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주 수요일은 마티네(낮 공연)가 있는 날. 앙상블 막내 배우들 분장 콜타임이 공연 시작 4시간 전부터 시작된다. 그러니 아침 10시부터 배우 스태프들 오가는 소리에 분장실이 시끌시끌하다. 여느 다른 날과 변함없이 제작 조감독과 함께 컴퍼니 룸에 앉아 있었다. 그날 할 일과 필요한 문서들을 정리하는 중이었다.
속보가 떴다. 제주도로 수학여행을 가던 커다란 배가 바다에 빠졌다는 뉴스가. 조감독이 사는 동네의 학생들이었다. 안산 단원고등학교. 믿지 못했다. “에이, 설마... 타이타닉도 아니고 큰 배가 갑자기 그렇게 침몰한다고?” 그러다 한 시간 후 다시 뉴스가 떴다. 전원 다 구조가 되었단다. “와. 대박! 진짜 다행이네. 엄청 빨리 움직였나 봐. 부모님들만 괜히 식겁했겠다”
분장실에서 우린 이렇게 대화를 나누고 마음을 놓았다.
2014년 4월 16일, 탑승객 476명 중 사망/실종자 306명. 생존자 172명. 설렘 가득한 마음으로 여행길에 올랐다 유명을 달리한 소년소녀들의 소식을 그렇게 처음 접했다. 어떻게 그런 일이.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연일 육해공군을 총동원해 펼치는 구조 작업 관련 소식이 뉴스에 도배됐다. ‘안산올림픽기념관’에 설치된 임시 합동분향소 조문객이 나흘 만에 8만 명을 넘어섰다고 했다.
하지만 나는 끝내 공연장 출근을 핑계로 그 아이들에게 가보지 못했다. 과연 나는 단 하루의 시간도, 아니 반나절의 시간도 안산에 다녀올 만큼의 시간적 여유가 없던 것일까. 분명 일주일에 하루는 쉴 수 있는 시간이 있었다. 하지만 그 시간에 시체처럼 종일 집에 누워 있곤 했다. 깨어 있을 때는 업무 전화를 받았다. 집에서도 할 일은 늘 넘쳤다. 왜 그렇게 나에겐 여유가 없던 것일까. 그렇게까지 네 마음을 전하는 일에 무심하고 ‘어른의 도리’를 저버려야 할 만큼 급박하게 나를 필요로 하는 자리가 있었나 생각하면 딱히 그렇지도 않다. 내가 없어도, 나 아니어도 그 자리는 큰 무리 없이 채워졌을 거다.
그것이 오랜 시간 마음의 짐이 되고 있다. 아이들의 안타까운 죽음에 마음 아팠고, 그 아이들보다 세상을 더 오래 살아온 어른으로서 미안한 마음이 분명 있었지만, 나는 나의 그 무엇을 포기하고 양보해서라도 그들을 위하는 자리에 나서지 않았다. 부끄럽다.
벌써 세월호 사건이 8주기가 지났다. 그날의 진상은 여전히 밝혀지지 않은 채로, 마지막 인사도 없이 아이들을 떠나보낸 부모들의 마음을 향한 위로의 마음도 점점 식어가고 있다. 나 또한 그러한 무리 중 하나다. 단 한 번도 그들의 희생을 애도하며 적극적으로 움직인 바 없다. 당시에 공연장을 지켜야 한다는 핑계를 대며 내 상황을 합리화했던 것을 부인하고 싶다.
그 때문은 아니겠지만, 언제부턴가 청소년기 아이들에게 마음의 빚을 갖게 됐다. 어른으로서 내가 그 아이들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은 무언지, 대단하게 내세울 것 없는 지금의 나일지라도, 올바른 생각을 품고 자신의 꿈을 향해 나아가는 아이들에게 뭐라도 나눠주고 싶다. 적어도 나와 같은 길을 가려는 친구들에게만큼은 믿고 기댈 수 있는 따듯한 어른이 되어 주고 싶다.
강단에 서는 교수에 대한 꿈은 없지만 꿈을 좇는 이들의 곁에서 그들을 응원하고 넘어졌을 때 손잡아 일으켜 줄 수 있는 멘토와 같은 존재를 꿈꾼다. 그렇게라도 그날의 아이들에게 남아 있는 빚을 조금이라도 갚을 수 있다면 좋겠다. 이 또한 내 마음의 짐을 덜어보려는 이기적인 생각일 테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