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하나'라는 한글 이름을 가졌다. 온전할 전(全)이라는 성씨와 맞물려 '온전히 하나가 되어라'라는 뜻. 남북통일을 소망하며 아빠가 지었다. 처음엔 '누리'와 '겨레'도 생각했다는데 성과 붙여 읽으면 어감이 그다지 좋지 않고 별명이 많이 생길 것 같아 하나로 정했다고 한다. 다소 거룩한, 그 이름 뜻을 떠나 나는 아빠가 지어준 내 이름이 참 좋았다. 그래서 당연히 아이를 갖게 되면 이름은 내가 짓는 것이라 여겼다. 많은 사람들이 여전히 작명소에서 아이 이름을 짓는다는 건 나에게는 놀라운 사실이었다.
산후조리원에는 다양한 업체에서 교육이랍시고 와서 전단지를 뿌려댔는데, 그중엔 뭐시기 철학관도 있었다. 같이 있던 산모 중 나이가 마흔으로 가장 많던 언니(그냥 다들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언니라 불렀는데 그 언니도 대장 노릇을 퍽 즐겼던 것 같다. 무조건 반말이었다)는 거기서 15만원인가를 주고 이름 두 개를 얻어와 다른 산모들의 의견을 구했다.
또 어떤 산모는 다같이 둘러 앉은 식사 자리에서 작명 어플이 있는데 기가 막힌다며 소개를 하기도 했다. 자기가 미리 생각한 이름과 아이가 태어난 날짜와 시각을 입력하면 좋은 이름인지 아닌지를 퍼센트 지수로 측정해 알려준다고 했다. 자기 애 이름은 98%가 나왔다나 뭐라나. 그러자 옆에 앉은 산모는 "오 대박이다~ 언니 나 그 앱 이름 좀 이따 다시 알려주세요~"라고 맞장구를 쳤다. 진심같아 보였다.(나는 대체로 이런 이야기들을 퇴근하고 돌아온 남편에게 전하는 재미로 그곳에서의 시간을 죽였던 것 같다)
본론으로 다시 돌아와서, 내가 지은 아이의 이름은 '이현'이다. 기쁠 이(怡)에 햇살 현(晛)을 써서 '햇살에 반짝이는 기쁨'이라는 뜻으로 풀이했다. 게다가 성이 황씨라 '황금빛 햇살'이라고 덧붙였다. 둘 다 이름에는 흔히 쓰지 않는 한자어라고 하는데 그냥 그런 것과는 상관없이 정했다. 한자 획도 많지 않아 쓰기 쉬운 것도 마음에 든다.
만약 남편 성과 내 성이 조금 어울렸다면, 이를 테면 내가 전씨가 아닌 이씨나 유씨, 윤씨, 백번 양보해 정씨, 신씨 정도 였더라면, 두개의 성을 이어붙인 뒤 이름을 지었을 것이다. 이를테면 황이x, 황유x, 황윤x, 황정x, 황신x 이런 식으로. 그러니까 아빠 엄마의 성을 동시에 쓰면서 두글자 이름을 가장한 외자 이름으로. 사실 이것마저 왜 남편 성이 아닌 내 성을 바꿔가며 시뮬레이션 하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부모의 성을 동시에 아이에게 물려주고 싶은 것은 오랜 생각이었다. 이도 저도 조합하기 쉽지 않은 황씨와 결혼하기 전까지..(아이가 아빠의 성이 아닌 엄마의 성을 선택할 수도 있어야 한다고도 생각하는데, 이건 좀 더 논쟁적인 문제이므로 아이의 이름이 아닌 다른 이야기에서 차후에 해보려고 한다.)
이현 말고, 아이가 뱃속에 있을때 생각해둔 다른 이름 중 '제인'도 있었는데 남편 성씨인 황을 붙이면 황제라고 뻔히 놀림 받을 것이란 생각, 또 일부러 튀게 보이려고(?) 너무 유행하는 듯한 영어 이름으로 짓는 것 같단 얘기에 접었다. 그래도 아쉬웠던 것은 그 이름의 뜻이었는데 한자어로 별빛 제(㫼) 옥빛 린(璘)을 쓰고 싶었다. 특히 옥빛이라는 한자어가 좋았다.
찾다 보니 우연히도 옥돌 이(珆), 옥돌 현(玹)이라는 한자어가 있었는데 딸아이 이름에 꼭 돌을 넣어야겠냐는 남편의 반대로 결국 다른 한자어를 고르게 된 것이다. 나의 알 수 없는 옥 집착(!)에 친구들은 차라리 황옥으로 지으라 놀리기도 했는데, 그 한자어를 택하지 못한 것이 지금도 못내 아쉽기만 하다. 듣기만 해도 굴러갈 것 같은 구슬 옥(玉) 아니더냐. 조상들이 오죽하면 귀하디 귀한 자식들을 두고 '금지옥엽'라는 말을 했겠느냐고.
그러다 최근 '겸'이라는 글자도 이름으로 예쁘겠단 생각에, 그저 심심해 한자어를 뒤졌더니 옥돌 겸(㻩)이 있는 것 아닌가! 이게 무슨 운명의 장난인가 싶어 남편에게 말했더니 바로 진지한 표정을 짓고는 "둘째 아들이면 '이겸'!"이라고 답한다. 아이를 낳은 날, 열악한 병원 시설에 미안했는지 기력 없이 누워있는 내 손을 꼭 부여잡고 "둘짼 꼭 좋은데서 낳자"던 인간이다. 아니 둘째는 무슨 둘째인가! 그러나 한번 꽂히면 정신을 못차리는 나는, 이러다 이름짓기 위해 정말 둘째를 갖게 되는 것 아닌가 두려워졌다.
정신 똑바로 차리자. 애를 낳은지 이제 겨우 삼개월 지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