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에게는 단 한 번의 생만 주어진다. 다시 태어날 수 없다. 그럼에도 누가 내게 다시 태어나 어떤 일을 하고 싶냐고 굳이 묻는다면, 그건 바로 “배우의 길”이다. 내가 생각하는 최고의 직업군은 바로 “배우”다.
한 번 밖에 주어지지 않는 유한한 삶이기에, “한 번 사는 인생, 꿈꾸고 진정으로 하고 싶은 거 하면서 살아야지!” “한 번뿐인 인생, 제일 잘 할 수 있는 걸로 인정받고 살아야지!” 중에 어느 말이 맞는 건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우리는 반드시 선택해야 한다. 어떤 길을 향해 앞으로 나아갈 건지. 그러니 내 선택에서 제외되는 길에는 언제나 아쉬움이 따르기 마련이다. 미련이라는 이름으로.
그래서 나는 다양한 삶을 경험해 볼 수 있는, 현실에서 솔직해지거나 100% 온전히 털어놓지 못하는 감정의 분출을 연기자라는 직업을 통해 무대 위에서 펼치고 싶었다. 물론 배우를 꿈꾸는 이들이, 설령 돈을 받고 하는 연기자의 길에 발 디딘 이들이, 언제나 흡족하게 자신이 바라던 연기를 펼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배우는 선택 받는 직업이고, 하나의 캐릭터를 창조하고 표현해 내기 위해 수많은 고민의 시간이 필요한, 쉽지 않은 길이다. 그럼에도 나는 그들이 가장 부럽다. 억대 연봉을 받는 누구보다 무대 위에서 마음껏 ‘타인의 삶’을 연기하는, 그곳에 모든 에너지를 쏟아 열연할 수 있는 그들이 세상에서 가장 부럽다.
내가 배우의 꿈을 위해 끝까지 나아가지 못했던 것은 열정 부족이다. 나는 현실과 타협했다. 아니 굴복했다는 것이 맞다. 외모에 대한 자신도 없었으며, 경제적인 부분을 외면할 수 없었다. 자리 잡을 때까지라도 집에서 서포트 해주겠다고 따듯하게 말해주는 이가 단 한 명이라도 있었다면 달랐을까. 열정이 조금만 더 있었다면 대학로의 이름 없는 극단에서 바닥 청소를 하고 극장 한구석에서 종이 박스를 펴고 잠들고 낮에 편의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했어야 해도 그 삶을 선택했을지도….
현실을 살아내야 했다. 그것이 비록 얼마 안 되는 돈일지라도 나는 고정적으로 들어와야 하는 수입이 꼭 필요했다. 암세포를 겨우 이겨낸 아빠를 거슬러 싸우며 가난한 예술가의 길을 욕심낼 용기가 없었다. 어린 시절부터 남들 앞에서 노래하기를 좋아하고 학창 시절 당대 인기 있던 유행어로 친구들을 웃기는 게 마냥 즐겁고 행복했기에 배우가 되고 싶었던 나는, 나 자신 하나만을 믿고 내 꿈을 밀어 부칠 용기가 없었다.
세월이 흘러 업무적으로 뵈었던 모 기획사 대표님이 그러셨다. 어릴 적 꿈이 배우였다는 말에 한참을 보시더니, “OO 씨는 배우가 되기엔 자아가 너무 강해. 배우는 무대 위에서 자신을 버리고 새로운 자아를 입어야 하는데 그러기엔 너무 이성적이야… 그래서 열정과 용기가 더 있었어도 배우가 되기는 힘들었을 거야…”
나의 민낯을 들켜버린 듯했다. 내가 내려놓지 못하는 것들을 그분은 비즈니스 미팅 몇 번 만으로도 나를 파악했다. 그것이 인생의 연륜이란 것인가. 세상을 더 오래 살고 더 많은 경험을 한다는 것은 짧은 시간 안에도 한 사람의 인생을 이리도 깊게 들여다볼 수 있게 하는구나. 놀랐다. 내가 배우가 되지 못한 것은 어쩌면 ‘내 선택’이 아닌 ‘필연적 운명’일 수도 있겠구나, 생각했다.
그래서 나는 무대를 귀하게 여기지 않는 배우들을 매우, 아주 많이 싫어한다. 그 무대가 얼마나 귀한 자리인지 모르고 가벼운 마음으로 자신의 잘남에 취해, 영혼 없이 공연을 ‘해치우고’ 내려오는 배우들을 마음속 깊이 무시한다. 그들은 박수받을 가치가 없다. 누군가에게는 너무도 간절했던 꿈의 자리임을 모르는 것 같아 화가 난다. 반면, 아주 작은 배역도 최선을 다해 준비하고, 겸손한 마음으로 관객들에게 늘 감사한 마음을 갖는 이들은 언젠가는 꼭 빛을 볼 수 있게 되기를 바라며 진심으로 응원하고 기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