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연계에 입문하기 전 학원 강사 생활까지 합하면 직장 생활 7년이 지나니 잠깐 쉬고 싶단 생각이 들었다. 10년도 아닌 고작 7년이라지만 불분명한 출퇴근 시간에 일주일에 한 번 쉴까 말까 한 3D 노동 환경. 나에게 번아웃이 조금 빨리 찾아온 것이다.
비전공자로 조금 늦은 나이에 인맥 없이 겨우 발붙인 세상. 그곳에서 무시당하지 않기 위해, 내 자리를 빨리 잡기 위해 나름 열심히 노력했지만 학연과 지연으로 꽁꽁 엮여 있는 그들 사이에 내가 끼어들 틈은 없었다. 어쩌면 그들이 끼워줄 만큼 내가 능력 발휘를 제대로 하지 못했을 수도. 그 안에서 아닌 척, 모르는 척 외면하려 했던 소외감이라는 감정에 더 이상 상처받고 싶지 않았다.
내가 어찌할 수 없는 능력 밖의 것에 의한 차별 아닌 차별에 내 감정이 ‘업 앤 다운’을 반복하는 게 싫었다. 이제는 이 바닥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도 알았으니 온전히 나를 인정해 줄 수 있는 곳을 새롭게 찾아 나서고 싶었다. 몇 년 동안 휴가 한번 제대로 못 떠났으니 조금은 멀리, 그리고 나를 전혀 모르는 곳으로 떠나 거의 잊히고 있는 영어 회화도 다시 공부하고 좀 더 다양한 경험을 통해 생각의 범위를 넓히고 싶었다. 그렇게 나에게 안식년을 주기로 했다. 호주 워킹홀리데이 비자를 신청한 이유다.
하지만 모아 놓은 돈이 많이 있는 것도 아니고, 1년가량 아무 일도 하지 않는다는 건 생각할 수 없었다. 최소한 현지에서 어느 정도 생활비를 충당할 계획으로 워킹홀리데이 비자를 신청했다. 생각보다 너무 쉽게, 또 빠르게 나와 당황했지만 차라리 잘됐다 싶었다. 비자가 안 나왔다면 나는 대학생 때 전적으로 아빠의 경제력을 의지해 다녀왔던 어학연수를 한 밴쿠버로 3개월 정도 여행을 떠났을 것이다.
10년 전일지라도 어학연수 다녀온 경험 때문에 아르바이트를 구하는 다른 친구들에 비해 수월하게 현지인 레스토랑에서 서빙 일을 시작했다. 전혀 고생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이메일로 이력서를 보낸 곳이 거의 30개가 넘는다. 그 어떤 곳에서도 회신이 오지 않았다. 직접 시내에 있는 식당을 20군데 이상 돌며 이력서를 건넸다. 매니저님께 꼭 전달해 달라고 부탁하며 40도 가까이 되는 땡볕 아래서 발품을 많이 팔았다.
그때는 이미 일하고 있는 아르바이트생들에게 건네는 이력서가 매니저 손에까지 올라가지 않는다는 사실을 몰랐다. 그들도 자기 밥그릇 챙겨야 했고, 이왕이면 자신의 친구들 중 한 명과 일하기를 원해 보통은 자기네 선에서 나를 ‘1차로 면접하고’ 땡 처리를 하는 것이다.
시내 곳곳을 돌아다니다 지친 나는 이번이 마지막이라는 마음으로, 멜버른 역 앞 만남의 광장과도 같은 페더레이션 스퀘어에 자리한 ‘비어 디럭스’라는 식당에 들어갔다. 일본인 여자가 일하고 있었다. 얼핏 봐서는 그냥 베이커리 카페인 줄 알았다. 안으로 들어가니 공간이 꽤 넓었다. 알고 보니 맥주와 와인을 곁들인 피자와 식사류를 제공하는 레스토랑이었다. 그리고 2층은 그리스 음식을 파는 식당. 또 2층 야외에서는 햄버거 바까지 운영되고 있었다. 꽤나 큰 규모의 사업장이었다.
사람을 구하지 않느냐고 어설픈 영어로 묻는 나를 다행히도 매니저가 반겨주었다. 곧은 자세, 반들반들 빛나는 민머리를 한 그 사내는 꽤 차가워 보였는데 의외로 내 이력서를 한번 훑어보고는 내일부터 당장 나오라는 것이었다. 이게 꿈인가 생시인가. 벽 쪽에 진열되어 있는 와인들과 맥주들이 어떤 것들이 있는지 한번 둘러보고 가라고 했다. 어쩌지. 한국에서도 이런 곳에서는 일해 본 적이 한 번도 없는데…. 걱정됐다. 앞으로 어떻게 일을 해 나갈지 와인병들을 보면서 뭐라고 쓰여 있는지도 전혀 몰랐지만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거리며 한참을 서성인 후 “See you tomorrow!”라고 얘기하며 나왔다.
그 레스토랑에서 일하기 시작하며 한동안 심리적인 압박에 엄청 시달려야 했다. 드라마 <파스타> 속 “예스, 셰프!"가 남발되는 키친 내의 긴장감을 실제로 살 떨리게 경험했다. 셰프가 왕인 그곳. 아이리시 출신으로 속사포 쏘아내듯 빠르게 얘기하는 두 웨이추리스의 말을 알아듣기도 바빠 죽겠는데 피크 타임 조금의 실수도 용납하지 않는 ‘대빵’ 여자 셰프의 눈빛과 목소리는 나를 숨 막히게 했다. 그 기에 눌려버려 일하러 가기 전날이면 가위에 눌리곤 했다. 매일 바뀌는 '오늘의 스페셜' 메뉴명을 다 외우는 것도 벅찼다. 현지인들의 주문을 받는 것도 쉽지 않았다. 나를 배려해 천천히 말해주는 사람은 없었으니까.
처음 일을 시작할 때는 빈 그릇을 재빠르게 옮기고 테이블을 치우는 게 내 일이었다. 힘든 줄도 몰랐다. 현지인 가게였기에 시간당 페이가 높아 일주일에 2일 동안 거의 10시간만 일을 해도 방값과 생활비를 벌 수 있는 ‘꿀 알바’였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니 매니저는 나에게 좀 더 제대로 된 일을 주고 싶었나 보다. ‘N 분의 1’로 나누는 팁도 가져갈 수 있게 주문을 받게 했다. 나를 향한 배려였다. 하지만 너무 벅찼다. 학원이나 교회에서 만나는 현지인들이 나와 얘기할 때 애써 천천히 또박또박 발음해 주고 있었다는 걸 새삼 알게 됐다.
식당을 찾는 현지인은 외국인인 내 사정을 조금도 고려하지 않았다. 다민족이 사는 멜버른이란 도시에서 내가 이제 막 그 땅에 날아온 한국인 유학생인지, 현지 태생의 아시아인인지 그들이 구분할 길은 없었을 테니. 말없이 청소만 해서 돈을 버는 다른 친구들이 부럽기까지 했다.
서울에서도 생전 해보지 못한 레스토랑 서빙 경험을 통해 나는 어떤 식당에 가더라그곳에서 일하는 분들께 절대로 함부로 말하지 않으려 노력한다. 우리나라에 팁 문화는 따로 없으니 최대한 말로라도 그들의 수고에 대해 고마운 마음을 꼬박꼬박 표현하려고 하는 편이다. 노동에 대한 대가는 오너의 책임하에 있는 것이지만 손님에게 제공하는 개별 서비스에 대한 감사 표시는 '서비스를 제공받은 내가' 별도로 직접 하는 것이 맞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특히나 나이 어린 서버들을 보면, 한 마디라도 더 따듯하게 건네려고 하는 편이다.
'하기 싫어 죽겠다는 듯한' 표정으로 무뚝뚝하고 거칠게 손님을 대하는 모습을 보면 솔직히 조금 화가 나기는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종일 수많은 사람들을 상대하며 감정 소비가 얼마나 컸길래 저리도 지쳤을까 싶어 안쓰러운 마음이 들어 최대한 이해하려는 편이다. 나이 드는 것은 싫지만 세상에 대한, 사람들에 대한 이해심이 조금 더 넓어지는 걸 생각하면 나이를 먹는다는 게 꼭 나쁜 것만은 아닌 것 같다. 내가 좀 더 “사람답게” 살아지게 되는 것 같아 좋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