투자를 많이 했고 그래서 거기를 우연히 가게 된 거고 교육 과정에서 만난 동료가 라이코스가 한국에 코리아 법인을 세우는데 와서 같이 해볼까 해서 갔던 거예요.


그러고 나서 오래 다니신 전 직장으로 이직하신 거예요?
라이코스 코리아에서 3년 동안 제가 서퍼라는 이름으로 일했다기보다는 3년 동안 라이코스 코리아에서 여러 가지 디자인도 아닌 개발도 아닌 어떤 일을 했다 라고 보면 되고 그렇게 3년 일하다가 아무 생각 없이 퇴사를 먼저 했어요. 쉬고 싶어서요.

왜 쉬고 싶었어요?

그때 생각하면 화가 나서 그만둔 것 같아요. 그냥 화난 감정만 남아 있고 퇴사하겠다고 그랬더니 그 위에 실장님인가 누가 그때는 그런 분들 방이 따로 있으니까 면담 오라고 해서 나 그만두겠다. 그분은 왜 그만두냐 뭐 이러다가 그냥 그만 둔 거 같아요.


이직처를 정하지도 않고 퇴사하시고 뭐 하셨어요?

쉬었다니까. 그때는 쉬고 싶었어요. 요즘은 회사 엄청 잘 그만두잖아요. 제가 3년 동안 회사를 다니고 그만둔 게 이렇게 놀랄 만한 일인가요?

요새는 그게 쉬운데 그때 당시 시절에는 회사 쉬고 이런 거 지양하는 분위기 아니었어요?

저도 그게 첫 회사였고 제가 그만두기 전에 그만뒀던 사람도 있었으니까 지금 뚜가님이 물어보는 느낌이 뭔지 제가 딱 알아차리기가 어려워서 잘 모르겠어요.


아빠 회사 다니는 시절만 해도 6일 회사 나가고 연차도 잘 못 쓰고 갭이어 같은 것도 다음 커리어를 생각했을 때 좋게 보지 않고 이런 분위기 아닌가요?
평생직장 이런 느낌을 생각한 건가요? 거기가 IT 회사였잖아요. 저는 IT가 아닌 회사를 다녀보지 않아서 그런 데는 어떤지 모르지만 그리고 특히나 라이코스 코리아는 깨어 있는 사람들이 많았어요. 근데 이거는 제가 다른 회사를 다니지 않아 봤기 때문에 그렇게 느끼는 거고 제가 라이코스가 열려 있고 또라이들이 많았네 라고 느끼게 된 거는 네이버에 입사하고 나서였어요. 네이버에 입사했더니 여기는 IT 회사가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재미있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고 점잖고 그냥 만약에 내가 IT가 아닌 일반 사무직 회사를 갔다면 이런 분위기였을까 이런 느낌이었어요. 근데 네이버도 IT 회사였기 때문에 안 그랬을 거거든요. 근데 라이코스가 워낙에 똘기 있는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에 제가 상대적으로 그렇게 느꼈던 것 같아요.

그러면 3년 동안 일하고 그만두시고 뭐 하셨어요?

제가 4월에 그만둔 것 같아요. 꽃이 피잖아요. 너무 행복해요. 퇴사는 봄에 해야 돼요. 그래야 남들 회사 다닐 때 퇴사하는 나는 너무 행복해. 근데 가을에 퇴사를 하면 좋았던 건 잠깐이고 그 다음부터 너무 외롭고 쓸쓸하고 추워져. 그래서 항상 퇴사는 봄에 하고 퇴사하기 전에 마이너스 통장을 만들어 놓고 해라라는 걸 제가 항상 얘기해 줘요. 그래서 저는 퇴사는 4월에 해서 그냥 즐겁게 두 세 달 잘 쉬었고 근데 회사를 그만두면 이런 저런 것들이 다 끝나는구나라는 걸 저도 그때 20대 중반이었잖아요. 그때 처음 알게 된 거예요. 준비라는 걸 하고 퇴사를 할 필요가 있구나 라는 걸 해보고 알았어요.

그렇게 몇 개월 쉬셨어요?

6개월 쉬었어요. 6개월 쉬고 2002년에 네이버에 들어갔어요.

네이버에는 무슨 직무로 들어가신 거예요?

그때는 기획자라는 이름으로 불렸는지는 잘 모르겠는데 검색 사업팀. 라이코스에서도 계속 검색을 했었고 네이버도 검색으로 갔어요.

그렇게 네이버에 검색 사업팀으로 들어가셨어요. 직장 생활 거기서 몇 년 하셨죠?
2002년에 입사해서 2019년에 퇴사했어요 몇 년이에요?


18년. 약 열 여덟해 동안 한 회사에 다니셨어요? 중간에 휴직도 안 하셨어요?
휴직 5개월 했어요. 저는 결혼을 안 했기 때문에 육아휴직 이런 것도 안 해보고 진짜 계속 회사를 다녔어요. 아 정말 나 너무 일만 한 것 같아.

네이버에서 일하시는 동안 검색 사업팀에서 다른 거 많이 해보셨을 거 같아요.

입사는 검색 사업팀으로 했는데 두 달인가 세 달 만에 검색 컨텐츠팀으로 옮겼고 계속 검색 일을 한 10년 했어요. 그다음에 어학사전 서비스도 한 10년 했고 마지막으로 뮤직, 바이브 하다 나왔어요.

2002년에 네이버는 어땠어요? 라이코스랑은 비교하면 그냥 일반 회사 같지만 그래도 어떤 상황이었나요?

제가 라이코스에 있을 때 네이버는 라이코스보다 아래였어요. 그래가지고 라이코스가 여의도에 있다가 강남역으로 이사 왔고 네이버도 역삼이나 강남 어디 언저리에 사무실이 있었다고 듣기는 들었는데 네이버가 뭔가를 홍보한다고 강남역 사거리 밑으로 내려온 날이 있었거든요. 그때 라이코스는 강남대로에 있는 큰 빌딩에 입주해 회사였기 때문에 라이코스 사람들끼리 ‘네이버가 지금 여기 강남에 내려왔다는데 이것들이’ 그러니까 제가 라이코스 있을 때 네이버는 아직 크고 있는 그런 상황이었고 네이버에 입사했을 때는 이미 지식인이 탁 터져가지고 진짜 그때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팀원들이 모여서도 맨날 지식인에 물어봐 이 얘기를 정말 입술에 붙어 있는 것처럼 계속하면서 지내던 시기였던 것 같아요.

너무 재미있을 때 네이버에 계셨네요.

근데 저는 별로 재미 없었어요.


왜요?

사람들이 지루해서. 저는 좀 그랬던 것 같아요. 그런 것도 있었고 다른 사람들은 이미 아는 상태에서 저만 새로운 사람으로 들어간 경험이 삶에서 처음이었던 것 같아요. 그것 때문에 긴장되고 스트레스가 있어서 입사하고 한 달 내내 체했던 것 같아요. 좀 힘들었어요. 그런게

입사하셨을 때 네이버에 임직원 수가 몇 명이었어요?

그때 200명 정도였던 것 같아요.

검색 팀에 10년 있으시다가 어학사전 팀으로는 어떤 계기로 넘어가게 되신 거예요?

네이버도 성장하는 과정에서 운영해야 될 것들도 많고 회사가 이런저런 도메인들로 확장하고 이러면서 운영을 전문으로 해 줄 회사를 만들었어요. 운영 전문 자회사. 그래서 검색도 종류가 굉장히 많으니까 검색하고 관련된 다양한 운영들을 할 팀을 자회사에 꾸렸고 그 팀을 맡아서 이동을 했었어요. 운영 전문 자회사의 검색 운영 어쩌고로 그렇게 해서 또 한 3년 있다가 다시 네이버로 돌아왔고 그러면서 어학사전을 가게 됐던 것 같아요.

오잉님이 80명 가까운 팀원들을 이끄셨을 때가 그 운영 자회사에 있으셨던 거군요? 몇 년차에 가셨던 거예요?

2005년이니까 몇 년 차 일까요? 6년 차. 그때 서른 살 이랬던 것 같아요. 제가 맨날 ‘사수가 왜 필요해’ 이렇게 얘기하는 게 제 기준으로 생각하면 선배고 뭐고 없고 모든 게 다 처음이고 ‘이전에 어떻게 했어요?’라고 물어볼 수 있는 레퍼런스나 사람이나 없던 상황에서 굉장히 오랜 시간을 일을 했기 때문에 그런 게 왜 필요하지 이런 생각이 저는 습관적으로 드는 것 같아요. 근데 그때랑 지금이랑은 상황이 다르니까 하여튼 저는 그렇습니다.

80명의 팀원을 맡게 되셨을 때 어떠셨어요 심정이? 아찔하셨을 것 같은데

처음에 네이버에서 운영 전문 자회사가 생긴다고 할 때 제 입장에서는 회사 소속을 옮기는 거잖아요. 처음에 옮길 사람을 선발하는 것도 아무나 보낼 수 없는 건 거예요. 어느 정도 일을 아는 사람이 가야 되는 거잖아요. 그래서 본인의 의사를 물어보는 거죠. 갈지 말지를. 저는 갈까 말까 그랬는데 엄마는 가지 말라고 했고 아빠는 그 일은 너밖에 할 수 없으니까 가라고 했어요. 근데 저는 아빠를 닮았기 때문에 제가 생각해도 내가 잘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가겠다고 했고 거기서 회사를 세팅했기 때문에 채용을 막 했어요. 근데 네이버라는 회사에서 하는 채용하고 운영 전문 자회사 소속의 사람들을 채용하는 건 다른 사람을 채용하는 거예요. 운영 전문 자회사의 직원은 예를 들면 월급이 100만 원이야. 그리고 계약직인 거예요. 근데 이거를 처음부터 젊은 친구들한테 똑바로 얘기해 주지 않아. 그러니까 중간에 아웃소싱 업체가 끼어가지고 사람을 우르르 뽑아서 저는 그런 거에 대한 영문을 모르고 어떤 식으로 회사를 세팅하는지 알지 못하고 일만 생각하고 거기를 갔는데 처음에 아수라장인 거지. 뽑힌 애들은 애들대로 나는 속았네 어쩌네 하지. 그때는 그런 개념이 별로 없었잖아요. 지금은 자회사도 있고 계약직도 있고 이런 때였는데 그때 그 시절에는 그런 개념이 그렇게 많지를 않았어요. 그리고 보통 네이버라고 하면 네이버라고 생각하지. 근데 그런 걸 잘 모르니까. 저도 그때 어렸고 사회가 이렇게 무서운 거구나라는 걸 나는 그때 처음 느꼈던 것 같아. 그런 무서움도 처음 느꼈지만 어쨌건 저는 이 팀의 리더로 왔고 이 친구들은 제가 보호해야 되는 사람이 돼 버린 거잖아요. 졸지에. 그래서 그게 좀 너무 힘들었어요. 갑자기 나도 네이버에서 왔는데 네이버 애들이 우리 애들을 약간 좀 하대하고 무시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들 때도 있고 아닐 때도 있지만 나는 항상 화가 났었어. 또 저는 지는 걸 싫어하기 때문에 우리 팀이 그런 취급을 받지 않게 일을 탁월하게 잘했으면 좋겠다라는 마음이 있어서 우리 친구들을 한테 여러 가지 좀 힘들게 하고 이런 것들이 있었던 것 같아요. 이게 질문이었나?

아니요. 그냥 심정이 어떠셨는지

그런 심정이었어요. 그런 아주 복합적인 심정이었어요. 그래서 제가 그때 굉장히 사회의 쓴맛을 크게 봤다. 그리고 좀 더 어른이 됐다고 느꼈어요. 많은 깨달음을 준 시간이었던 것 같다고 느껴요. 그 시절은 저한테 되게 복잡한 시기였던 것 같아.

네이버에 다시 돌아오셔서 가실 때는 어학사전 팀으로 갈 선택권이 있으셨어요?

돌아와서 제가 어학 사전을 선택했던 건 아니고 이것저것 다양한 서비스들 이런 걸 조금 하다가 어학사전으로 갔던 것 같아요.

어학사전에서는 몇 년 있으셨어요?

9년. 2009년에 어학사전 시작해서 제가 2018년에 클로바 뮤직으로 옮긴 것 같아요.

어학사전에 9년이나 계셨잖아요. 그중에 가장 기억에 남는 프로젝트가 있나요?

기억에 남는 프로젝트가 다 너무 재밌어 가지고 지금 못 고르고 있는 거예요. 그래도 국어 사전 개편이 저한테는 제일 기억에 남는다고 얘기하는 게 맞는 것 같아요. 큰 프로젝트이기도 했고 저는 남들이 안 하는 거를 하고 싶다는 마음이 있거든요. 그래서 그때도 유의어 사전 이런 거 같이 넣어서 그것도 유의어 사전 소싱 하느라고 찾아다니고 여러 가지 과정을 거쳐서 국어 사전을 굉장히 훌륭하게 잘 만들었다라고 생각하는 프로젝트여서요.

오잉님의 커리어에는 재미만 있을 거라는 생각을 막연하게 했는데 아까 운영 얘기도 그렇고 사전 얘기도 그렇고 명암이 보여서 감회가 새로워요.

그렇죠. 즐거움만 있을 수가 있을까요? 근데 그 당시에는 너무 고통스러운 것들도 시간이 지나면 약간 퇴색되기도 하고 그 당시에는 그게 너무 고통이었는데 시간이 지나고 보니까 아 그래도 나한테 이렇게 좋은 뭐가 되기도 했구나라고 생각하게 되는 거지. 고통이 있죠.


그러면 그때 처음 찌니님과 만나신 거예요?
맞아요. 2009년에 어학사전 하게 되면서 그때 어학사전 담당자가 찌니님이었어요.

어떻게 친해지게 되셨나요?
안 친해졌고 사실 우리가 회사 다니면서 일만 하지는 않잖아요. 그리고 또 IT는 컴퓨터가 있으니까 뉴스도 좀 보기도 하고 이러잖아요. 그냥 나도 모르게 일을 하고 있었는데 ‘어 내가 왜 지금 뉴스를 보고 있지’ 이럴 때가 있잖아요. 회사 와서 다른 일 안 하고 오로지 일만 하는 사람을 처음 만났어요. 제가 검색만 쭉 하다가 어학 사전이라는 것에 대한 전문성 없이 팀을 옮겼기 때문에 아는 게 많지 않았어요. 그리고 어떤 두려움이 있잖아요. 내가 모르는데 근데 그게 신입이면 좀 덜 떨리는데 경력인데 나는 모르는데 아 어떡하지 라는 생각이 있어서 찌니님하고 좀 친해져야 되겠다라는 생각이 있었는데 찌니님이 일만 하는 사람인거예요. 그래가지고 제가 좀 그때 어려움이 있었어요. 마음의 어려움이 있었어요. 찌니님이 일부러 그런 건 아니고 오잉이라는 애가 왔는데 경력이라고 하니까

[찌니] 그때 실장님이 오잉이라는 애가 오는데 걔가 엄청 일 잘하는 애다. 검색해서 날렸던 애다. 그래서 나는 당연히 다 알고 있는 줄 알았어요. 그렇게 일 잘하는 애가 온다는데 알아서 잘하겠지.

그때부터 9년을 계속 같이 일하신 거예요?

맞아요. 그때 상황을 말씀드리면 네이버 어학사전이 엄청 잘 나갔어요. 그러다가 네이버에 어학사전 하고 있던 분이 다음(Daum)으로 이직을 하면서 다음이 사전에 돈을 엄청 투자한 거예요. 네이버는 지금도 그렇지만 1등이 아닌 서비스가 별로 없어요. 근데 사전이 1등을 놓쳤나 아니면 놓치게 생겼나 그런 상황이 돼버린 거예요. 그러면서 사전에 엄청 돈과 사람과 이런 것들을 투자해서 다시 키우는 그 시기에 찌니님과 제가 어학사전에 있었어요.

10년 동안 애정을 가지고 어학사전에서 일을 하셨는데 갑자기 뮤직으로 가시게 됐어요?

어학사전에서 진짜 많은 서비스를 만들었어요. 그동안 얼마나 많은 서비스를 만들었겠어요. 근데 만들 만한 거 다 만들고 나니까 재미가 없는 시기가 왔어요. 그때는 네이버에서 클로바라고 스피커도 만들고 그런 조직이 크게 생겼을 때여서 찌니님이 나는 어학사전 밖으로 나가 보겠다 그러셔서 네 잘 가세요. 저도 사실은 어학사전에서 그렇게 즐겁지 않은 그냥 그냥 지냈던 것 같아요. 저는 어렸을 때 꿈이 가수였어요. 그래서 음악 서비스, 음악을 하고 싶었어요. 근데 찌니님이 클로바 뮤직에 사람 구하는데 생각 있냐고 해서 갔어요. 너무 덤덤하게 얘기했죠. 근데 사실은 너무 행복했고 그때 너무 행복해서 저는 교회를 안 다니는데 엄마한테 헌금하라고 돈을 줄 정도로 행복했어요.


그렇게 뮤직을 가셔서 어떤 일을 또 하셨어요?
클로바 뮤직은 그때 스피커가 한창 깔리던 시점이어서 음악 추천 이런 거 그리고 스피커라는 디바이스를 가지고 음악을 어떻게 서비스 할 수 있을까 이런 것들을 많이 생각했던 때였던 것 같아요. 그러다가 스피커가 잘 안 됐잖아요. 근데 또 1등이 아닌 서비스 중에 하나로 뮤직. 그래서 네이버 뮤직을 어떻게 해야 되겠다라는 미션이 있었고 그래서 네이버 뮤직을 개선하는 게 아니고 새 서비스를 만들겠다라는 비전을 가진 더 큰 리더님이 있었어요. 그래서 그분이 하는 프로젝트 그 조직으로 가게 됐죠.


그러고 갑자기 퇴사를 하셨어요. 왜 퇴사하셨어요?

저는 일로는 검색이랑 어학사전을 주로 했는데 그 두 개의 서비스는 점잖은 서비스예요. 이용자들도 그렇고, 이 서비스를 네이버라는 회사 안에서 만드는 사람들도 그렇고, 서비스하고 관련된 대학의 교수님들, 파트너, 국립국어원 그런 점잖은 사람들과 20년 가까이 일하다가 음악은 저도 모르고 간 거죠. 어쨌건 네이버라는 회사 안에서 하는 음악 서비스니까 달라도 얼마나 다르겠어 했더니 너무 다르더라고요. 그냥 요란 법석 했으면 그 정도는 견딜 수 있을 것 같은데 좀 차원이 달랐던 것 같고 너무 뒤늦게 거기에 가서 제가 적응하기 어려웠던 게 있었던 것 같아요.

어떤 점이 제일 특징적으로 달랐어요?

[찌니] 오잉님은 보기와 달리 아이(I)잖아요. 거기는 어떻게 보면 약간 극 이(E)들만 모여 있다고 해야 되나. 거기서 오는 다양한 에피소드들이 있었던 것 같아요.
[오잉] 너무 다양한 에피소드가 있었어요. 그리고 그때가 20년 차 됐던 때여서 그게 두 개가 겹쳐서 그랬는지는 몰라도 직장 생활 20년차인 사람이 회사 안에서 해야 할 역할이라는 게 분명히 있는데 그런 것들에 대한 준비도 안 돼 있었던 것 같아요. 저는 회사 다니면서 항상 회사 가는 게 즐거웠거든요. 월요병 이런 거 모르고 근데 그때 마지막 해는 너무 힘들었어요. 회사를 너무 가고 싶지 않았어요. 그래서 퇴사했어요.

20년차로써 준비됐어야 되는 덕목이 뭐예요? 감히 상상이 안 되는데

자기 일을 주로 하잖아요. 앞에 여자들은 이라는 말을 붙여야 될지 말아야 될지 조금 주저하게 되는데 여자들은 자기한테 주어진 일을 잘 하는 게 굉장히 중요하고 리더십을 가졌더라도 우리 팀원들이 만족하게 이런 거에 좀 더 집중을 하는데 실제 회사가 원하는 건 그거는 아닌 거잖아요. 그런 거에 대한 이해나 ‘나한테 원하는 건 일 잘하는 게 아니었네’ 라는 걸 깨달은 후에 내가 할 수 있는 게 없었어요. 왜냐하면 그 전에 준비가 안 돼 있었기 때문에 그래서 이걸 어떻게 해야 되나라는 절망적인 마음이 그때 많이 들었던 것 같아요.


퇴사를 하시고 창업을 하게 되세요. 창업을 염두에 두고 퇴사하셨나요?
아니예요. 제가 창업 스토리 얘기할 때 맨날 했던 말 20년 차가 되어서 우선 회사를 그만두고 안식년으로 쉬자. 20년 동안 쉼 없이 일했으니 라고 쉬려고 했는데 어쩌다 창업을 하게 돼서 안식년이 아니고 안 쉰 년이 되었다. 쉬지 못했습니다.


바로 창업하셨어요?

2019년에 제가 퇴사를 했잖아요. 2019년 4월에 퇴사했습니다. 퇴사하고 지금 하고 있는 제가 창업한 회사의 첫 번째 MVP를 12월에 했어요. 안 쉬려고 한 게 아니고 쉬었어요. 쉬는 동안 시간이 많으니까 여성, 지역, 창업 이런 키워드를 가지고 뭐 하는 프로그램이 있더라고요. 네이버 다닐 때는 돈을 벌어야 된다는 사업적인 마인드가 많이 필요하지 않은 역할을 했었기 때문에 저기 가면은 비즈니스, 돈에 대해서 좀 알려주지 않을까 해가지고 그냥 갔던 거예요. 시간이 많으니까. 그런데 처음에는 아이템 같은 거 필요 없다고 했어요. 가자마자 아이템을 만들어오라고 해가지고 어떻게 할까 하다가 키워드가 지역, 여성 뭐 이런 거였으니까 그럼 우리 지역이 분당, 분당에서 유명한 건 IT, 그러면 그냥 다 같이 서로 뭘 하는 걸 해볼까 어떻게 하다가 그러면 사이드 프로젝트 해서 같이 하는 걸로 비사이드(B-Side)로 해보자 그러고 그냥 주말 동안 뚝딱 해가지고 갔는데 ‘너무 괜찮은 것 같은데요. 그러면 바로 테스트를 해보세요.’ 이래가지고 그렇게 됐어요.

그렇게 2020년에 창립하신 거예요?
2019년에 MVP 시작했고 2020년에 어떤 대회를 나가가지고 거기서 투자를 받게 됐어요. 그래서 2020년에 어쩔 수 없이 법인을 만들었어요. 다른 분들의 창업 스토리는 되게 위대하잖아요. 근데 저희는 그런 큰 비전이나 이런 거 없이 그냥 어어어하다가 왔기 때문에 정말 그냥 있는 그대로 솔직하게 말씀드리는 거예요. 이게 뭐 겸손도 아니고 낮게 일부러 얘기하는 것도 아니고 정말 있는 그대로. 만약에 그때 그 대회를 안 나갔고 수상을 안 하거나 투자를 안 받았으면 법인을 안 세우고 그냥 개인 사업자로 남지 않았을까 모르겠어요.

진짜 창업 스토리처럼 계획적으로 만들어졌을 줄 알았는데 진짜 우연과 우연을 거쳐서

맞아요. 계획한 게 아무것도 없었어요. 그래서 제가 엄청 황당했던 게 창업을 하고 그때 그 디캠프에 입주를 했거든요. 투자 받느라고 서류 같은 거 해가지고 우편으로 보내는데 네이버 다닐 때는 봉투가 4층 내려가면 다 있거든요. ‘봉투부터 사야 되는 거였어? 창업은 이런 거였어?’ 이런 깨달음이 있죠. 그걸 들고 우체국에 가가지고 부쳐야 되고 서류에 원본 대조필 이라는 도장을 찍어야 되는데 그 도장이 없어. 우리 옆에 있는 팀 경영 지원 담당하는 친구가 빌려줬어요. 약간 그런 식.

그렇게 창업하신 지 5년이 되셨어요. 감회가 어떠세요?

힘듭니다. 롤러코스터 탄다고 하잖아요. 감정의 롤러코스터 인 것 같아요. 그래도 지금은 5년 차니까 어느 정도 포기할 건 포기하고 이것만 중요하게 가져가자라고 정리하고 이런 것들이 있긴 하지만 그 사이에는 못 겪었던 감정 ‘아 내가 이런 사람이구나, 이런 감정은 이런 거구나’라는 걸 느낀 게 저는 굉장히 많았던 것 같아요.

대표적으로 하나만 얘기해 주실 수 있으세요?

저는 살면서 고민을 하거나 불안하다는 감정을 느낀 적이 별로 없어요. 마지막에 퇴사할 무렵에는 약간 그런 게 있긴 했는데 그래도 생각해 보면 크게 고민을 한다거나 불안하다는 느낌을 많이 가지지는 않았던 것 같아요. 그래서 그 감정이 뭔지 몰랐고 주변에 사람들이 고민을 많이 하잖아요. 불안해하고 그러면 이해가 잘 안 됐어요. 무슨 감정인지 잘 모르니까 근데 창업하고 뭔가 바닥으로 꺼지는 그런 느낌이 있더라고요. 너무 불안하고 고민이 되는 그런 감정이 느껴져서 ‘아 이게 불안이라는 건가 보구나’ 라는 걸 좀 깨달았고 그걸 느낀 후로 회사 다닐 때 내가 보기에 ‘저 사람은 저게 왜 이렇게 답답하게 저러고 있지’라고 느꼈던 그 사람이 불안하고 고민되는 마음이었구나라는 생각이 그때 들어서 지금은 누가 고민되고 불안하다고 하면 예전과는 다르게 아 그럴 수 있지 요 정도는 할 수 있는


어떤 게 제일 불안하셨어요?
돈이 떨어지니까 너무 불안하더라고요. 그래서 ‘내가 이런 거면 너무너무 불안해지는구나. 그런 사람이구나’라는 걸 알게 됐어요. 다른 거는 별로 안 불안한데 돈이 떨어지면 우리 직원들 월급을 줘야 되는데 그게 책임감에서 비롯된 건지 뭔지는 모르지만 그것 때문에 너무 힘들었던 것 같아. 그랬어요. 돈 때문이었습니다.

오잉님이 일하면서 만난 좋은 상사와 후배 동료는 어떤 사람일지가 되게 궁금했어요. 생각지도 못한 걸 알게 해준 사람이라고 써주셨는데 직장 생활이 기신 만큼 생각지도 못한 걸 알게 해 준 분들 많으셨을 것 같아요. 그중에 가장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가 뭐예요?

너무 많은데 정말 딱 한 사람만 꼽으라면 저는 한OO 대표님이 저한테 준 깨달음이 가장 기억에 남는 것 같아요. 어학사전 한참 할 때 찌니님 위에 있는 실장님이 계셨는데 너무 점잖고 고요한 분이어서 제 울화통이 치밀게 했어요. 저는 그분이 너무 싫었어요. 지금은 마음이 달라지긴 했지만 그 당시에는 너무 싫었습니다. 그래서 너무 화가 나서 찾아가서 ‘나는 이 실장님 때문에 일을 못 하겠다’ 그랬더니 한참 저 얘기를 듣더니 ‘그래서 네가 원하는 게 뭐야?’ 이러더라고요. 근데 생각해 보니까 나는 실장님이 싫다는 생각만 있었지 내가 원하는게 없더라고요. 그랬더니 대표님이 여자애들이 맨날 이렇게 온다는 거예요. 근데 ‘그래서 너 원하는 게 뭐야?’ 그러면 지금 너처럼 딱히 그건 없데, 그리고 프로젝트나 사업적으로 새로운 걸 해야 될 때도 본인이 어떤 여자 누구한테 너 이거 좀 해봐 그러면 자기는 못한다고 손사레를 친다는 거예요. 근데 그 친구보다 누가 봐도 실력이 부족한 남자애는 손을 들고 제가 하겠다고 한다는 거예요. 그러면 자기 입장에서 그 여자 직원이 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지만 걔는 안 한다고 하고 다른 남자애가 손을 번쩍번쩍 들면서 나를 시켜달라고 하는데 자기는 그 남자애를 시켜줄 수밖에 없지 않느냐 그러면서 저한테 ‘실장이 그렇게 싫으면 그 실장이 너를 마음에 들게. 네가 실장 싫어하는 감정과 상관없이 그 실장이 오잉 너를 굉장히 아끼는 직원이 되게 그렇게 해 봐.’ 그래서 진짜 머리를 한 대 맞고 나온 느낌이었어요. 그래서 저의 목표가 실장님 마음에 드는 직원이 되기.

잘 달성하셨어요?
저는 그렇게 매년 저만의 목표를 세워서 그걸 잘 달성했어요. 전 달성해요. 그래서 실장님이 저를 엄청 믿는 직원이 됐어요.

그랬더니 문제가 해결됐어요?

그 문제는 해결됐죠. 그 후에 다른 문제는 다른 상황 때문에 생겼어요. 그 실장님이 엄청 저를 잘 대해주셨죠. 저도 실장님을 엄청 존중하고 그래서 우리 관계가 한참 좋았던 때가 있었는데 어느 날 갑자기 불어닥친 사건 사고 때문에 와르르 무너져 버렸어요. 저는 그때 대표님이 저한테 해 주셨던 그 이야기가 너무 생각지도 못한 충격적인 이야기였고 거기서 깨달음이 크게 왔었어요. 그래서 저도 동생들에게 항상 그 얘기를 하는 거예요. 저는 그렇게 생각해요. 그걸 좀 쉽게 내 삶에서 녹여내려면 ‘못해도 괜찮다’ 라고 생각하는 게 필요한 것 같아요. 잘하려고 하니까 손사레 치고 나는 못 할 것 같아 라고 하는데 못하면 어때. 제가 맨날 ‘야 거울 봐, 거울 봐. 네 얼굴을 봐. 이미 완벽하지도 않은 얼굴로 살면서 뭘 그렇게 완벽하게 하려고 하냐’ 이런 얘기를 많이 해요.

근데 대표님을 처음 찾아가셨을 때는 어떤 생각으로 가신 거예요?

실장님의 바보 같음을 대표님도 공감하고 같이 싫어할 거다라는 생각이 있었던 것 같아요. 제 마음속에는. 근데 실제로 제가 대표님을 만났을 때는 그때 대표님이 한 말이 그거였어요. ‘그 실장이 너무 이상해? 일도 못해? 그러면 너나 찌니나 너네들이 할 거야? 그것도 아니잖아’ 라는 말씀도 하셨던 것 같아요. 그래서 결국은 조직 구조가 이렇게 된 데는 내가 실장보다 부족한 애이기 때문에 그 실장 밑에 있는 거구나 라는 깨달음이 있었던 거죠.


살면서 이건 잘했다고 생각한 일을 신문 일기를 써주셨어요.

제가 활자 중독이 있어서 읽는 걸 너무 좋아해요. 근데 책을 계속 살 수가 없잖아요. 그리고 저는 남이 보던 책은 안 좋아해가지고 새 책을 항상 사야 되거든요. 너무 돈이 많이 들어서 신문은 읽을 게 되게 많은데 매일 오잖아요. 그래서 신문 보는 걸 좋아하는데 의외의 정보들, 저에게 도움이 된 정보들을 신문에서 많이 얻었어요.


요즘 시간과 돈을 가장 많이 쓰고 있는 것에 잘 놀고 좋은 거 먹기라고 써주셨어요. 오잉님은 뭘 하시면 잘 놀았다고 생각하세요?
저는 술 먹고 춤추고 이런 걸 안 좋아하니까 저한테 노는 건 그런 건 아니고 하고 났을 때 이걸 다음에 이런 씨앗으로 쓸 수 있겠네 이런 생각이 드는 거. 아니면 지금 이 순간이 너무 행복해서 이 행복한 마음을 가지고 이 다음 힘든 상황도 괜찮게 넘길 수 있어 이런 느낌이 좀 잘 놀았다고 느껴지는 것 같아요.

어떨 때 그런 느낌이 드세요?

어떨 때? 바람이 싸악~ 제가 굉장히 추상적으로 생각하고 그거를 말로 하면 너무 이상해져 가지고. 왜냐하면 제 머릿속에는 어떤 구체적인 이미지가 사진처럼 딱 들어 있는데 그거를 말로 한들 안 느껴지잖아요.

아니면 최근에 있었던 실제 사례를 말씀해 주셔도 되잖아요.

최근에 새벽에 산을 가고 있어요. 근데 공기가 차갑고 고요한데 살짝 밝은 그 차분한 느낌이 너무 좋더라고요.

차분한 걸 좋아하셔서 10년 후 나의 멋진 하루에 364일은 사람 없는 곳에서 조용하게 책 읽고 음악 듣는데 딱 하루만 사람들과 웃고 먹고 떠들고 즐거운 시간 보내기 라일락 향기가 가득한 특정한 장소에서 라고 써주셨어요. 라일락 향기가 가득한 특정한 장소 생각해 두신 곳이 있으세요?

없고요. 제가 라일락 향을 너무 좋아하고 4월, 5월 이때. 그때 낮에 더울 거잖아요. 오후가 되면 살짝 기온이 떨어지니까 어스름할 때 사람들이 모여서 좋은 거 보고 음악 듣고 이랬으면 좋겠다. 그 날에 제가 살아 있을 수도 있고 죽어서 없을 수도 있고 하지만 사람들은 그때 모여 있으면 좋겠다.

처음으로 자신의 죽음에 대해서도 써주신 첫 번째 인터뷰이입니다.

그걸 생각해야 되는 나이에요. 95년에 태어난 뚜까가 뭘 알겠어. 내 앞에서 18년, 18년 소리나 하고. 그거는 슬픈 이야기가 아니에요. 그냥 그러면 좋겠다.

시간이 지나도 변하지 않았으면 하는 나의 모습에 참지 않는 것이라고 써주셨어요. 어떤 것들을 참지 않으세요?

대부분 안 참는 것 같아요. 이걸 쓴 이유가 뭐냐면 사람들하고 얘기를 하다 보면 뭘 많이 참더라고요. 그래서 아는 거예요. 어 저 사람 뭐 이런 것까지 참아 그러면 상대적으로 나는 너무 안 참나 이런 생각이 들어서 안 참고 살아. 잘 살아왔네. 앞으로도 계속 참지 말아야지 약간 이런 느낌이에요.

다른 사람들은 주로 어떤 거를 참는데 오잉님은 안 참는 거 같아요?
참아 마땅한데 참는다는 의미가 아니고 예를 들면 아 나는 이걸 하고 싶은데 다른 사람들이 이상하게 볼까 봐 아니면 내 커리어가 이렇게 될까 봐 아니면 나 이거를 먹고 싶은데 옷이 안 맞을까 봐 이런 거 참잖아요. 어떤 의미에서 보면 참는 거잖아요. 근데 저는 그런 게 별로 없어요. 그냥 하고 싶은 건 한다. 물론 참는 게 있죠. 근데 그거를 아 내가 참아야 돼 이런 느낌으로 참지 않는 것 같아요.


이 자리를 빌려 오잉님과 찌니님께 감사의 말씀을 드리는 거는 사회에서 우리보다 먼저 간 선배들이 활발하게 일을 하는 게 많이 가시적이지 않은 것 같아요. 나도 저렇게 저 나이 되도 재밌게 잘 살 수 있겠다는 생각을 진짜 많이 하게 됐어요. 그래서 더 참지 말고 재미있게 살아주셨으면 합니다.
네 알겠습니다. 지금 뚜까님이 얘기한 것처럼 주변에 선배들이 안 보이네 라고 하지만 사실은 다 어디 있을 거예요. 연결고리가 없어서 만나지 못할 뿐이지 다 숨쉬고 살아 있다. 하나랑 그러면 찌니님이나 저처럼 나이든 사람이 혼자 자기 삶을 살지 말고 좀 나와줬으면 좋겠다라는 거 하나랑 그 두 가지가 생각이 났어요.

오늘 인터뷰이로서 차 한 잔 하셨잖아요. 소감 말씀해 주세요.

인터뷰이가 되니까 저는 재미가 별로 없다는 생각이 들고 저는 다른 사람 이야기 듣고 거기에서 생기는 어떤 의문과 연결되는 질문을 던지고 이야기하는 게 훨씬 더 재미있구나라는 걸 느꼈고 지금 아이티백 반환점 돌아가는데 지난 1년 동안 애써 주신 우리 뚜까님, 찌니님 고맙고 앞으로 1년 동안 또 애써주실 써니님 환영하고 재밌게 잘 했으면 좋겠습니다.



CREDIT

오잉

인터뷰 뚜까, 써니, 찌니, 오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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