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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아 Jun 19. 2017

나의 소리를 찾아서

내 귀를 거쳐간 음향기기들의 역사

  여행이나 레저 스포츠 같은 목돈 드는 취미가 없는데도 통장 잔고가 바닥을 보이는 건 내가 평소에 삶의 질을 높이는 데 돈을 많이 쓰기 때문이다. 이렇게 말하니 왠지 포장이 지나친 것 같은데. 일상어로 다시 말하자면 '그렇게까지 돈을 쓰지 않아도 될 것에 사치를 부린다'는 거고 이렇게 과소비를 해온 것이 대학 때부터니 벌써 7년째 프로지름러로 살고 있다는 거다. 그간 지른 것들로는 dslr 카메라, 게임(오버워치)용 데스크탑과 27인치 모니터 등이 있다. 거기에다 빼놓을 수 없는 각종(이라기엔 소소한) 음향기기까지.


  유치원 때 김건모 핑계를 완벽하게 모창했다는 부모님의 증언에 따르면 내가 음악을 즐긴 역사는 상당한 듯하다. 하지만 본격적으로 세상이 허락한 유.일.한. 마.약.을 즐기기 위해 돈을 쓰기 시작한 건 내가 스스로 생활비를 벌기 시작한 스무살 때부터다. 스트리밍 서비스를 구독하고, 친구가 말해준 대로 밥그릇에 갤럭시s를 넣고 재생 버튼을 누르던 기억이 생생하다. 그렇게 음악을 들으면 밥그릇 속에서 울리는 소리가 나름 그럴싸...했는데 문짝에 '조금만 조용히 부탁드려요^^;' 라는 쪽지가 붙는 걸 보고 그만두었다. 고시원에서 방음을 기대하는 게 잘못이지.


  그렇게 만원짜리 이어폰과 동고동락 고시원 생활을 하며 만들어진 막귀가 비로소 트이기 시작한 건 2013년 가을, 아라아트센터에서 하던 <ECM전>에 간 날부터였다. 문화예술 분야에 대한 지적 허영이 하늘을 찌르던 시절이어서 웬만큼 인기 있는 전시는 죄다 순회했는데 ECM전도 그 중 하나였다. ECM이 독일의 음반사라는 건 당연히 몰랐고 그저 음악을 전시한다는 컨셉이 궁금해서 방문한 것 뿐이었는데... 거기 음악들이 너무 좋은 거다!


출처 : 아라아트센터


  좀 더 정확하게는 음악의 아름다움보다 소리의 명료함에 감탄하게 되는 공간이었다. 피아노로 이렇게 구슬 굴러가는 맑은 소리를 낼 수 있었다니. 특히 어마어마하게 비싸 보이는 스피커로 음감 공간을 꾸며둔 맨 꼭대기층에서 들리는 소리가 장관이어서 한두 시간 꼬박 집중하다 왔다. 황홀했다. 집에 가는 길, 감동을 이어가고 싶어 전시에서 들었던 음악들을 재생목록에 넣고 여느 때 잘만 쓰던 저렴이 이어폰을 꼈다. 엥?


이 소리가 아니야!
(와장창)


  내가 듣던 소리가 음악 본연의 감동을 뭉개 버리는 수준인 걸 알고부터 극심한 음향기기 뽐뿌에 시달리며 몇 달을 보냈다. 그러다 이듬해 여름 드디어 고시원에서 벗어나 창문이 큰 원룸에서 두 번째 자취 역사를 시작하게 되었고, 재채기 한두 번만 해도 옆방에서 벽을 두드리던 그 곳을 탈출한 기념으로 스피커를 샀다. TDK의 Trek이다.


  10만원이 채 되지 않는, '이 정도면 사고 나서 자괴감 들진 않겠다' 싶은 가격에 내 취향을 저격하는 깔끔한 디자인까지. 마음에 쏙 들던 그 스피커는 갤럭시3s나 서피스보다는 훨씬 좋은 소리를 들려 주었고 나는 샤워하면서까지 음악을 챙겨들을 정도로 열심히 본전을 뽑았다. 이후 학교를 졸업하고 첫 직장을 가지게 될 때까지 그 스피커는 나의 희노애락을 함께해 주었다.


  하지만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고 사소한 계기로도 뽐뿌는 다시 찾아오는 거였다. 평화롭던 어느 날 맞은편 원룸에 웬 청년 한 명이 이사왔는데, 일주일에 한 번은 친구들을 불러 술판을 벌이고 두 번은 여자친구를 데리고 와서... 그랬다. 누굴 데려오던 간에 특유의 소리가 다 났다. 지은 지 20년이 넘은 다세대 주택이니 방음이 엉망인 건 당연했고 그 엄청난 소음에 잠을 설치는 것도 당연했다. 집주인을 통해 주의도 몇 번 줬지만 소용없었다. 결국 수신제가를 택하고 3m 귀마개 최저가를 알아보는데... '소음 차단'으로 이것저것 검색하다 보니 삼천포로 빠져 '노이즈 캔슬링' 을 발견하게 되었다. 노이즈 캔슬링은 주로 고급형 이어폰이나 헤드폰에 포함되어 주위 소음을 막아주는 기능이라는데 좀더 찾아보니 마침 소니에서 노이즈 캔슬링 기능을 탑재한 최신 헤드폰이 나왔다는 거다. 오 이거 뭐지? 이쁜데?


  정신을 차려 보니 그 헤드폰은 이미 내 손에 들려 있었다.


예쁘고 기능도 좋은데 비싸...비싸...싸...할부로 사면 싸... 하며 사 버린 MDR-1000X.

  

  이 헤드폰을 산 건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는 지름이었다. 블루투스 헤드폰 치고 음질도 좋고, 노이즈 캔슬링도 더할 나위 없고. 다만 이걸 산 다음부터는 Trek 스피커와 내 사이가 멀어지게 되었다. 헤드폰 음질이 그 스피커를 한참 뛰어넘으니 굳이 스피커를 쓰기가 싫어져서다. 헤드폰을 사게 해 준 계기가 된 앞집 청년과도 멀어졌다. 방음도 수압도 변변찮고 곰팡이가 가득하던 그 집에서 2년 만에 이사한 덕이다. 회사와는 가까워졌다. 보증금도 월세도 올랐지만 한겨울인데 결로 현상도 없고 벽지에 곰팡이도 피지 않는 것만으로도 오른 월세가 아깝지 않을 만큼 좋았다.


  그리고 정말로 뜬금없지만 이사 기념으로 스피커를 샀다. 야마하 TSX-B235.


물론 이사온 집이 이렇게 아늑하진 않다.


  대체 무슨 배짱으로 한달 월세보다 비싼 스피커를 덜컥 샀는지 이제는 이유도 가물가물하다. 헤드폰을 집에서도 쓰려니 불편하고, 부동산 중개원의 "이 집은 방음이 잘 돼요!"라는 말이 사실인 걸 알게 되었고, 좋은 스피커로 음악을 들어보자는 욕심이 합쳐졌겠거니 추측만 한다. "이 스피커로 동요를 들으니 두 돌 지난 우리 애가 춤을 다 추네요. 저렴이 스피커로 들을땐 꼼짝도 안 했었는데~~" 라던 후기도 한 몫했을지 모른다. 과정이야 어쨌든 3개월 할부는 몇 달 전에 이미 모두 갚았다. 지금은 이 스피커 없이 어떻게 집에서 음악을 들었나 싶다. 모든 장르에서 무난한 소리를 들려 주는 좋은 스피커다.


  이런 계기들로 장만한 헤드폰과 스피커. 음향기기 마니아들 기준에선 저가형 제품일지 몰라도 사회 초년생의 쥐꼬리 월급을 생각하면 엄청난 투자였다. 그 투자로 알게 된 건, 음향기기의 성능은 볼륨이 작을 때 드러난다는 거다. 볼륨 최대로! 두고 쿵쿵거리는 음악을 들으면 저렴한 스피커와 이어폰으로도 충분히 흥이 나지만 크지 않은 볼륨에서도 감탄할 만한 소리를 들은 건 언급한 헤드폰을 산 이후부터다. 그리고 이 소리는 기대하지 않고 있던 순간에 툭 감동을 준다. 생일도 아닌 날에 선물을 받는 기분이랄까.


  좋은 소리는 좋은 집처럼 삶의 기본 만족도를 높여주는 것 같다. 고시원 살 땐 창문이 없어 낮밤 내내 어두웠고, 다세대 주택에 살 땐 외풍이 심해 겨울이면 방에서 입김이 하얗게 나왔다. 지금 집이야 이전 집에 비하면 훌륭하니 아직은 별달리 불만이 없다. 사실 지금은 월세며 공과금을 내기에도 벅차서 더 좋은 곳을 바랄 여유도 없고. 그래도 괜히 한 번 상상해 본다. 지금보다 좀 더 넓은 집에 살면 책장도 하나 더 놓고, 방음이 잘 되는 곳이라면 악기도 하나쯤 배워볼 수 있겠지. 큰 책상을 두고 커피를 마시며 작업하는 공간으로 삼으면 좋겠다. 이런 망상을 계속하다 보면 보인다. 그 방 한켠에 놓인 뱅앤올룹슨 스피커가.


300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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