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지는 처음 보는 디자인이었고 표지 아래에 이름도 낯설었다.
나는 글을 쓴다. 한 줄의 문장을 쓰기 위해 계절 하나를 통째로 건너야 했고, 어떤 단어는 손끝이 닿지 않아 오랫동안 기다려야 했다. 이따금 버텨낸 하루를 그대로 문장으로 옮기기도 했다. 그렇게 만들어진 문장들이 있다. 가슴속에서 길게 묵혀 발효된 말들, 사람의 얼굴을 닮은 문장, 내 시간과 마음을 갈아 넣어 만든 구절들. 그 문장들을 세상에 내보내기도 했고 차마 보여주지 못해 조용히 묻어두기도 했다. 한밤중에 일어난 죄처럼 혼자 알고 싶은 마음도 있었고 아무도 모르게 사라지기를 바란 말도 있었다.
어느 날, 낯선 책 한 권이 내 앞에 놓였다. 표지는 처음 보는 디자인이었고 표지 아래에 이름도 낯설었다. 그 속에는 내가 오래 쓰다듬었던 문장들이 있었다. 내가 한 글자씩 꿰매듯 써 내려간 문장들, 그 낯선 책 속에, 아무렇지 않게 박혀 있었다. 어떤 구절은 너무 익숙해서 손으로 만질 수 있을 것 같았고, 어떤 문장은 밤마다 되뇌던 내 속마음 같았다. 나는 조용히 책을 덮었다. 슬프다는 생각보다 허전했다. 무너진 것보다, 텅 빈 느낌. 가진 것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그 없는 것을 또 빼앗긴 기분이었다.
사람들은 말했다. 글이란 본래 누구의 것도 아니라고. 비슷한 생각을 하는 사람은 어디에나 있다고. 나는 고개를 끄덕였지만, 마음은 좀처럼 고개를 끄덕이지 않았다. 그들은 몰랐다. 글은 단순한 생각의 조각이 아니라 나의 기억이고, 나의 마음이었으며, 그 문장을 쓰기까지 내 삶의 무늬가 얼룩처럼 찍혀 있었다는 것을. 모방과 침묵 사이에는 큰 강이 흐른다. 누구는 그 강을 건너고, 누구는 그 강 앞에서 돌아선다. 나는 다만, 그 강을 건너지 못했다. 물에 떠밀려 갈 수 없었다. 물 아래 잠긴 내 이름이 너무 또렷하게 보였기 때문에.
일은 생각보다 커졌다. 그 책은 팔렸고, 누군가는 그 책을 읽고 감동을 받았다고 했다. 나는 조용히 그 말을 들었다.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말을 하면 할수록 나만 작아지는 기분이었다. 나는 허공만 바라본 채 앉아 있었다. 한 귀퉁이에 초대받지 않은 유령처럼. 속으로 많은 말을 삼켰다. 가슴까지 삼킨 말들은 슬픔보다 깊었고 분노보다 오래갔다. 마치 죽은 사람처럼. 그때 나는 이름을 잃은 문장이 얼마나 허전한지를 처음 알았다.
문장은 기억이다. 어떤 문장은 어린 날의 놀이터이고, 어떤 문장은 오래전에 끝난 사랑이고, 어떤 문장은 이따금 꿈에서 다시 꺼내 보는 후회다. 그래서 빼앗긴 문장은 더 아프다. 기억을 도둑맞은 것처럼. 다시는 찾을 수 없는 것을 잃은 것처럼.
이제 나는 다시 글을 쓴다. 더 조심스럽게, 더 오래 머뭇거리며, 하나의 단어가 나를 떠나기 전에 그 안의 마음까지 붙잡아 두려 애쓰며, 언젠가 떠나갈지도 모를 문장을 더 깊이 사랑하려 한다. 다시 쓰는 글은 예전보다 더 느리고 조용히 흐르지만 그만큼 더 나다워졌다. 글은 언제나 나를 증명해 주는 유일한 숨이었다. 숨을 멈춘 순간, 문장도 멈췄고, 다시 살아나고 싶을 때마다 나는 문장을 꺼냈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쓴다. 누구의 이름도 아닌 나의 이름으로,
누구에게 들려주기 위함이 아니라 내가 존재했다는 조용한 증거로, 문장은 살아 있는 동안만 쓸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오늘도 한 줄을 고른다. 밤이 지나고 아침이 올 때까지, 침묵이 끝나는 곳에서 나는 다시 시작할 것이다. 내 문장으로, 내 숨결로, 내 시간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