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이 지나가는 자리, 더 테이블
꽃이 놓인 테이블에 두 사람이 앉는다. 15분간 이어지는 두 사람의 대화. 영화 <더 테이블>은 네 커플이 테이블 앞에 앉아 대화를 나누는 옴니버스 영화다. 대화는 뜬금없이 시작되고 또 예기치 못한 타이밍에 본론이 나오기 때문에 관찰자로서 긴장의 끈을 놓을 수가 없다. 재미있는 것은 15분 남짓한 대화 속에 두 사람의 관계, 처한 상황, 갈등과 욕망까지 모두 드러난다는 것이다. 삶의 한 단면을 툭 떼어내 전체의 삶을 가늠하는 이 영화는 4커플의 사연이 담긴 단편 소설집을 읽는 것 같다. 그것도 레이먼드 카버의 <대성당>이나 정세랑의 <피프티 피플>같은 아주 다정한 단편 소설.
꽃이 놓인 테이블 앞에 선글라스와 마스크를 낀 여자가 앉는다. 연예인같다.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다. 그리고 정장을 입고 들어오는 남자. 둘은 오랜만에 만난 사이같다. '하나도 안 변했네' '예전엔~' 의 안부 인사를 하는 와중에 두 사람이 과거의 연인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여자는 남자가 자기를 왜 불러냈는지 궁금한 눈치다.
여자는 사람들이 알아보는 연예인이 되었고 남자는 증권회사 회사원이다. 너무나 달라진 일상에서 남자가 찾은 대화 소재는 여자를 둘러싼 찌라시의 진실. 급기야 무례한 질문까지 던지고 만다. 여자의 얼굴엔 실망의 빛이 스치지만 남자는 알아채지 못하고 셀카 인증샷을 찍은 후 동료들까지 카페 근처로 불러낸다. 기가 막혀 자리를 뜨는 여자에게 남자는 아쉽다며 다시 연락하겠다 한다. 아마도 그들은 영영 다시 만날 일은 없을 것이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네?" "우리 올해 처음 만난거잖아요." 여자는 화가 나 있다. 남자와 눈을 못 마주치고 괜히 시비를 건다. 그녀의 말에서 유추하건데, 둘은 두세번 만나고 뜨겁게 불꽃이 튀었던 사이였고, 잠자리도 했던 것 같다. 그 이후 남자는 오랜 여행을 떠났고 연락 한 통 없었던 것 같다. 부글부글 끓는 여자의 속을 대변하듯 여자의 눈을 클로즈업한 카메라도 시종일관 심하게 흔들린다. 겉도는 대화 끝에 여자는 못 참고 자리를 박차고 일어선다.
눈치 없이 농담을 걸던 남자는 그제서야 테이블 너머 손을 뻗어 그녀를 붙잡는다. 그땐 떠날 수 밖에 없었다는 변명과 함께. 당신을 생각하며 산 시계에 매일같이 태엽을 감았다며 두서없이 마구 기념품을 꺼내놓는다. 그제서야 여자는 웃기 시작한다. 확인하고 싶었던 것은 남자의 마음이었던 것. '파스타 만들어줄게요 우리집 갈래요?'하는 남자의 한방에 여자는 흔쾌히 무너진다. 남자의 집으로 향하는 여자의 말투엔 원망과 애교가 함께 섞여 있다. 개인적으로 카메라가 제일 예쁘게 담았다고 생각한 에피소드였다. (그냥 정은채가 예쁜 것일 수도...)
해질녘, 카페 라떼를 시킨 두 사람. 주인공의 이름은 은희(한예리 분).“결혼은 세 번 쯤 했는데 아직 처녀예요“ 라며 결혼식 정보를 기계적으로 읊는 은희는 결혼 사기업체에서 일하는 것 같다. 마주 앉은 아주머니는 은희의 어머니 역할로 섭외된 사람. 죽은 딸과 은희의 결혼 날짜가 같아서 그런지 은희가 딸처럼 느껴진다.
그런데 은희의 얘기를 들을수록 뭔가 이상하다. 남자의 집안이 부자도 아니고 남자 역시 회사원이다. 그런데 왜 이런 식으로 결혼을..? 알고 보니 사장을 꼬시려다 젊은 사원과 눈이 맞았단다. 그러니까 이번에는 사기 결혼이 아닌, 은희의 진짜 결혼인 것. 숙자가 상견례 자리에서 사돈에게 할 말을 연습하는 부분은 이 연극의 클라이막스다. 자신의 딸에게 못 다했던 말을 전하는 듯 눈물 나는 진심을 전하면서도 은희는 ”잘하셨어요“라며 이것이 연기임을 상기시킨다. 연기와 진심이 뒤섞여 있어 무엇이 진짜인지 혼란스러운 자리다. 그런 관객에게 어쩌면 은희는 ‘진짜라는 게 뭘까요? 나는 사실 다 솔직했는걸요”라고 되물을지도.(영화 <최악의 하루> 속 대사)
둘은 헤어진 연인. 여자는 돈 많은 남자와의 결혼을 앞두고 있다. 여자는 결혼 소식을 전하면서도 미련이 남은 것 같다. ‘2년만 내 세컨으로 연애하자’, ‘오늘 잘해줄게 같이 있자’며 전 남친에게 절박한 농담을 던진다. 그러면서 “사람 가는 길과 마음 가는 길이 왜 이렇게 다르냐”며 자조한다. 남자는 단호하게 거절하며 자기는 선택을 한 거라고, 여자에게도 선택을 하라고 말한다. “잘 지내. 다신 연락 안 할거야.”라고 헤어지는 두 사람. 둘이 떠난 자리에 미진하게 머물러 있는 마음이 눈에 보이는 것 같았다.
이 영화의 주인공들, 그러니까 4명의 여자는 단단하지 못하다. 관계에 대한 기대 혹은 삶에 대한 여지를 지닌 채 테이블 앞에 앉는다. 그 앞에서 실망하기도 하고(#1.유진의 에피소드), 기대를 걸어보기도 하고(#2. 경진의 에피소드) 기대를 접기도 한다(#4. 혜경의 에피소드). 어차피 실망할 것을 알면서도 또 한번 기대를 거는 모습은 결국 우리 모두의 불완전함과 닮아 있다. 그래서인지 극중 등장 인물들이 친구처럼 느껴졌다. 은희는 무사히 결혼을 했고 또 후회하진 않는지, 수정과 우진은 마음 가는 길을 따르지 않기로 선택한 후 어떤 결과를 살고 있는지, 그들을 붙잡고 물어보고 싶어졌다.
김종관 감독이 이전의 단편들 <폴라로이드 작동법>, <헤이 톰>을 통해 '감정'을 전달했다면 이번엔 관객에게 8명의 '인물'을 심어주었다. 전작 <최악의 하루> 속 은희가 3번째 옴니버스에서, 그것도 '거짓말하는 캐릭터'라는 전작의 연장선에서 등장했을 때 반가웠던 이유다. 최악의 하루를 보냈던 은희의 근황을 이렇게 알게 되었을 땐, 은희가 실제로 서울 어딘가에서 살아가고 있을 것만 같았다.
얼마 전 GS칼텍스의 전화상담원에 관한 광고가 화제가 된 적 있다. 상담 직원과 전화 연결 시 일반적인 통화 연결음 대신 가족의 목소리를 녹음해 들려주었다. 통화 전 “사랑하는 우리 아내가 상담드릴 예정입니다” “착하고 성실한 우리 딸이 상담드릴 예정입니다” 등 상담 직원 가족의 목소리를 들은 고객들은 8% 더 친절하게 말하게 되었고, 평소 언어폭력에 시달리던 상담원의 스트레스가 절반 정도 감소했다는 내용의 광고였다.
누군가의 소중한 가족이라는 당연한 사실을 알았을 뿐인데도 익명의 전화상담원이 나와 같은 ‘사람’으로 느껴진다. 이처럼 이야기를 입은 타인은 더 이상 낯선 이가 아니게 된다. 우리처럼 울고 웃고 각자의 사연을 지녔다는 사실만으로도 친근해지고, 때로는 안부까지 묻고 싶어진다. 낯 모르는 이에게 ‘괜찮냐고, 잘 지내냐고’ 안부를 묻고 싶은 마음은 얼마나 다정한지. <더 테이블>은 우리 주변을 무심히 스치는 사람들을 다정한 시선으로 바라보도록 한다.
내가 저 영화의 주인공이 된다면, 저 테이블 앞에 함께 앉고 싶은 이들의 얼굴을 떠올렸다. 그리고 마주앉을 이들과의 대화를 매일 옮겨 적어두고 싶어졌다. 우리의 대화를 김종관 감독처럼 아름답게 지켜봐주는 사람이 있다면 더욱 고마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