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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주연 Jul 26. 2017

삶이 한 편의 소설이라면

영화 <최악의 하루> (2016)

1. "여주인공 왜 저렇게 멍청해. 답답해" 극장을 나오면서 했던 말이다. 여주인공인 은희의 남자관계는 엉망이다. 현 남자친구는 은희에게 "네가 꼬리 치고 다니니까","넌 입만 열면 거짓말이니" 라는 폭언을 아무렇지 않게 일삼고 허세로 가득찼으며 (자기도 알고 있듯)병신같다. 또 다른 남자는 유부남. 아내가 있는 걸 속이고 만나다가 이혼한다고 잠적해놓고선 재결합한단다. 두 사람에 대한 은희의 태도는 단호하지 못하다. 둘 사이를 왔다갔다하며 끝내지 못한다. 마치 내려가지도 올라가지도 못하는 남산둘레길같다. 그러나 우리는 알고 있다. 은희의 애매모호함을 욕하는 우리 역시 삶의 많은 순간에서 잘못된 선택을 하고 그때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다는 것을. 


2. 영화는 소설가의 내레이션으로 시작한다. "여행지에서는 자주 꿈을 꾼다. 곤경에 처한 한 여자의 이야기가 떠올랐다."

3. 이 영화는 두가지 관점으로 볼 수 있다. 소설가와 은희, 주인공들이 보내는 각각의 하루, 혹은 영화 속에 소설 이야기가 들어 있는 액자식 구성이다. 

4. 웃고 욕하면서 영화를 재밌게 보고 나면 석연치 않은 부분이 남는다. 중간에 등장한 잡지 기자의 정체는 뭐지? 갑자기 겨울 옷을 입고 등장하는 엔딩은 뭐라고 해석하지?

대환장파티 씬


5. 이 영화를 액자식 구성, 영화 속에서 소설이 쓰여지는거라고 생각을 한다면 의문이 풀린다. 홀연히 사라지는 잡지 기자는 작가가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지기 위해 만들어낸 인물이다. 잡지 기자는 소설가에게 묻는다.

"소설 속 주인공들을 곤경에 처해놓게 하고 왜 꺼내주지 않죠. 주인공이 저같았어요. 벼랑끝에 있는 것처럼 비참했어요. 주인공들은 욕망으로 들끓어요. 본인은 욕망으로 들끓는 사람인가요? 주인공들에게 얼마만큼의 애정이 있나요? 주인공들을 정말 잘 안다고 생각하나요?"

6.엔딩은 소설가가 부딪힌 벽, 소설 속이자 영화의 주인공 은희가 부딪힌 벽을 어떻게 해결해나가는지 보여준다. 최악의 하루를 보낸 은희와 소설가는 남산에서 다시 만난다. 은희는 지칠대로 지쳐있다. 살고 있는 게 연극이라며, 그러나 거짓말을 하는 그 순간에는 진짜라며 읊조린다. 그때 은희는 소설가에게 제안한다. "저 너머로 가볼래요?" 이제까지 내려가지도 올라가지도 못하던 길을 벗어나 처음으로 그 너머로 가보자고 소설 속 주인공이 소설가에게 먼저 말을 걸어오는 것이다. 

그때부터 아름다운 장면이 이어진다. 은희는 영어로 거짓말하는 것도 쉽지 않다며 쑥스럽게 웃는다. 소설가는 일본어로 시를 읊어주며 은희는 춤으로 답한다. 소설가는 처음으로 소설 주인공들에게 해피엔딩을 선물하고 싶다고 말한다. 이어지는 신에서는 갑자기 눈이 내리고 은희가 무표정하게 걸어온다. 혼자서. 


7. 영화 내적인 서사도 아름답지만 영화속 이야기와 소설가를 삶과 절대자에 대한 거대한 은유라고 바라본다면 이 영화가 더욱 아름답게 느껴진다. 삶이 한 편의 소설이라면, 이 소설을 써내려가는 존재가 있다면 그 역시 소설가와 같은 고민을 겪고 있지 않을까. 

소설의 주인공, 삶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는 종종 진퇴양난의 상황에 처한다. 절대자는 꺼내줄 생각이 별로 없어보인다. 그때 우리가 똑똑, 계속 절대자/우주에게 말을 걸고 노크를 하는 것이다. 저 너머로 가보자고. 음악이 들려오면 춤을 추면서 가면을 내려놓고 무방비 상태가 되기도 하고. 그리고 어떻게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계절의 끝, 하루의 끝인 겨울밤에 해피엔딩을 선물받는다. 이 엔딩은 논리적 결말이라기보다 감독의 희망으로 읽힌다. 

8. 각 인물에 대한 감독의 태도도 마음에 들었다. 주인공 뿐만 아니라 시종일관 무례하지만 이혼으로 출판사를 정리한다는 나름의 사정을 지닌 출판사 사장까지 어느 하나 미워할 수 없다. 누군가는 이 영화를 냉소라 해석했지만 나에겐 애정이 가득 담겨있어보였다. 이동진의 말마따나 김종관 감독은 '인간의 명멸하는 순간에 모든 것을 담아내는 세밀함'을 가졌다. 인간과 삶에 대한 애정이 가득 담긴 시선 덕에 엉망인 하루를 보내고선 괜찮아질거라 주문을 걸듯 앞으로 종종 남산 혹은 이 영화를 찾을 것 같다.


적어두고픈 명대사

긴 긴 하루였어요. 하나님이 제 인생을 망치려고 작정한 날이에요. 안그러면 어떻게 이런일이 일어나겠어요. 그쪽이 저한테 뭘 원하시는지는 모르겠지만, 저는 원하는걸 드릴 수도 있지만... 그게 진짜는 아닐거에요. 진짜라는게 뭘까요? 나는 사실 다 솔직했는걸요.
-커피 한 잔 드시겠어요? 커피 좋아해요? 난 커피를 좋아해요. 진하게... 진한 각성... 정신 똑바로차려야하거든요. 당신들을 믿게하기 위해서는.

요즘 살고 있는 게 연극이에요. 오늘도...
-오늘?
-네. 지금까지...
-거짓말이요?
-네 거짓말. 근데 연극이란게 할 때는 진짜에요. 끝나면 가짜고...
-좋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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