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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타로김쌤 Jun 10. 2020

무엇이 그렇게 무서웠을까.

공황 발작, 아직 극복하지 못했어 #1

처음이었어.

비겁함이 그렇게 싫었나 보다. 그날은 사랑하는 와이프를 앞세워 부모님께 구걸을 하러 가던 날이었다.


 자금도 하나 없이 무일푼으로 시작한 사업이 조금씩 정상 가도를 달려 나가 싶더니만 다시 어려워지고, 그래도 할 수 있다고 이런저런 시도를 하던 어느 날. 미친 듯이 심장이 떨려오기 시작했다. 아무렇지 않게, 그저 긴장을 조금 더 하는 거라고 되뇌어 봐도 좀처럼 두근거림이 가라앉지 않았다. 하루가 가고, 또 하루가 가도 여전히 심하게 뛰고 있는 심장에게 왜 그래 왜 그래 혼자 되뇌어 물어봐도 대답은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세무서에서 누군가 날 찾아왔다. 역시나 미친 듯이 떨리는 심장. 세무조사였다.

이렇게 영세한 업장에서?

수십수백 가지의 의문이 나를, 아니 함께 일하는 와이프와, 사업장 주변의 모든 사람들을 뒤덮어도 누구도 의문을 해결해 주지 못했다. 그날 난 주체할 수 없는 두근거림을 와이프에게 고백했다.

나는 몰랐는데, 와이프는 알고 있었다.


자기 공황장애나 우울증 같아. 돈 때문에 스트레스를 너무 많이 받았나 봐. 병원에 한 번 가보는 것이 어때?
자기가 무너지면 우리 가족이 무너지는 거 알지?


사정이 어려웠다.

대학 졸업과 동시에 재무설계 자격증을 취득하고, 보험설계사 일을 꽤 오래 했던 나는 정신과 질환을 진단받고 나면 보험도 제대로 들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정신과 관련된 병원비는 금액도 부담스럽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 흔한 실비 보험조차 가입해둘 여력이 없는 상태로 정신과 진단을 받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세상 모든 것이 돈의 노예인 듯싶다.

아니, 적어도 나의 세상은 그랬다.

즐기기 위해서도 아니고, 단지 살아가기 위해서 죽을 둥 살 둥 노력하는데도 상황은 나아지질 않았다.

아무리 그랬어도 와이프의 말을 들었어야 했다.

난 의사의 말을 듣는 대신, 공황장애를 몇 년간 겪고 이제는 거의 해방이 된 지인에게서 몇 가지의 상비약을 얻었다.


세무조사는 그동안 시도했던 모든 것을 부정했다.

나는 불법을 밥 먹듯 저지르고,

이윤을 위해 매출을 누락하고,

세금을 덜 내기 위해 매입을 늘리는 꼼수를 쓰는 그런 사업자로 낙인찍혔다.

아니, 내가 나 스스로에게 그런 낙인을 찍었나 보다.


더 이상의 일을 할 수도 없었고, 어렵사리 관계를 성사시킨 거래처들도 끊어졌다.

세금은 감당할 수 없는 수준으로 매겨졌고, 매출을 부정당한 거래처에는 받은 만큼의 세금까지 모두 돌려줘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폐업을 선택하지 못한 것은 지금의 일 마저 없다면 살아갈 수 조차 없다는 어떤 오기인 듯 싶다.

거래처와의 거래가 끊어지니 매출도 턱없이 줄어들고, 그로 인해 여기저기 차용한 금액들 조차 상환하지 못해 금융채무불이행자, 즉 신용불량자가 되어버렸다.

사업장에 법원에서 빨간딱지를 붙이고 돌아갔다.

나는, 지인이 준 신경안정제를 입 속에 욱여넣을 수밖에 없었다.


그때라도 와이프의 말을 들었어야 했다. 아무리 돈이 아까워도, 그랬어야 했다.



집의 계약이 끝나 이사를 가야 했다. 갑작스레 사업장의 건물주가 사업장을 빼라고 요구해왔다. 사업은 어려워지고, 새로운 집과 새로운 사업장을 구해야 했다. 헤어 나올 수 없는 구덩이에 빠져드는 듯한 느낌들.

세상에 힘든 건 나뿐만이 아니란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누구나 자신의 앞에 놓인 시련이 가장 힘든 법이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참고 이겨내면 조금을 밝은 세상이 올 거라고 믿고 극복하며 살았는데, 현실은 아니었다. 그때쯤이었던가. 처음 죽음이라는 것을 생각했다. 하지만 극단적인 선택도 할 수 없었던 것은, 내가 죽고 난 뒤에도 문제를 해결할 보험금 조차 아직 남기지 못했다는 현실 때문이었다.

사랑하는 와이프와,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일곱 살배기 아들이 나를 살린 첫날이었다.


친형은 벌써 일 년 반의 기간 동안 암투병을 하고 있었다. 아버지의 일을 도우며, 몇 해 지나면 아버지의 사업장을 물려받을 수 있을 거라던 형은 생존율이 5%도 되지 않는다는 원격전이 케이스의 대장암 4기였다.

어려웠던 시기를 이겨내고, 공장 부지를 구입해 작은 공장을 세우고, 사업이 조금씩 나아지던 부모님이 나를 신경 쓰지 못했던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몰랐다.

생명이 위급한 큰아들을 돌봐야 하니까.

일도 제대로 할 수 없는 큰아들의 가족들은 전적으로 부모님께 의지해 삶을 살고 있었다. 죽을 것 같이 힘들고, 가끔은 아무런 도움도 주지 못하는 부모님을 원망하기도 하면서 아무 말 못 했던 것은 부모님의 그런 상황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내가 이야기해볼게. 자기는 뒤에서 가만히 있어.

   

우리 부부는 안 그래도 힘겨운 부모님에게 구걸을 하러 갔다. 그리고 난 비겁하게 와이프의 뒤에 숨어버렸다. 그게 그렇게도 싫었던 걸까. 사정사정을 하는 와이프를 앞에 두고 못난 심장이 미친 듯이 뛰고 있었다. 티 내지 않으려 그렇게 애를 썼건만, 숨길 수 없었나 보다.

와이프는 나를 밖으로 내보냈다. 때마침 지인에게 받은 약도 챙겨 오지 못했다. 공장을 서성이다가 차로 들어갔다.

가만히 심장을 다독이는데, 온몸이 떨려왔다. 눈물이 났다. 무엇이 그렇게 무서웠을까.. 입을 틀어막아도 비명소리가 났다. 오분.. 십분.. 그렇게 아무도 모르게 세상이 주는 공포를 처음 맞이했다. 잠시 떨림이 멈추었을 때, 그때 밖으로 나왔어야 했다. 무엇이라도 했어야 했다. 하지만 그러지 못했다. 안에서는 아직도 힘들게 와이프가 이야기를 하고 있을 테고, 발작이 멈췄어도 난 아직 비겁한 남편이자 아들이었으니까.

그런 생각이 들어서였을까.. 다시 온몸이 떨려왔다. 심장이 터질 것 같고, 눈에서는 주체할 수 없는 눈물이 흘렀다. 온몸을 쭈그린 채 입에서 터져 나오는 비명을 떨리는 손으로 틀어막으며 두 번째 발작을 맞이했다. 무서웠다. 주변에 아무도 없는데, 그저 무서웠다. 아니다. 무서움이라는 감정조차도 느껴지지 않았다. 죽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들지 않았다. 그저 내 의지로 주체할 수 없는 발작이 힘들었을 뿐이었다.


니가 한 게 뭐가 있냐. 비겁하게 숨어서 기다리고 있으면서 이렇게 벌벌 떨고 있냐. 하는 것도 없으면 이딴 발작도 참아야지, 그것도 못 참고 소리 지르고 있냐.


나는 나 스스로에게 그렇게 이야기했다. 내 몸 따위는 중요하지 않다고. 안에서 속상하게 이야기하고 있을 와이프를 생각하면 이럴 자격도 없다고. 지금도 그렇지만, 그때의 나는 나를 그렇게 몰아세우고 있었다.

두 번째 발작이 끝나고, 차에서 나와 차가운 공기를 들이마셨다. 아무도 몰랐다는 것이 다행이라는 생각을 했다. 평생을 살아오며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한 상황을 3~40분 동안 두 번이나 겪었는데, 그마저 아무도 몰랐으니 나만의 비밀로 간직하려고 했다.

그때, 다시 온몸이 떨려왔다. 눈물이 나오려고 했다. 급하게 급하게 차로 달려갔다. 다른 생각은 없었다. 그저 나 혼자만 끙끙되면 된다는 생각에 혼자만의 공간으로 달려갔을 뿐이었다. 또다시 찾아온 미친듯한 떨림. 온몸을 펴지도 못하고 두 손으로는 비명을 주체하지 못하는 미련한 입을 틀어막으면서, 세 번째 발작을 맞이했다.

혼자만 알고 있었으면 하는 그 정도 바람도 하늘은 이루어 주지 않았다. 때마침 와이프와 부모님이 밖으로 나왔고, 누구에게도 보여주기 싫은 모습을 보고 말았다.

다급하게 나를 끌어안고 달래주려는 사람들. 그 와중에도 멈추지 않는 떨림과 비명. 나는 그저 힘 없이 자기감정을 주체하지 못하는 하나의 동물에 불과했다.


무엇이 그렇게 무서웠던 것일까.

비겁함? 돈? 가족의 시선? 세상의 원망?

모르겠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지금은 이렇게 시작된 발작이 다시 일어나는 것이 더없이 무섭다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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