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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토록 Sep 19. 2022

그리스 방송에 출연하긴 했는데요

오픈런으로 서울 전용관에서 매일같이 공연이 올라갔다. 주말에는 1일 2회, 어떤 배우들에게 하루 2회 공연은 체력적으로 무리가 될 수 있다. 그러니 주말 이틀 연속 4회 공연은 최대한 지양하는 게 좋다. 그런 와중에 해외 공연이 두 군데나 동시에 잡혀버렸다. 보통 해외 마케팅 팀이 해외 투어를 인솔하지만 인력이 부족해 내가 하나의 투어를 맡게 됐다.


공연 기간 3주, 그리스 제2의 도시 테살로니키에서. 우리나라의 부산과 같은 도시다. 숙소였던 호텔 내에 있던 엘리베이터는 고전 영화에서나 볼 법했다. 타고 내릴 때 철창으로 된 문을 손으로 직접 열고 닫아야 했다. 숙소 밖을 조금만 걸어 나가면 주변에는 바다가 펼쳐져 있었다. 오후 4시 정도가 되면 가게들이 시에스타(라틴 아메리카 등지에서 이른 오후에 자는 낮잠 또는 낮잠 자는 시간)로 문을 닫았다.


그곳에서 월요일과 화요일을 제외하고 3주 동안 주 5일 공연할 예정이었다. 현지에서 섭외한 크루들은 서로 말이 잘 통하지는 않았지만 우리 작품을 무척 재밌어했다. 로비에서 관객 안내를 하는 중년의 부인들도 우리 팀을 무척이나 좋아해 주었다. 공연장을 찾는 관객들도 커튼콜 이후 공연장 밖에서 무대 의상을 입고 관객들에게 한 명씩 인사해 주는 배우들과 사진도 찍으며 다들 즐거워했다.


이렇듯 모든 게 좋아 보이던 분위기에도 판매 부진이 시작됐다. 개막 초기의 많은 관객들은 프로모션 차원에서 불러 모은 초대 관객들이었나 보다. 자꾸만 공연 횟수가 줄었다. 시간이 남는 배우·스태프들이 다른 도시로의 여행을 계획했다. 아테네나 산토리니로. 나도 같이 방을 쓰는 한 여배우와 함께 아테네에 가는 기차표를 끊으러 역사에 몇 번 다녀왔다. 하지만 자리를 비워도 될는지 몰라 망설여졌다.


그러던 중 현지 프로모터에게서 전화가 왔다. 공연 홍보 차원에서 TV 프로그램에 나가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건 분명 예정에 없던 것. 분명 티켓 판매가 원활하지 않다 보니 급하게 잡은 홍보 일정이었다. 현지에서 통역을 맡아 주셨던 한국인 목사님과 함께 연출자, 남자 배우 한 명, 여자 배우 한 명을 인솔해 방송국으로 향했다.


세트장 분위기가 흡사 <아침마당>과 같은 분위기였다. 소파와 테이블이 준비되어 있고, 남녀 진행자, 그리고 그 앞에 중년의 여자분들이 앉아 있었다. 분장이 시작됐는데 갑자기 나도 자리에 앉으라는 거다. 아니, 내가 왜? 연출이랑 배우들만 나가면 되지, 내가 무슨 명분으로? 국내에서도 작품 홍보용 방송 인터뷰가 있을 때 기획자들은 나서지 않는다. 근데 이게 무슨 소리인가. 하지만 그것이 마치 당연하다는 듯이 몰아가는 통에 나는 분장실 의자에 앉을 수밖에 없었다. 내 얼굴에도 그림이 그려지기 시작했다.


그날의 내 모습을 다시는 떠올리고 싶지 않다. 그 누구에도 들키고 싶지 않다. 우리나라 배우들도 일본이나 중국 방송에 나갈 때 그 나라의 스타일이 조금 입혀진다. 그들은 우리의 얼굴에 ‘유럽식 분장’을 해줬다. 지금이야 보통 일상에서도 스모키 화장을 즐기는 사람들이 많지만, 당시에 그런 화장법은 유럽인들의 모습에서나 볼 수 있는 거였다.


거울 속에 비친 내 모습에 나만 놀랐을까. 아니다. 같이 방송국을 찾은 우리 팀 모두가 놀랐다. ‘키메라’가 따로 없었다. 배우들이야 얼굴에 이런저런 분장들을 하게 될 일이 많고 다들 미남 미녀들이라 어떤 메이크업도 다 소화 가능하다. 하지만 둥글고 평면적인 동양인의 얼굴을 가진 내게 스모키 화장이란 진짜 눈뜨고 봐줄 수가 없는 지경이었다.


어차피 현지에서 나를 알아볼 사람들은 없을 테니 그냥 모든 걸 내려놨다. 방송에서 어떤 질문들이 오갔는지 기억도 안 난다. 우리 팀 두 배우들이 맨바닥 위에서 다리를 찢고 텀블링을 시연하던 모습. 그렇게라도 우리의 작품을 알리기 위해 ‘무리’ 해야 했다는 것만 어렴풋이 떠오른다.


이후 현지 방송분을 CD로 전달받았다. 서울로 돌아와 현지에서 진행되었던 모든 일에 대한 보고를 해야 했지만, 나는 그 CD를 회사에 제출하지 않았다. 방송 출연에 대한 이야기는 했지만 굳이 그걸 자료로 첨부하진 않은 것이다. 그걸 제출했다면 나는 일하는 내내 놀림을 당하며 평생을 고통스러워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니 결코 줄 수 없었다.


물건을 쉽사리 버리지 못하는 나는 아마도 아직까지 그 CD를 가지고 있을 거다. 오랜 친구들의 편지를 모아둔 박스라던가, 공연 리플릿이나 MD들을 모아둔 어딘가에서 ‘썩지 않아 어쩔 수 없이 생면 부지’하며 존재하고 있을 거다. 인생의 첫 방송 출연. 그것도 해외에서. 내게 특별한 시간이었음에도 ‘키메라 분장’을 한 모습은 나 혼자만의 추억으로 고이고이 간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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