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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있을재수 Apr 15. 2023

어린 왕자의 '카사노바'란 페르소나

부러 묻지 않음이, 나름의 정다움이었단 걸 알고 있을까


2023.04.02 일요일 : 절뚝거리는 산책, 문제없어!


어제 돌아오는 길부터 왼쪽 발목, 발등하고 오른쪽 발가락이 아파서 파스와 발목 보호대를 사 왔는데 오늘 차고 나오니 걸을 만하다. 아프다고 드러누웠으면 속상할 만한 날씨로 상쾌하고 좋다.

이제 꽤 제법 잘 걷는다. 물론 쉬는 횟수는 많아서 운동이 될까 싶다만.


산책하는 루트가 정해졌다. 다리 위에서 한번, 세종대왕 앞에서 한 번 그리고 어린 왕자 앞에서 한번 한강에서 한번 이런 식으로 루트를 만들었다. 공원에 봄맞이 컨셉인지 모르겠지만 곳곳에 여우와 어린 왕자가 있다. 물 마시며 어린 왕자를 보고 있자니 또 단번에 떠오르는 사람이 있었다.


그늘에서 나뭇잎이 흔들리며 내는 사각 소리로 어느새 시공간을 초월하듯 그곳으로 갔다.






어린 왕자란 별명을 가진 유치원 동기생이 있다. 이 친구는 생긴 거답게 별명이 지어진 케이스로 정말 똘망똘망해서 어린 왕자 같은 외모를 지니고 있었고 성격도 조용하고 다정다감했다. 이 친구와는 초등학교, 중학교는 달라 고등학생 때 학원에서 다시 만나게 되었다.


여전히 이 친구의 별명은 어린 왕자다. 우리는 학원 끝나거나 학원 가기 전이거나 아니면 이런 날, 술 먹고 들어와 죽이겠다며 칼 갖고 뛰어든 아빠를 피해 나온 날이라든지 언니와 동생의 합동 괴롭힘이라든지 그녀의 외면이라든지 집 대문을 열고 들어가기 힘든 그런 날들에


우리는 동네 그네에 나란히 앉아 아무 말이 없었다. 1시간이고 2시간이고 나의 얼굴이 이내 무표정으로 돌아왔을 때 ‘이제 갈까?’라고 살며시 물어볼 뿐이다. '이제 좀 기분이 나아졌어'란 질문 대신에 ‘이제 갈까‘ 말하는 어린 왕자의 마음을 모르지 않았다. 궁금할 법도 한데 한 번을 묻지 않고 그저 옆에 존재했다.



그 침묵 속, 홀로 지내면서 본인인지 때론 타인인지 혹은 신인지 모를 대상과 마주하는 시간이 많았다. 대부분은 물음이었고 어쩌다 답을 하는, 그러다 침묵을 통해 시간과 공간의 영원을 보기도 했던 날들이었다.





시간은 흐르고 대학생이 된 어린 왕자(이하K)는 느닷없이 ' 00동 카사노바'로 명성을 떨치고 있었고 친구도 없는 나한테까지 소식은 들려왔다. 한 번은 그 K의 대학생 친구들이 모인 곳에 우연히 합류하게 되었는데 K에 여자사람 친구가 있을 리 없다며 몇 시간을 그 주제로 시답지 않게 떠들어 댔다. 사람은 가려 사귀어야 함이다. K의 대학생 친구들은 K에 대해 잘 모르는 것 같다. K는 정말 카사노바가 아닌 그 친구의 페르소나임을 알고 있다. 나의 무표정처럼.



무엇 때문에 그런 가면을 선택해서 쓰고 있는지를 부러 묻지 않았지만, 마음으로 알고 있다.

아! K가 만난 여자친구들을 대부분 아는데 아는 것만 한 트럭은 되었으니 카사노바가 맞나? 그렇지만 항상 여자친구들에게 당하고 오는 K의 속 사정을 적어도 아파트 놀이터 그네와 나는 알고 있었다.




성인이 되어서도 여전히 아파트 놀이터에 나란히 앉았다. 아무 말도 없이. 오랜 시간을. 예를 들어 이런 날, 안 쓰고 안 입고 안 먹고 대학 학비를 모았는데 그 돈이 동생 학비로 쓰였다거나 언니의 폭력으로 얼굴부터 목까지 피투성이라든지 카페에서 아르바이트하는 걸 아빠가 다방 레지라고 밥상을 엎은 날이라든지, 30대의 방향성을 정한 그런 날에 그 시간을 아무 말 없이 공유했다. (아빠 직업: 대기업 임원)


세상 적막한 그 공간에서 세상 시끄러웠던 마음이 공존했던 그날들은 K의 다정함에, 따뜻함에 고요로 울 수 있었고 이 시간들이 반짝반짝 빛나 위로가 되곤 했다.


나와 K의 인연이 계속되던 어느 날 35세가 돼도 각자 결혼을 못 하면 우리끼리 하자는 약속했고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도록 매우 열심히 각자 연애했다. 그러나 35세에도 둘 다 결혼하지 않았고 시간을 늘려 40세로 정정했지만 그사이 인연은 끊어졌다.




K는 어려움이 있을 때 시시콜콜 물어봐 주지 않고 그 오랜 시간을 묵묵히 그저 옆에 있었다. 만약 K가 조금이라도 물어왔더라면 난 말하지 않고 도망쳤을 것이다. 아마 K는 그걸 알고 있었던 것 같다.


긴 시간을 그저 말없이 지켜봐 줄 수 있다는 건 대체 어떤 마음이고 어떻게 하면 가능할까.


만약 주변에 그런 사람 한 사람이라도 있으면 눈이 마주쳤을 때 환하게 웃어주길 바란다. 아마도 역경 속에서 버틸 수 있게 지켜봐 주고 있는 천사일지도 모르니.


그리고 소중했지만, 끊어진 인연이 있는가? 혹여나 미래에는 사라질 인연일지언정 지금의 인연들에 말없이 그 사람 그대로를 지켜봐 주는 것도 다정다감한 따스함 아닐까. 따뜻한 시선, 다정다감한 눈빛으로 예쁘게 바라봐야 잘 보이고 찬찬히 봐야 정확하게 보인다는데 그럼 개안도 되지 않을까?





이렇게 고마운 사람들이 많은데 한 번을 고맙다는 표현을 제대로 하지 못한 거 같아서 마음이 이내 무거워졌다. 그러다 어린 왕자 모형을 봤는데 괜찮다는 듯 웃고 있었다.


" J야, 공기가 맑고 자원도 풍부한 거대한 대륙이면서 그 안에 작고 견고한 성이 존재하는데 그게 너야 "


대부분 말이 없었는데 어느 날에 K의 위로였다.  30대의 방향성을 정한 그런 날, 언제쯤. 


역시 K와의 인연 또한 하늘이 내린 천사인 듯하다. 암흑 같은 시기를 견뎌내라는. 버텨보라는. 하늘 나름의 다정함이었을 테지. 그리고 그에 비해 한없이 작은, 코딱지만 한 정다움을 K에 주고 있었다.


선하고 친절하고 다정하게 따뜻한 K의 안부를 물어보며 되돌아오는 길은 많이 길었다.

붙이지 않을 편지를 전하는 것처럼,









어린 왕자 I miss yo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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