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아이, 우리 엄마.
겨울이 끝나가고 있는데 재수도 없지. 이번 계절에도 감기는 날 지나치는 법이 없었다. 며칠을 호되게 앓았다. 하필이면 엄마가 이모와 여행을 간 주간이었고, 남편도 늦는 날이 많았다. 아이와 조금이라도 떨어질 틈이 없이 붙어 있어야 했는데 내 몸에서 열이 나니 안고 있는 아이도 뜨거워지는 것 같고 급기야 콜록콜록대서 무척 속상했다.
결국 원치 않았던 친정행. 남들은 몸 푸는 날부터 친정에 쭉 눌러 앉는다는데 난 그냥 우리집이 젤 좋아서 특별한 이유가 없으면 잘 안가게 된다. 어쨌든 사흘을 밤낮으로 약을 먹었는데도 나을 기미가 안보여 아이 걱정도 되고, 남편은 계속 늦는 날이 많으니 삼시세끼 엄마밥 먹고 쉬라 그러고, 여행에서 돌아오자마자 나의 와병 사실을 알게 된 엄마도 어차피 자기가 가야 하니 오라고 성화고, 아이도 미리 적응시킬겸, 해서 한짐 꾸려 가게 됐다.
첫 날부터 스트레스였다. 아빠의 조심성 없는 재채기 소리, 엄마의 큰 목소리. 밤에도 꺼지지 않는 티비 소리.. 아이의 수면 패턴은 엉망이 되어버렸고 내 예민은 극에 달했다. 모자란 아침잠을 보충하는 시간, 졸려하는 아이 눈을 보곤 자라며 방 불끄고 나가면서 거실서 재즈 씨디 틀고 전동 핸드밀로 커피를 가는 울 엄마. 정말 미치는줄 알았다. ㅎㅎ
'엄마에게 아이를 맡기기로 했고, 아이가 살 곳은 여기다. 서로 맞춰가는 시간이 필요한거다. 엄마에게 나의 방식을 강요해선 안된다. 혼자 조바심 내선 아무에게도 도움이 안된다.' 이렇게 되뇌이면서도 둘째 날까지 스트레스 제어가 안돼서 속을 끓였다. 한편으론 엄마 아빠의 일상 패턴을 바꾸지 않고 알아서 잘 키우겠다 장담했던 내가 입 싹 닫고 말 바꾸며 아이를 부탁해놓곤, 감사한 마음을 잊지 말아야 하는데... 모든게 자꾸 아이 위주로, 내 생각만 하게 되는 것 같아 민망했다.
이틀이 지나자 이상하게 점점 편해졌다. 아이도 이내 적응했다. 집에 도로 가기 전날까지 할머니를 세번 빤히 쳐다보고 간신히 웃어줄 정도로 낯가림은 여전했지만 공간에는 쉽게 익숙해졌다. 우리 집에는 없는 어항이나 화분 같은 것에 눈을 요리조리 굴려가며 유심히 관찰하는 아이를 보면서 어쩐지 긴장이 풀리고, 마음이 놓이기 시작했다.
결혼 후 친정에 일주일 가까이 머문 적이 없었는데, 아이까지 낳고 오니 전에는 눈에 들어오지 않던 게 보인다. 내가 초등학교때부터 그린 유화며 수채화며 데생이 액자로 방마다 걸려 있다. 내 신혼여행 사진은 왜 벽에 붙어 있는지. 거기에 엄마 아빠 침대 매트 커버는 내가 신혼집에서 쓰다가 질려버린 커튼 천, 동생 방 커튼은 언제 내다 버렸는지 언제 주워갔는지 모를 내 오래된 스카프들이었다. 엄마의 검소함 속에 나에 대한 사랑과 관심이 있었다.
이 곳에 내 아이를 맡긴다. 여기서 아이를 키운다. 딸과 손녀를 사랑하는 할머니 손과 품에서, 아이가 넘치는 사랑과 기쁨으로 자랄 것이라 생각하니 마음이 벅찼다. 아이에게 "엄마를 사랑하는 엄마의 엄마가 너를 정말 잘 돌봐주실거야. 그러니 진짜 안심해도 돼."라고 속삭였다. 내가 나의 외할머니와 그랬던 것처럼 내 아이가 우리 엄마와 가장 친한 친구가 됐으면 좋겠다. 내가 샘날 정도로. 우리 할머니는 나의 연애 상담까지 해주던 멋쟁이였는데! 우리 엄마는 분명 더 잘할 거야!
+ 지난 주에 여기까지 쓰고 저장만 해둔 채 시간이 지났다. 내일은 남편과 단둘이 오래 전 계획했던 여행을 간다. 아이를 낳은 뒤 한번도 떨어진 적 없었는데 처음으로 떼놓는 밤이다. 나를 찾으며 무자비하게 울게 분명한 아이도 아른거리지만 울 엄마도 걱정이다. 이현아, 우리 엄마를 잘 부탁해 ㅠㅠ!
엄마에게 건넨 아이 사용설명서(?)
도움 되라고 몇 자 적는다는게 이래라 저래라 한건 아닌지.. 조금 찔린다; 사실은 이런 매뉴얼 필요없이 할머니의 감각으로 다 할거라 믿어 의심치 않아요 엄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