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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itelmen Mar 31. 2017

거기 사람이 있어요

처음 시체를 보았던 일을 잊지 못한다. 기자가 되기 위해 받았던 언론재단 연수 과정에는 국립과학수사원 견학이 있었다. '1시간가량 시체 해부를 참관한 뒤 국과수 앞 내장탕 집에서 점심 식사를 한다'가 전통적인 코스였다. 나는 전문지 기자로 '사쓰마와리(수습 시절 경찰서에서 각종 사건사고를 챙기고 훈련받는 것을 칭하는 은어)'를 돌지 않았지만, 대개의 기자들은 사회부에 먼저 투입된다. 국과수는 시체를 보는 일에 익숙해져야 하는 초년병 기자들의 심신단련을 위한 예행연습 스케줄이라 할 수 있다.


처음 시체가 들것에 실려 왔을 때는 무덤덤했다. 흰 천을 걷어내자 눈을 뜬 시신이 누워 있었지만, 참관실 모니터로 보기엔 오히려 마네킹 같다는 생각에 크게 섬뜩하진 않았다. 둘러싼 법의관들이 빠르게 배를 열어 장기를 부검했다. 사인은 심근경색이었다. 원한에 의한 살인사건 등 좀 더 극적인 뭔가를 기대했던, 당시 철없이 혈기만 가득했던 나로선 시시한 결말이었다. 꺼냈던 장기들을 다시 넣고 봉합되는 과정까지 오래 걸리지 않았는데도 상상했던 것보다 지루하단 생각마저 들었다. 하지만 다음 들것이 들어왔을 때에는 눈을 가릴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너무 작은 생명이었다. 이미 죽었기에 사실은 생명이라고 할 수 없는 것이었지만, 세상에 태어난 지 얼마 되지도 않았을 그 존재에 대해 다른 표현을 찾기는 힘들다. 사산아라고 했다. 원인을 알고 책임을 묻기 위해 아기를 부검장으로 보낼 수밖에 없었을 부모의 심정은 어땠을까, 지금 다시 곱씹어 보지만 그 당시엔 그것을 헤아리기엔 너무 어렸고 그냥 두 뼘 남짓밖에 되지 않아 보이는 그 가냘픔이 끔찍했다. 그럼에도 그뿐이었다. 나는 그날 부속물이 가득 든 내장탕을 싹싹 비울 정도로 비위가 좋았다.


처음으로 시체를 해부할 때 묘한 기분이 들 것 같지만, 기이하게도 모든 것이 평소와 다를 바 없게 느껴진다. 밝게 켜진 전등과 스테인리스강 수술대, 그리고 나비넥타이를 맨 교수들이 근엄한 분위기를 만들어낸다. 하지만 목덜미부터 허리의 잘록한 부분까지 처음으로 절단하는 순간은 절대로 잊을 수 없다. 메스는 아주 날카로워서 피부를 자른다기보다는 지퍼를 여는 느낌이 든다. 피부가 열리고 그 아래에 숨겨진 금단의 힘줄이 드러나면, 단단한 각오가 무색하게도 불시에 무안함과 흥분을 느끼게 된다. 의대생의 통과 의례인 시체 해부는 지극히 신성한 영역을 침범하는 작업이기도 해서, 혐오감, 흥분, 욕지기, 좌절감, 경외감 등 무수한 감정을 자아낸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단조로운 수업 과정의 하나가 된다. 연민과 무감각 사이에서 그때그때 감정이 교차한다. 해부실의 상황은 사회의 가장 근본적인 금기를 깨는데, 해부 도중 포름알데히드가 식욕을 강하게 자극해 부리또가 간절히 먹고 싶어 지기도 한다. (중략) 해부실에서 우리는 시체를 하나의 사물로 대상화하여, 문자 그대로 장기, 조직, 신경, 근육으로만 바라보았다. 실습 첫날, 나는 시체에서 드러나는 인간성을 부정하지 못했다. 하지만 사지의 피부를 벗겨내고, 작업을 방해하는 근육을 가르고, 폐를 꺼내고, 심장을 잘라서 열고, 간엽을 제거하고 나면 이런 조직 더미를 인간으로 인식하기가 힘들었다. 결국 시체 해부는 신성 모독이라기보다는 해피 아워에 술 마시러 가는 것을 방해하는 일이 되어버리고, 이런 깨달음은 우리를 불편하게 만든다. 어쩌다 한 번씩 반성의 순간이 찾아오면 우리는 마음속으로 시체들에게 사과했다. 죄의식을 느껴서가 아니라 느끼지 못했다는 사실 때문에. <폴 칼라니티|숨결이 바람 될 때 72p>


그 이후 함께 기자가 된 다른 친구들로부터 '시체 무용담'은 지겹게 들었다. 누군가는 부패한 익사체의 비린내를 설명했고, 다른 누군가는 십자가에 못 박혀 숨진 채 발견된 시신에서 욕지기를 느꼈던 일을 이야기했다. 그야말로 어떤 감정이 아닌 경험이었다. 말하는 이도 듣는 이도 별다른 연민은 없었다. 수많은 사건사고 뉴스 중 하나, 아니 뉴스거리도 되지 않는 무수한 죽음들이 있었다. 그렇게 무감각해졌다.


내가 시신을 다시 마주한 것은 외할머니 장례 때였다. 할머니는 곱게 화장을 한 채 평온한 얼굴로 누워 있었다. 아무도 시신 곁에 다가가지 않았지만 나는 입관 직전 그 얼굴을 어루만지며 작별 인사를 건넸다. 할머니의 육신은 그때 부검실에서 본 그 시신과는 당연히 달랐다. 차갑게 식은 몸에서 온기를 느꼈다. 사랑하는 마음이 불러온 감정이었다. 죽음을 받아들이는 일과 별개로 할머니의 시신 앞에서 죽음을 대상화하는 것은 무의미했다.


훈련에 임할 때는 눈앞의 시체를 반대로 생각한다. 마네킹은 진짜 사람으로, 진짜 사람은 가짜로. 하지만 첫날엔 도저히 그럴 수 없다. 푸른 기를 살짝 띤 채 부풀어 오른 내 첫 시체를 보았을 때, 그는 확실히 죽어 있었지만 또한 완전한 인간이기도 했다. (중략) 얼굴을 천으로 덮어놓고 이름도 모른 채 해부 실습을 했지만, 그래도 시신에게서 인간성이 갑자기 느껴질 때가 있다. 내가 맡은 시체의 위를 절개하여 열었다가 채 소화되지 않은 모르핀 알약 두 정을 발견한 적이 있다. 생전에 그는 홀로 고통스럽게 죽어가며 약병의 뚜껑을 더듬어 이 약을 꺼냈을 것이다. <폴 칼라니티|숨결이 바람 될 때 70p>


이토록 보고 싶은, 찾고 싶은, 확인하고자 하는 죽음이 있는가. 마침내 세월호가 떠올랐고, 마지막 항해를 시작했다. 뭍으로 가면 미수습자 9명부터 찾아야 한다. 몇몇은, 아니 어쩌면 모두 다 가족의 품으로 돌아올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그 가정을 누구도 함부로 입 밖으로 내지 않고 있는 것은, 기필코 시신을 찾아야 한다는 당위가 우리 모두에게 있기 때문이다. 만일 찾게 되더라도 삼 년 넘게 수장되어 있던 몸의 형체는 이미 온전치 못할 것이다. 국과수에서 누구 하나 선뜻 부검에 자원하고 있지 않는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 슬펐지만 한편으로는 그들이 아직 찾지 못한 시신들에게서 내가 느꼈던 온기와 인간성을 기대하고 두려운 것 아닌가 하는 마음에 다행스럽기도 했다. 세월호 미수습자는 사건이 아닌 사람이라는 사실, 절대 잊어서는 안 되는 진실 앞에서, 우리 모두 괴롭지만 목격해야 하는 것이다. 그들이 마지막까지 어떻게 몸부림쳤는지를. 얼마나 가족을 그리워하며 살고자 했는지를. 2017.0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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