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우연히 '사랑과 통제와 맥주 한잔의 자유'(김도미, 2024)를 읽게 됐다. 여러 책들을 보던 중 이 책의 소제목 같은 '치유와 자유의 경계에서 쓴 불온한 질병 서사'라는 문구에 꽃혔다. 사실 제목만 봐서는 소설인 줄 알았다. 책 정보는 이 링크를 참고하면 될 것 같다.
https://www.aladin.co.kr/m/mproduct.aspx?ItemId=350409469
급성 백혈병에 걸린 저자가 자신의 생각들을 쓴 글이다. 1형 당뇨병과는 다른 특징들이 있기는 하지만, 환자들이 겪는 경험 중에는 비슷한 것들이 많은 것 같다. 마음 깊이 공감되었고, 읽는 내내 '맞아 맞아.'라고 고개를 끄덕이면서 읽었다.
정확한 문구는 기억나지 않지만, 이 책에서 저자는 이런 기록을 남기고 자신의 경험을 나누는 것이 다른 사람들에게 위로가 된다고 했다. 이 문장을 보고 다시 오랜만에 블로그에 글을 쓰고 싶어졌다.
암은 재앙이다. 아무렇지 않게 영위하던 일상에 시시콜콜하거나 중대한 어려움이 닥친다. 그러나 몸 어딘가가 이상하게 아프고, 병원에 가서 진단을 받고, 치료를 하느라 더 아픈 지난한 과정을 마치는 동안 일어나는 일들이 몽땅 재앙인 것은 아니다. 날것으로 무친 음식을 먹는 대신 펄펄 끓여 익혀 먹는다든가, 마스크를 끼고 병원에 다니는 일이 하루 종일을 차지한다거나, 친구와 만나는 대신 메신저나 화상통화로 이야기를 나누는 식으로 일상이 재배열된다. 생존을 중심으로 매일의 구성이 바뀐 만큼, 혼자 끌어안거나 함께 나누는 기쁨과 슬픔의 성질도 조금은 달라진다. 이 새로움마저 몽땅 재앙이라고 하기에는 삶이 그보다 깊다.
1형 당뇨 발병 후에도 일상이 달라진다. 저자의 표현을 빌리자면 '재배열된다'. 그 전에는 상상도 하지 못한 방식으로. 초반에는 '평생 이렇게 살아야 한다고? 어떻게 이렇게 답답하게, 신경쓰며, 챙기며 살아?'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차차 적응하게 된다. 나도 저자의 문장을 빌려와서 내 식대로 바꿔보고 싶다.
'1형 당뇨는 재앙이다. 아무렇지 않게 영위하던 일상에 시시콜콜하거나 중대한 어려움이 닥친다. ... 아무 생각 없이 음식을 바로 먹는 대신 탄수화물 양을 파악하고 인슐린 주사를 맞는다든가, 연속혈당측정기의 값을 하루에도 수십 수백번씩 확인하고 그에 따라 감정이 오르락 내리락한다거나, 잠깐 쓰레기 버리러 가는 길에도 저혈당 간식을 챙기는 식으로 일상이 재배열된다.'
아픈 사람은 자신이 '질병'에 걸린 '사람'이 아니라 질병 그 자체인 것만 같은 경험을 한다. (중략) 사람들은 암환자에게 통제적이거나 지나친 수준의 성찰과 자기돌봄을 요구했다.
한편 건강한 사람들은 아픈 사람에게 무언가를 가르쳐 줄 수 있다고 믿는 것 같다. 건강한 데다 말까지 많은 그들은 병자가 가져야 하는 긍정적인 마음가짐을 알려주고, 무얼 해보라거나 먹어보라는 이야기도 잘한다. 무얼 하지 말라거나 먹지 말라는 말도 한다. 깨달음을 얻었다는 다른 병자 이야기를 늘어놓거나, 염려인지 핀잔인지도 섞어가면서, 질병의 원인에 대한 여러 풍문을 중언부언 늘어놓다가 사라진다. 아무도 자신의 말에 책임지지 않는다.
암 경험을 알리기가 꺼려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암 경험자라는 사실이 사회생활에서 불리한 요소로 작용하기 때문에? 실제로 암 경험은 연애와 결혼을 새롭게 시작하기엔 결격사유가 되고, 노동시장으로의 복귀를 어렵게 한다. 생식기에 생긴 암이나 구강암에는 성적인 연상이 뒤따르고, 간과 폐에 생긴 암은 환자의 생활습관에서 원인을 찾게 한다. 낙인은 효과적으로 병자의 입을 다물게 하는 요소다.
너무나 공감되는 이야기였다. 어떻게 다른 병인데 이렇게나 비슷한 경험을 하게 될까 놀라울 지경이었다.
4인분의 가사노동과 2인분의 육아를 아픈 몸으로 해낸 것이 고인과 고인의 어머니 잘못일 리가 없다. 환자 가족에게 매일 발생하는 가사와 육아를 지역 사회 안에서 나누어 할 수 있었다면
환자, 장애인의 돌봄에 대한 부담을 그 가족이 과도하게 짊어지고 있는 것 같다. 복지 및 의료 제도 개선과 사회, 공동체의 변화가 필요할 것 같다. 꼭 환자가 아니더라도 어르신, 어린이, 맞벌이 부부 등에게 돌봄이 필요한데, 그것들이 잘 채워졌으면!!! 이 책에서도 재택 의료 서비스, 암 요양병원, 실손보험, 가족제도 , 돌봄노동 등 관련된 이야기들이 많이 나온다.
하루가 멸균으로 꽉 찼지만, 그래도 아픈 날에는 아팠다.
1형 당뇨병도 '하루가 혈당 조절로 꽉 찼지만, 그래도 어떤 날은 고혈당과 저혈당이 다가왔다.'라고 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당연히 병이 나았으면 좋겠다. 그러나 상실을 수용하는 데에는 자마다의 시간이 필요하다. 건강한 몸으로 살아왔던 일상의 시시콜콜함과 작별하기 위한 최소한의 의례가 필요하다.
최근에 애도에 관한 심리학 분야의 영상을 봤는데, 꼭 죽음만이 아니라 병에 걸리는 것, 어떤 소중한 물건을 잃어버리는 것, 가까운 사람과 헤어지는 것을 모두 상실로 보고, 애도의 과정이 필요하다고 했다. 나도 1형 당뇨에 걸린 후로 잃어버린 것들도 있는데 그런 상실을 잘 애도했는지 돌아보고 싶기도 하다. 그에 관한 글은 따로 쓸 예정이다.
완치하려면 정성 들여 쉬어야 한다는 신화는 위험 요소로부터의 전면적 통제를 끊임없이 설파한다. 하지만 암을 유발한다고 알려진 요소는 영수증에 묻은 잉크 한 방울부터 사소한 생활 습관이나 거주환경까지 너무나 많아서 기가 질릴 정도다. 대체 얼마나 비범해야 암환자를 '제대로' 돌볼 수 있는 걸까
환자의 가장 큰 소망은 완치라도 하더라고, 그 과정이 밑도 끝도 없는 단절이기를 원하지는 않는다.
1형 당뇨인도 마찬가지인 것 같다. 완치됐으면 좋겠지만, 지금으로서는 완치될 수는 없으니.. 지금의 가장 큰 소망은 혈당 관리가 잘 되는 것이라고 해도, 그 과정이 혈당에만 집중해서 내 일상이 사라지는 것이기를 바라지는 않는다. 매일 짜장면을 먹지는 않으려고 해도, 평생 전혀 쿠키와 초콜릿, 콜라, 짜장면을 먹지 않으면서 혈당 조절이 잘되는 것은 원하지 않는다.
간병과 같은 일상적인 돌봄 문제에 대한 제도는 거의 공백에 가깝다. 숨만 쉬어도 돈이 새어 나가는 것이 대다수 아픈 사람의 현실이지만, 절대빈곤의 상황에 처했음을 증명할 수 없다면 일상적인 돌봄에 대한 제도적 지원을 받기 어렵다.
한창 일해야 하는 나이, 한창 경력을 쌓고 능력을 증명해야 하는 나이. 그러나 예전 같지 않은 몸으로 어떻게 밥벌이를 할 수 있을까. (중략) 무엇보다 일상으로 복귀해서 생계를 이어나가야 한다.
치료를 모두 마쳤지만 여전히 아픈 사람들, 적지 않은 암 경험자들에게 필요한 것은 자신의 역량에 맞게 사회 활동을 할 권리다.
(중략)
야근하지 않아도 되는 환경, 눈치 보지 않고 병원에 갈 수 있는 노동환경은 아픈 사람 뿐만 아니라 '현재 건강한' 사람에게도 절실하다.
(중략)
아픈 사람이 하고 싶은 일을 계속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건 단지 아픈 사람의 생계를 해결하는 문제에 그치지 않으며, 아픈 사람이 하고 싶은 일을 할 권리란 '일하느라 병에 걸리지 않을 권리'와 '병에 걸려서도 일터에서 내몰리지 않을 권리' 모두를 포함하는 것일 테다.
1형 당뇨 관리를 위해 들어가는 돈은 매달 평균 40-50만원(내 경우)이고, 몇 년에 한번은 몇백만원을 들여 인슐린 펌프를 사야 한다. 예상치 않고 들어가는 돈들도 있다. (합병증 검사는 40만원 정도였고, 기간을 다 채우지 못하고 고장난 연속혈당측정기가 있으면 100% 부담해서 10만원 정도의 연당기를 사야 한다.) 돈은 건강 관리에 직접적으로 맞닿아있다. 물론 생존과도...!!!
꼭 먹고사는 것 만이 아니라도 해도,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싶다. 그런데 나도 1형 당뇨 발병 후 예전처럼 야근하고, 무리하고, 스트레스 받는 것들을 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도 일하는 것이 두렵다. 더 아플까봐..ㅠㅠ
+ 저자는 환경, 쓰레기 문제에 대해서도 성찰한다. 나도 인슐린 펌프 소모품을 갈 때, 연속혈당기를 교체할 때, 손끝 채혈할 때 생기는 쓰레기들(알코올 스왑, 채혈침, 혈당측정 검사지)... 매번 생기는 쓰레기들을 보면서 좀 지구에 미안했다. 하지만 일회용이고, 재활용도 할 수 없고, 꼭 써야 하는 걸...ㅠㅠ
+ 정신건강에 대해서도 다룬다. 암 경험자들이 심한 우울증이 발병한 확률은 일반인의 4배 정도에 달한다고 한다. 1형 당뇨인도 3배 정도 높다고 한다. (https://v.daum.net/v/20240430210628361) 질병을 경험한 사람들의 정신건강 이슈...
고맙고 사랑스러운 것들이 느닷없이 사라지기도 한다는 걸, 이제 알았다.
상처를 받지 않고 살아갈 방법도, 상처를 받기 이전의 무결점(이라고 회상되는) 상태로 돌아갈 방법도 없었다. 상처가 흉터 없이 매끈하게 아무는 걸 회복이라고 일컫는 것도 아니었다. (중략) 상위 몇 퍼센트가 누릴까 말까 한 성취와 정복의 위풍당당함이 아니라 늘 흔들리지만 소중한 것을 유지하려는 작고 평범한 애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