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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주연 Jun 05. 2021

햄버거 작전 훈련법을 아세요?

인생의 오르막과 정상, 내리막까지도 나란히 걸어가면 좋겠다

‘햄버거 작전’이라는 등산 훈련법이 있다. 다수가 등산을 간 상황에서 뒤로 처지는 사람이 생길 때 쓰는 방법이다. 제일 속도가 느린 사람들은 햄버거의 속재료 담당. 이들을 중간에 배치하고 가장 체력이 좋고 속도가 빠른 두 사람을 앞뒤로 배치한다. 일명 엄마빵, 아빠빵 들이다. 빵과 속재료의 임무는 떨어지지 않을 것. 간격이 너무 벌어져서도, 중간에 다른 속재료가 끼어 들어서도 안 된다. 사실 햄버거 작전은 실제로 있는 훈련법은 아니다. 다른 사람들이 쓰는 지도 모르겠다  <여좋시 한라산 프로젝트> 훈련 도중 늘 머릿속에 재미난 아이디어가 가득한 세희가 만들어낸 방법이니까.


우리는 남한에서 가장 높은 산인 한라산 대비 훈련을 하는 중이다. 우리,를 가리키는 말은 나와 세희 그리고 예원 셋으로 이루어진 '여좋시'라는 이름의 모임이다.

심장이 세 개, '심세희'라는 별명이 있을 정도로 웬만한 남자들 보다 더 체력이 좋은 김세희는 뒤에서 압박하는 아빠 빵 역할이다. 중간에 낀 사람이 힘들어서 속도가 느려질라 치면 "속 재료 이탈한다! 엄마 빵이랑 거리가 멀어진다!" 쩌렁쩌렁 외치며 발걸음을 빨리 움직일 수 밖에 없도록 만든다. 속 재료는 주로 등산을 시작한 지 약 한 달 차, 야근에 시달려 운동량이 부족한 예원이다. 나는 엄마 빵 담당으로 여좋시 버거가 앞으로 나아가는 속도를 높인다. 절대 아빠 빵의 불호통이 무서워서라든가 부끄러워서가 아니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힐끔힐끔 쳐다본다. 우리를 올림픽 출전하는 육상 선수나 트레일 러닝 대회 준비하는 걸로 알겠지.


전지적 엄마빵 시점


그렇다. 우리는 히말라야도 아니고, 산티아고도 아닌 연간 47만 명이 찾는다는 한라산을 가기 위해 매주 주말마다 등산 훈련을 하고 있다. 9월 첫째 주는 관악산 연주대, 둘째 주는, 광교청계산 연계산행, 셋째 주는 북한산 백운대로, 매주 15km 이상 걷는 코스로 짰다. 왜냐하면 우리가 갈 한라산 코스가 왕복 18km, 소요시간 약 8시간이었기 때문이다.  1박 2일 종주를 가는 것도 아닌데 이렇게 유난을 떨 일인가 싶다가도, 18km 등산이라니… 등산을 시작한 지 1년이 채 안 되는 등린이들에게는 아득한 숫자였다.


'페이스 메이커’란 마라톤에서 기록을 단축시키기 위해 함께 달려주는 사람을 말한다. 체력이 나보다 조금 더 좋은 사람이 좋은 페이스 메이커다. 함께 가는 사람과 페이스를 맞추기 위해 평소보다 빨리 가게 되므로 나의 평균 속도를 높이는 좋은 훈련이 되고, 정상에 도착했을 때 찾아오는 성취감도 달라진다. 혼자서 갈 때와는 달리 중간에 너무 퍼져 버리지도, 무리해서 속도를 높이다가 하산 길에 다리가 풀려 버리는 현상도 막을 수 있다.


내겐 세희가 페이스 메이커였다. 세희는 기본적으로 체력도 좋고 챌린지형 인간이어서 기록을 단축시키는데서 쾌감을 느꼈다. 세희와 등산을 할 때면 황새 쫓아가다가 다리가 찢어지는 뱁새가 된 기분이었지만 다리 근육이 찢어질수록 체력도 등산 속도도 점점 상승했고 등산 후 성취감도 그에 비례했다.


반대로 예원에겐 나와 세희가 페이스 메이커였다. 한 때는 요가 선생님을 꿈꿀 정도로 요가 수련을 사랑하는 요기니였지만 등산에 눈을 뜬 지는 얼마 안 돼서 처음엔 현저히 속도 차이가 났다. 올라갈 땐 살려줘!!하며 궁시렁대다가도 막상 어플에 찍힌 본인의 기록을 보며 신기해하는 모습이 꼭 세희와 등산할 때의 모습과 닮아 있었다.


세희와는 친구가 된 지 벌써 13년, 예원은 7년 째다. 세희는 수상 실적을 채우려고 나갔던 전국 고등학교 토론대회에서 처음 만났다. 간간히 싸이월드 방명록으로 안부를 주고받다가 운명처럼 같은 지역에서 대학생활을 하게 됐다. 둘다 과에 적응을 못해 공강 시간마다 밥을 같이 먹던 것이 수업이 끝나면 술도 같이 먹게 되고 그러다 같이 살게 됐다. 예원은 세희의 두번째 룸 메이트다. 세희의 대학교 동아리 친구로, 두 사람의 집에 놀러 가 밥과 술을 얻어 먹으면서 예원과도 친해졌다. 둘이 살던 집은 연남동 벚꽃길 한 중간에 있었다.(그때는 연남동이 이렇게 핫해지기 전이었다) 봄이 되면 베란다에서 커다란 벚꽃 나무를 보면서 술을 마시다가 이렇게 봄을 보낼 수 없다며, 술집 도장깨기라도 하듯 셋이 뭉쳐 연남동을 쏘다니던 시절이었다. 봄날의 벚꽃처럼 청춘의 절정을 누리던 25살의 여자애 셋이  죽치고 앉아 밤새 술을 마시다 보면 가게 주인들도 우리를 쫓아내진 못하고 문 닫고 같이 술을 마셨고 그렇게 공짜 술도 많이 얻어 먹었다. 그날도 꽁술을 자주 먹던 술집에서 빈 병을 쌓던 중이었다.   


- 나: (술톤으로) 내과~ 푸른밤 팟캐스트를 듣는데 코너 이름이 엄청 좋더라고~ 뭐였드라~ 되게 좋았는뒈~
- 세희: (멀쩡함) 어 이동진 평론가 블로그에서 읽은 것 같아. 무슨 좋은 시절 아니었나?
- 나: (극도의 흥분상태)어!!!!!! 마죠!! 여전히 좋은 시절이다!! 동블리는(이동진 평론가의 애칭이다) 라디오 코너 명도 어쩜 그렇게 멋지게 짓쥐~~ 짱이야~~(TMI지만 나는 이동진 평론가의 오랜 팬이다)
- 예원: (멀쩡함2) 오 여전히 좋은 시절이라니 너무 좋다~ 우리도 여전히 좋은 시절이잖아~
- 나: 그럼 우리 모임 이름으로 하자!! 스물넷도 스물다섯도 서른도 여전히 좋은 시절~~


술이 깨고 나서 알고 보니 라디오 코너 명은 '여전히 재밌는 시절'이었다...그렇지만 술자리에서 풀기 좋은 에피소드로 남겨 두자며 그렇게 우리 모임 이름은 여좋시가 됐다. 어쩌다 매주 만나서 하는 일이 술집 탐방이 아닌 등산이 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인생은 정말 불가해한 일들이 많이 일어난다.




더 불가사의한 일은, 4주간의 전지훈련을 하고 갔던 한라산에서 내가 속 재료였다는 사실이다. 그것도 아주 시들시들해서 심폐 소생이 거의 불가능한 양상추의 상태였다. 연이은 등산으로 근육통이 쌓여서 한 발 한 발 떼는 게 고문이었다. 게다가 욕심을 부려 카메라며 보온병이며 잔뜩 챙긴 배낭이 어깨를 짓눌렀다. 갈 길이 한참 남았는데 힘들어서 멈춰서는 시간이 늘어났다. 아빠 빵, 세희의 특단의 조치.

"예원이랑 주연이랑 자리 바꿔"


엄마 빵으로 승격한 예원이 장난스럽게 “야 이제 속 재료의 마음을 알겠냐?” 툭 던졌는데, 아닌 게 아니라.. 이거 엄청나게 자존심 상하는 일이었구나? 말을 듣지 않는 몸 때문에 화도 나고 나 때문에 모두의 속도가 느려지는 것도 미안했다. 앞뒤로 압박 받던 속 재료의 심정을 이제까지 몰라줘서 죄송합니다.... 몸이 너무 힘드니 말 한 마디에도 예민해졌다. 걸음이 느려질 때마다 뒤에서 세희가 “빨리 안 가면 우리 백록담 못 가” 하며 재촉했다. “나 너무 힘들다고! 백록담 안 가!!!”라고 외치고 주저 앉…는 대신 속으로 1초에 한번씩 욕했다. 그동안 한라산 완등을 꿈꾸며 걸었던 4주를 떠올리며 이를 악물었다.

마음의 소리가 밖에까지 새어나간건지 예원이 짐을 들어 주겠다고 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렇게 자존심을 부릴 일이었나 싶지만, 이상한 오기가 발동해 세 번을 거절했다. 짐이 되었다는 미안함과 내 체력에 대한 배신감, 속재료로 강등되었다는 패배감이 한데 뒤섞여 있었다. 결국은 너무 힘들어서 자존심이고 뭐고 줄 수 있는 짐들은 예원의 가방으로 던져 넣었지만.

이제 와서 할 수 있는 말이지만  세희에게 버럭 화내지 않은 건 두고두고 잘한 일이었다. 세희의 적절한 시간 배분 덕에 정상에 여유있게 도착해 라면과 김밥도 먹고 물 고인 백록담도 질리도록 보았으니까. 내 페이스에 맞춰 올라갔다면 하산 길에 해가 져서 모두가 위험할 뻔 했다.



백록담은 생각보다 큰 감흥이 없었다. 흐린 날이 많아서 백록담을 보지도 못하는 경우가 허다하다는데 날씨 요정의 간택을 받아 구름 한 점 없었고 운 좋게도 며칠 전 비가 내려 백록담엔 물도 고여 있었다. 그토록 외치던 백록담 앞에서 든 생각은 '저게 교과서에서 보던 그거구나' 정도. 내겐 백록담에 왔다는 사실 자체가 중요했다.


1950m, 남한에서 가장 높은 한라산 정상에 왔다. 나의 1년동안 등산 경험의 총체가 1950m 백록담 정상석 앞에 있었다. 무엇보다 내가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친구들과 함께 이곳에 와 있다. 게다가 앓는 소리하는 사람은 나 하나 뿐일 정도로 우리는 체력이 강해졌다. 그래서 정상 칼바람에 금세 식어버렸음에도 육개장 컵라면이 그렇게 달았는지도.



생각해보면 등산 뿐만 아니라 우리는 20대를 보내는 내내 서로의 페이스 메이커였다. 일상을 팽개칠 만큼 연애에 푹 빠졌던 순간도, 그 연애가 시시하게 끝나던 순간도, 끝이 보이지 않던 암울한 취준생(=백수) 시기를 통과할 때도 항상 곁에 서로가 있었다.


인생에서도 친구들의 짐을 나눠 들어줄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인생은 오직 내 힘으로 정상까지 가야 하는 고독한 싸움에 가까웠다. 안타깝지만 서로의 장애물을 치워 주지도, 대신 넘어 주지도 못할 것이다. 다만 누군가 뒤처질 땐 기다려주면서 좋아하는 간식을 내밀 수도 있을 것이다. 넘어갈 엄두가 나지 않는 길 앞에선 시간이 걸리더라도 우회로로 함께 돌아가 줄 수 있을 것이다. 포기하지 않도록 곁에서 응원해 주며 끝까지 달려주는 것, 그것이 페이스 메이커의 최선일 테니까.


우울에 빠져 있던 나에게 매일같이 괜찮냐고 안부를 묻고 전화해 실없는 소리도 하고, 때론 넋두리를 가만히 들어주고 무조건 네 편이라고 말해주었던 것은 역시나 여좋시 친구들이었다.  그렇게 서로의 좋은 페이스 메이커로서 인생의 오르막과 정상, 내리막까지도 나란히 어깨를 맞대고 사이 좋게 걸어갈 수 있다면 좋을 것이다. 막걸리를 세상에서 제일 맛있게 마시면서 등산 후일담을 세상에서 가장 웃기게 푸는 멋진 세 할머니가 될 때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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