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나절 아이들이 방에 들어가 노는 동안 짬을 내 라구소스를 만들었다. 라구소스는 파스타에 얹어 먹는 이탈리아 전통 고기 소스라고 하는데, 홀 토마토와 토마토 페이스트, 각종 채소와 고기를 넣고 약한 불에 오랫동안 끓여 만든다. 오래 정성을 들여 뭉근하게 끓여내는 음식. 그런 게 만들고 싶었다.
우선 마늘을 세 주먹 정도 양껏 집어내 씻고 다지고, 다용도실 선반 위에서 양파를 꺼냈다. 너무 오래 한자리에 있었는지 양파에는 푹 자고 일어난 얼굴의 베개 자국처럼 그물 자국이 그대로 나 있었다. 속은 겹겹이 문드러져 손을 대면 바로 액체가 되는 것 같기도 했다. 성한 부분을 그러모아 간신히 두 개 정도의 분량을 만들어 역시 다져두었다. 다음은 당근. 서랍 구석에서 쓰다 남은 당근을 넣어 둔 봉지가 세 개나 발견됐다. 역시 성한 부분만 잘 모아 다지기 시작했다.
집에는 ‘다지기’ 용도로 쓰이는 도구가 여럿 있다. 세워 두고 윙 돌리는 분쇄기, 도깨비방망이 같은 핸드믹서, 거창한 만큼 기능도 다양한 푸드프로세서, 줄을 잡아당기면 칼날이 돌아가며 다져주는 초퍼까지. 부엌일 어지간히 귀찮아하는 내 충동구매의 역사랄까. 모두 졸음을 참아가며 이유식 만들던 때 부지런히 사들인 것들이지만, 두어 번 사용 후 찬장 속 깊이 들어가게 되었다. 도구를 사용해 다진 것으로 음식을 만들면 이상하게 맛이 나지 않았다. 삐죽삐죽하고 균일하지 않은 조각들은 보기에도 별로였다. 가뜩이나 솜씨도 없는데 보기에도 먹기에도 맛이 떨어지니 더 사용할 이유가 없었다.
소스를 만들기 전에 찾아본 블로그에 이런 글이 있었다.
다질 때는 팔이 좀 아파도 손으로 다지세요. 믹서로 하면 물기가 많이 생겨 맛이 없어요
어차피 다 넣고 끓여서 형태가중요하지 않은 음식인데도 손으로 다지는 게 좋다니. 역시 과정의 수고로움과 결과의 만족도는 정비례하는 게 맞는 건가.
마지막으로 가지고 있던 재료 중 가장 싱싱한 셀러리를 다지고 마늘과 양파부터 순서대로 올리브유에 볶기 시작했다. 채소들은 각자의 향을 마음껏 발산하며 차츰 부드러워지고 투명해졌다. 웬만큼 볶아졌을 때 고기를 넣고 볶다가 와인(언제 개봉했는지 기억도 안 나는 병을 다용도실 구석에서 발굴)도 조금 붓고 지글지글 알코올을 날렸다. 모르긴 몰라도 남은 식재료들을 한 번에 털어버릴 수 있는 음식인 건 확실했다. 마지막으로 홀토마토와 토마토 페이스트, 물을 적당량 넣고 약한 불에 끓이기 시작했다. 눌어붙지 않게 가끔 가서 저어주며 끓인 지 네 시간쯤 되니 집 전체에 고소하고 깊은 토마토소스 향이 낮게 깔려 있었다.
놀랄 만큼 뛰어난 재주는 없지만 앉아서 손으로 하는 일이라면 어느 정도 흉내는 낸다. 덕분에 그림 그리기, 뜨개질, 북 바인딩, 글쓰기 등 시간이 갈수록 자잘한 취미는 늘었지만 한 분야에 전문가는 아니라는 생각에 늘 뒷맛이 씁쓸했다. 전공을 살려 일을 하고 자격증을 따도 항상 조심스럽고 자신이 없는 건 내안의 문제일 것이다. 냉장고 구석에서 말라가던 당근을 넣었어도, 물이 되어가던 양파를 넣었어도 라구소스는 맛이 기가 막혔다. 하다 멈춘 공부나 계속 집적거리는 취미들도 이렇게 오랜 시간 뭉근하게 끓이면 맛을 내게 될까. 힘들어도 손으로 직접 다진 재료의 맛이 더 좋듯, 꼼수 부리지 않고 성실하게 익히면더 만족스러운 결과로 돌아오게 될까. 완성된 소스를 뒤적이며 한참을 들여다보아도 재료의 원래 상태는 찾아볼 수 없었다. 원래부터 그렇게 섞여 있던 것처럼 어우러져 완성된 맛을 품고 있었다.
한 김 식힌 소스를 통에 담아 동네 친구에게 나눠주었다.
“언니 진짜 너무 맛있네요. 이걸 맛없단 사람이 있을까?” 친구의 문자에 씨익 웃음이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