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여진 마음은 휘발되지 않고 흘러들어간다
여행이 끝나고 기억에 오래 남아 있던 것은 인생샷도, 기념품도 아닌 선량한 마음이었다. 모든 여행에서 나는 타인의 선의에 빚지며 여행을 했다. 특히 일본을 여행할 때는 대가 없는 마음을 지나칠 정도로 많이 받아서 ‘미안합니다. 감사합니다’라는 말을 인사처럼 달고 다녔다. 에어비앤비 주인의 손편지, 말이 안 통해 지나가는 사람까지 붙잡고 길을 알려주던 중학생들, 혼자 여행 온 내가 마음이 쓰였는지 하루 종일 이곳저곳 데려가주던 게스트하우스 사장님. 일본 사람들의 친절은 익히 들어왔지만 실제로 겪어보니 더 큰 감동이었고 꽤 오랫동안 좋은 기억으로 남아있다.
오키나와의 자마미라는 작은 섬에 간지 3일째의 일이었다. 때는 마침 일본의 골든 위크라 게스트하우스는 매일 새로운 사람들이 들어오고 또 그만큼의 사람들이 떠나갔다. 3일간 내내 함께 다니던 다섯 중 히로짱이 먼저 요코하마로 돌아가게 됐다. 배 시간이 다가오자 게스트하우스에 묵던 사람들 모두 항구로 배웅을 나갔다. 나는 히로짱과 말 몇마디 나누지 않았지만 다들 가길래 얼결에 따라 가게 됐다.
출발 20분 전, 배에 오르는 히로짱과 연락처 교환을 하고 악수를 했다. 그러고도 출발까진 10분이 남아서 히로짱은 2층 배 난간에서, 우리는 항구에서 서로를 멀뚱멀뚱 바라보고 있었다. ‘인사를 마쳤으니 이제 돌아갈까’하며 뒤돌았는데 게스트하우스 사람들은 허공을 봤다가 서로를 보며 웃긴 표정을 짓기도 했다가 하며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무언가를 기다리는 것 같았다. ‘대체 왜 안 가고 있는 거지?’ 나는 그 시간이 너무 어색해서 속으로 제발 빨리 배가 출발하기만을 빌었다.
마침내(!) 선원들이 배를 묶은 밧줄을 풀었다. 배가 떠날 시간이었다. 배가 항구에서 천천히 멀어짐과 동시에 배에 탄 사람들, 항구에 있는 사람들 모두 머리 위로 크게 손을 젓기 시작했다. 그것도 팔이 아프도록 아주 정성스럽게. 나는 팔이 아파와 슬쩍 주변을 둘러봤는데, 다들 아직도 열심히 손을 흔들고 있었다. 배는 이미 항구를 빠져나가 작은 점이 되어 있었다. 그 내젓는 팔들을 바라보고 있자니 왈칵 눈물이 났다.
배에 탄 사람이나 항구에 있던 사람들이 이미 자리로 돌아갔을지도 모를 일일 텐데도, 수신인이 없는 인사는 한동안 계속되었다. 그날 이후, 매일매일 많으면 하루에 네 번도 항구에 배웅을 나갔다. 그때마다 같은 장면을 보았고 어김없이 가슴 어딘가가 찌르르해졌다. 오랫동안 서로에게 손을 흔드는 틈에 흐르는 마음을 보았기 때문일 것이라 생각한다. 떠나는 이가 진정으로 ‘안녕’했으면 좋겠다는 마음, 혹은 말로 다 전하지 못한 고마움과 미안함과 반가움 등의 진심들. 그러니까 마지막으로, 오랫동안 인사하며 서로에게 마음을 쓰고 있었던 것이다.
마음을 쓰다. ‘작은 일에 마음을 쓰다, 그 사람에게 자꾸 마음이 쓰인다.’ 사전적 의미로는 ‘신경을 써서 깊이 생각하거나 걱정하다‘라는 의미다. 영어로는 care about, 일본어엔 ‘상대방이 되다’라는 뜻이 포함되어 있다. 내 마음을 사용하여 잠시나마 상대방의 입장이 되고 또 타인의 마음을 움직인다. 무엇인가를 ‘쓰는 일’ 중에서 가장 따뜻하고 아름다운 단어가 아닐까.
내가 돌아갈 때는 배웅해줄 이들이 얼마 남아있지 않았다. 친하게 지냈던 스텝 몇몇이 역시나 굿바이 인사를 해주었고, 나 역시 그들의 얼굴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손을 흔들었다. 조금 울었던 것 같다. 마음을 진정시키고 있는데 얼마 뒤 배는 다른 항구에 도착해있었다. 아기를 안은 한 젊은 부부가 배에 탔고, (친정 가족으로 추정되는) 얼굴이 까만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항구에 나와 있었다. 배가 멀어지기 시작함과 동시에 항구에 있던 가족, 배에 탄 가족 모두 크게 손을 흔들었다. 그 모습을 보며 또 찌르르해져 눈물을 흘리고 있는데 아이를 안은 엄마와 눈이 마주쳤다. 아이 엄마의 얼굴도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괜히 머쓱해져 안으로 들어오며 모르는 사람들의 인사인데도 역시 그 자체로 아름다운 광경이라는 나름대로의 결론을 내렸다.
마음을 쓰는 일의 좋은 점은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누군가가 나에게 썼던 선량한 마음들은 내 안에 고이 쌓여 다른 사람에게 쓰인다. 난처한 얼굴로 길을 헤매는 외국인을 보면 자꾸 마음이 쓰이는 것이다. 내가 똑같이 길을 헤맬 때 받았던 그 마음이 떠올랐기 때문에. 마찬가지로 누군가를 배웅할 때 나는 힘껏, 오래도록 손을 흔드는 습관이 생겼다. 내가 그에게 쓴 마음은 전해져 또 누군가에게 흘러들어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