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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itelmen Jan 11. 2018

남편의 취향

화장실 수건을 바꿨다. 오래 써서 헤진 것도 많고 너무 뻣뻣해졌길래 10장 묶음으로 질 좋은 타월을 새로 주문했다. 비싸고 향 좋은 세제를 넣고 세탁기에 탈탈 돌린 뒤 서랍장 한가득 줄세워 채워놓고 뿌듯했다. 그런데 남편이 계속 전에 쓰던 것을 꺼내 수건대에 걸어 놓는 것 아닌가. 이게 웬 궁상인가 싶어 물었더니 자기는 부드러운 수건보다 거친 느낌의 수건이 더 좋다는 것이다. 결혼 5년 만에 처음 알게 된 남편의 수건 취향에 적잖게 당황했다.

주변 환경의 어지러움에는 굉장히 관대해 설거지거리나 빨랫감이 쌓여 있어도 손 하나 까딱하지 않는 나는 그래도 집에 들어와선 곧바로 얼굴부터 씻고 잠옷으로 갈아 입는다. 반면 남편은 조금이라도 물건 배열이 흐트러진 것을 못견디고 쉴새없이 정리하며 위생이나 밀봉, 냉장 정신이 투철하지만 정작 자기 얼굴을 씻는데는 "오분만" "십분만"을 읊조리며 바닥에 납작하게 몸을 붙이고 일어날 줄을 모른다. (그렇다고 내가 더 깨끗하다는 얘긴 아니다)

요즘은 '언택트'가 대세라지만, '커넥티드'가 직업적으로 필수인 우리 둘은 집에 와서도 휴대폰과 컴퓨터를 끼고 사는데, 기기가 꺼질 것을 염려하며 늘 '완충' 상태인 남편과 달리 나는 배터리가 20% 미만임에도 태평하게 인스타와 페북과 네이버를 가로 지른다. 우리는 이렇게 다르다.

지인 중 누군가는 두루마리 휴지걸이에 화장지를 끝자락, 그러니까 손으로 잡는 부분이 덮개가 있는 쪽(앞)으로 나오게끔 하느냐 혹은 벽쪽(뒤)으로 두느냐를 두고 신혼 초에 그렇게 피터지게 싸우고도 해결을 못봤다고 했다. 그들은 현재 욕실이 2개인 집으로 이사를 갔다.(놀랍게도 화장실 휴지와 관련한 담론은 꽤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주는 것 같다. 참고 : 두루마리 화장지 어느 방향으로 거는 것이 좋을까?)


결혼생활이 이런 것이다. 핏이 꼭 맞는 듯, 모든 걸 다 알고 있는 것 같다가도 어느 순간 갑자기 나사 하나가 탁 풀린 듯 아다리가 안맞으면서 실없어지고 느슨해지기도 하는 것. 서로가 서로를 완벽하게 알 수가 없다.

나의 결혼생활은 만 4년이 훌쩍 넘었는데, 요 근래에 이런 생각을 더 자주 한다. 남편이 내 기분을 적당히 눈치껏 요령껏 맞춰주길 바라고, 또 당장 필요한 일들을 알아서 해주는 편이긴 하지만, 그럼에도 저 사람은 나를 100% 이해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내가 아니니까. 그래서 나는 내가 지금 느끼고 있는 기분이나 처해 있는 상황 등을 남편에게 최대한 자세히 설명하려고 한다. 특히 아이를 낳고 나서는 더 그렇다.

마찬가지로 나도 상대방을 과신해선 안된다고 마음 먹는다. 연애까지 치면 남편과는 햇수로만 10년째라 다 안다고 여겼다. 그래서 어쩌다 간혹 이해하기 어려운 남편의 행동이나 말에 배신감을 느끼고, 찌질하고 속 좁은 모습에 치를 떨었다. 남들은 모르는 남편의 흠을 꼬투리 잡아 즐기기도 한 것 같다. 이제 (새해부터는) 그러지 않기로 했다. 애초에 그럴 필요가 없는 일이었다. 진짜 '뭘 좀 아는 오빠' 같아서 좋아했던 때가 있는데 "넌 이것도 못하냐" "왜 아직도 안하고 있냐"고 소리치면서 깨달았다. 나는 그를 모른다.

부부는 일심동체? 개뿔. 
결혼생활은 하나의 원을 둘이 함께 그리는게 아니라 찌그러진 원을 각자 올곧게 그려나가는 과정이라고, 그 말이 꼭 맞다. 친한 선배는 "남편과 소울메이트에서 러닝메이트로 바뀐지 오래"라는 푸념을 했는데, 선배와 나 모두 실없이 웃었지만 잘 알고 있다. 그게 싫거나 나쁜 것이 아니다. 부부의 사랑은 다양한 모습으로 유효하게 존재한다. 삶은 길고, 결혼은 계속 적응이 필요하다. 어쩌면 끊임없이
 사랑을 다시 결심하는 일일 지도 모른다. 


모난 원 두개. 각자 그런 모습으로 서로를 아끼면서 함께 맞닥뜨리는 모든 불확실성을 이겨내야 한다.

다만 이런 우리 둘 사이를 너무나 명료하게 이어주는 존재가 생겼으니 ... 바로 딸아이다. 요즘 아이는 눈앞에서 남편과 내가 입을 맞추면 샐쭉 웃으며 화답하듯 자기 이마를 내어준다. 그냥 동작만 머리를 떨구는 것이 아니라 꼭 아빠에게 한번, 엄마에게 한번씩 제 이마를 빼꼼 갖다대는 것이다. 이게 정확히 어떤 의미인지, 아이가 어떤 생각인지를, 진지하게 남편과 해석하려 애쓰지 않지만 그냥 그 자체의 모든 콘텍스트가 부부인 우리 둘을 더 단단하게 만들어준다고 느낀다. (자식 때문에 산다는 말의 진짜 함의는 알 것도 같다)



어쨌든 다시 남편, 우리 
부부 둘의 이야기로 돌아와서... 아이 없는 삶을 그렸던 내가 아이를 만나고 세상에 더없는, 말로 설명하기 힘든 유일의 사랑을 배울 수 있게 하고 그래서 나를 인간답게 살 수 있도록 해준 것은 결국 남편이다. 보통 어른이 됐다는 표현을 쓰던데 아이를 낳고 나서야 나는 비로소 인간이 된 것 같다.


나에 대한 실존적 고민을 이토록 치열하게 해본 적은 없었다. 이처럼 이기적 태도를 잃지 않으려는 이타적인 삶이라니! 아이가 엄마인 나를 키운다고 전에 썼지만, 내 인생의 첫번째 스승은 부모, 평생 스승은 남편이다. 나도 남편에게 그런 존재가 되고 싶다고 생각한다. 아래는 서른 여섯에 숨을 거둔 신경외과 레지던트 폴 칼라니티의 아내가 적은 폴의 유작 추천사다. 남편을 바라보는 시선에서 인격이 느껴진다. 나 역시 이런 아내가 돼야겠다고 다짐한다. 성실하게 남편을 관찰하고 묵묵히 지원하면서 따뜻하게 대해줘야지 뭐 이런.

폴은 암 진단을 받은 날 소리내어 울었다. 그는 우리가 욕실 거울에 걸어둔 그림을 보면서 울었다. 그 그림에는 '내게 남은 모든 날을 이곳에서 당신과 함께 보내고 싶어'라고 적혀 있었다. 그는 수술실에서 보낸 마지막 날에도 울었다. 폴은 자신의 약한 모습을 솔직하게 보여줬고, 그럼으로써 스스로를 위로했다. 불치병에 걸렸어도 폴은 온전히 살아 있었다. 육체적으로 무너지고 있었음에도, 활기차고 솔직하고 희망에 가득 차 있었다. 그가 희망한 것은 가능성 없는 완치가 아니라, 목적과 의미로 가득한 날들이었다. (중략) 이 책에서 폴은 의자이기도 하고 하고 환자이기도 하며, 의사 겸 환자 관계 속에 놓여 있기도 하다. 그는 한정된 시간 속에서 부단히 노력하는 사람만이 가진 명료한 목소리로 말하지만, 다른 자아들도 존재했다. 아쉽게도 이 책에는 폴의 유머감각(그는 정말 재미있는 사람이다), 상냥함, 다정함, 그가 가족이나 친구와의 관계를 얼마나 소중히 여겼는지가 온전히 담겨 있지는 않다. 그래도 이 것은 폴이 직접 쓴 책이다. 그 시기에 그가 낸 목소리이며, 그가 전하고자 한 메시지이다. 이것이 바로 그가 쓰려고 했던 글이다. 내게 가장 그리운 폴은 연애하기 시작했을 때의 팔팔하고 눈부셨던 그 남자가 아니다. 뭔가에 집중하는 아름다운 남자였던 투병 말기의 폴, 이 책을 쓴 폴, 병약하지만 결코 나약하지 않았던 그 남자가 그립다. <폴 칼라니티|숨결이 바람 될 때 258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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