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과 을 사이

집주인이지만 세입자예요.

by 카페 그린티


"집 보러 아무도 안 왔어요!"

세입자의 원망 섞인 목소리다. 부동산에 집을 내놓았는데 보러 오는 사람이 없다는 얘기다.

"아이고, 왜 안 보러 오지?" 누구한테 하는 말인지도 모르는 말로 나는 답했다. 딱히 할 말이 없어서. 속내를 말하자면 '저한테 어쩌라고요, 좀 기다려 보세요.'하고 싶지만 그렇게 말할 순 없었다.


우리 세입자는 이 집에서 4년 4개월을 살고 있다. 원래대로 하자면 2년 연장해서 4년으로 전세 계약을 해야 하지만 4년 하고 4개월을 연장해서 살고 있다. 세입자분이 새 아파트 분양받아 입주하는 관계로 24개월을 넘어 4개월을 더 살고 있다. 세입자분의 입주 예정일은 6월 중순이다. 이런 말을 구차하게 나열하는 건 우리도 세입자의 사정을 양해해 주고 있다고 말하고 싶은 거다.


2월 말부터 부동산에 전세를 내놓았지만, 이삿날이 아직 멀었다는 이유로 집 보러 오는 사람이 없었다. 3월 초쯤 5월 중순에 이사 들어가면 안 되냐는 문의는 있었지만, 세입자분이 그 날짜는 안 된다고 해서 무산됐었다. 그리고 3월 중순이 넘어가는 이번 주부터 이틀에 한 번씩 문자를 보내고 간간이 전화를 한다.


"옆 단지에 똑같은 평수가 지금 내놓은 금액보다 2천만 원이 더 싸더라고요"

어서 전셋값을 내리라는 암묵적 요구다.

"아, 네 그래요? 그럼 저희도 좀 내릴까 봐요."

"네~ 내려야 집이 빠질 것 같아요."


현재 세입자가 살고 있는 전셋값보다 3천만 원 올려서 내놓았다. 전세 놓고 우리도 남의 집에 전세 살고 있으면서 대출받은 것이 있기 때문에 이번 기회에 대출금을 상환하고 싶었다. 아시다시피 이자가 만만치 않다. 우리 사정만 생각하고 시세 조사 없이 3천만 원을 올린 건 아니다. 같은 단지 같은 층수에 전세 나온 금액을 참고해서 금액을 올려도 되겠다 싶어 지금 금액으로 내놓았던 거였다.


그래도 별 수 있나. 기한 안에 이사 못 가실까 봐 노부부가 애가 타신다. 부동산에 전화해서 2천만 원을 내렸다. 그런데 이상하게 집 보러 오는 사람이 없었다. 그래서 오늘 오전 또 세입자 할머니에게 이런 전화를 받은 거다.


"아무도 집 보러 안 왔어요!!!!!"


남편과 상의하고 천만 원을 더 내렸다. 지금 세입자와 계약한 전세금 가격이다. 천만 원을 내리자마자 득달같이 부동산에서 전화가 왔다. 꼭 이럴 줄 알았다는 듯 집 보러 오겠다는 거다. 거래는커녕 매물 나왔냐는 문의 전화조차 없다는 부동산에서 바로 손님이 있다며 집을 보러 오겠다는 거다. 그날 집을 보러 와서 저녁에 바로 계약을 했다.


세입자에게 이틀에 한번 꼴로 문자를 받고 일주일에 한두 번씩 전화를 받았던 2주간의 스트레스는 한순간에 사라졌다. 그런데 왜 속상하지? 왜 내가 꼭 을이 된 거 같지? 갑이 되고 싶었던 적은 없었다. 정말이다. 그러나 을이 되고 싶지도 않다. 세상이 모두 짜고 나를 놀리는 것 같은 기분. 맹하고 맹해서 맨날 당하고만 살고 있는 느낌. 2주간 세입자에게 시달렸다는 생각은 지나친 건가? 내가 예민한 건가?


집에 관해서는 나는 집주인이고 하고 전세입자이도 하다. 누가 장난을 치는 듯 세입자로도 나는 집에 관한 스트레스를 받고 있다. 어느 날 집주인 전화가 왔다. "집을 내놓으려고요. 집 보러 오면 잘 좀 보여주세요." 한다. 우리도 이 집에서 4년을 넘게 살고 있다. 집을 매매하신다니 뭐 집이 팔리면 우리도 이사를 해야겠지. 한동안 이사 갈 곳도 알아보고 집 보러 올까 봐 청소에도 신경을 많이 썼다. 사실 내가 제일 못하는 게 청소여서 '청소'라는 행위는 나에게 엄청난 스트레스다. 그래도 집 더러워서 계약 못 하겠다는 소리 듣지 않으려고 나름 신경 쓰고 있다. 집 내놓고 첫 달에 부동산 사장님이 구조 본다고 한 번, 집 보겠다고 손님 데리고 한 번. 이렇게 두 번의 방문 외에는 반년이 넘어도 집 보러 오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


"아무도 집 보러 안 왔다면서요!!!"

집주인의 목소리에 한숨이 섞여있다.

"네, 왜 안 보러 올까요"


목소리에 힘이 없는 집주인에게 요즘 시기가 좋지 않아 집 보러 안 오는 것 같다는 위로의 말을 건넸다. 그리고 전화를 끊고 나서, 속상했다. 억울했다. 사각의 링 위에서 이리저리 잽을 얻어맞고 링 밖으로 나가지도 그렇다고 주먹 한 번 휘두르지도 못한 스탭이 꼬여버린 권투선수가 된 거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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