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장은, 처음부터 말이 없었다. 소리를 내지 않고 다만 숨을 쉬었다. 나는 그런 문장들을 좋아했다. 조용히, 그러나 분명하게 존재하는 것들. 마치 새벽의 안개처럼 말은 없지만 주변을 감싸고 서서히 스며드는 것. 그 부드러운 확신을 나는 사랑했다.
그러나 어느 날, 내 문장은 이름을 잃었다. 낯선 책 한 권이 내게 왔다. 처음엔 믿지 않았다. 장난일 거라 생각했다. 속표지를 넘기기 전까진 그랬다. 그러나 첫 문단에서 나는 알아버렸다. 그것은 내 문장이었다. 내가 수없이 고쳐 적었던 리듬, 내가 한 글자 한 글자 지우고 다시 썼던 말투, 그 속에는 분명히 나의 시간, 나의 마음, 나의 호흡이 있었다. 단 하나, 이름만 달랐다. 누군가의 이름으로, 누군가의 목소리로, 내가 살아낸 언어들이 그 사람의 박수 속에 있었다. 나는 없었다.
마치 연못 속에서 나만 알아볼 수 있는 물고기를 바라보는 느낌이었다. 그 물고기는 분명 내가 길러낸 것이고 내가 밤마다 말을 걸던 존재였는데 다른 이의 손에서 헤엄치고 있었다. 마음이 이상하게 먹먹해졌다. 분노보다 슬픔보다 허무보다 먼저 찾아온 건 정적이었다. 모든 것이 고요해지고 그 고요 속에 나는 잠겼다. 말을 잃고, 손끝을 잃고, 이유를 잃고.
나는 그 후로 오랫동안 아무것도 쓰지 않았다. 아니, 쓰지 못했다. 단어는 떠올랐지만 그것을 적을 손이 따라주지 않았다. 무얼 위해 쓰는가. 누구를 위해 쓰는가. 그 물음이 무겁게 가슴을 눌렀다. 애써 써낸 문장이 또 누군가에게 빼앗긴다면, 그건 나를 또 한 번 없애는 일일 테니까. 나는 살아 있었지만, 글 속에서 지워졌고, 문장 안에서 투명인간이 되었다.
어떤 밤은 창문을 열어두고 세상의 소리를 들었다. 창밖의 바람, 멀리서 지나가는 차의 속삭임, 어디선가 울리는 개 짖는 소리, 어둠 속에서 바스락이는 나뭇잎들. 그 소리들 사이에 나는 조용히 섞여 앉아 있었다. 세상이 나를 지나치는 그 풍경 속에서, 나는 더 이상 중심이 아니었다. 그냥 스쳐 지나가는 한 존재. 들리지만 닿지 않는 거리 나는 내 문장들을 그 거리로 놓아두기로 했다. 누구의 것이라 이름 붙이지 않고 다만 흘려보내는 일. 그저 나의 침묵으로부터 태어난 말 없는 문장들이 흘러가기를 그렇게 비워두기로 했다.
하루는 오래된 노트를 꺼냈다. 노트의 겉표지는 바래 있었고 귀퉁이는 말라 있었다. 그 속에 흰 종이들이 잠자고 있었다. 한때는 그 위에 수많은 단어들이 피고 졌다. 기쁨의 문장, 고통의 문장, 후회의 문장, 사랑의 문장. 그 모든 것들이 나의 하루를 견디게 했고 살아 있게 했다. 나는 손끝으로 조용히 종이를 쓸어보았다. 오래된 벗을 만지듯.
텅 빈 들판처럼 보였지만, 그 위에는 여전히 무언가가 있었다. 나는 천천히 펜을 들었다. 아주 오랜만의 동작이었다. '말 없는 문장들, 살아 있는 침묵.' 첫 문장을 썼을 때, 손이 약간 떨렸다. 그러나 나는 알 수 있었다. 이 문장은 살아 있다고. 말은 없지만 숨을 쉬고 있었다. 마치 오랜 시간 땅속에서 기다리던 씨앗처럼.
문장도 사람처럼 말을 하지 않을 때 더 많은 것을 담는다. 말은 때로 모자라고, 때로 과하고, 때로 상처가 되지만 말 없는 문장은 그저 있다. 다가오지도 않고 멀어지지도 않으며, 호흡처럼 그림자처럼 거기 있다. 나는 그런 문장들을 다시 사랑하기로 했다. 누구에게도 보여주지 않아도 좋다. 출판되지 않아도 괜찮다. 다만 그것이 나에게 진실이라면, 그 진실 앞에서 나는 다시 살아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다시 천천히 쓰기 시작했다. 이름을 달지 않고, 누구에게도 보내지 않고, 다만 나를 위해. 누군가의 찬사를 위해 쓰는 것이 아니라 내가 사라지지 않기 위해, 내가 또다시 지워지지 않기 위해, 내 목소리를 다시 찾아가기 위해 나는 쓴다.
침묵은 쉬운 일이 아니다. 말보다 더 많은 용기가 필요한 일이다. 그러나 그 침묵 끝에 다시 쓰는 이가 있다면, 그는 사라지지 않은 사람이다. 문장이 기억하고 있다면 그것은 분명히 살아 있는 이야기다. 비록 훔쳐졌을지라도, 지워졌을지라도, 그 이야기는 나를 기억하고 있다. 나는 지워지지 않을 것이다. 나는 훔쳐진 이야기 위에 다시 내 이야기를 쓸 것이다. 말 없이, 그러나 살아 있는 문장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