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네 책방의 그림 모임에 갔을 때의 일이다.
모임에는 다양한 배경의 사람들이 참여하는데, 그중에는 미술 전공 중인 학생 B도 있다. 내가 선생님의 도움을 받아 겨우 밑그림의 형태를 잡고 있노라면 삭삭 빠른 속도로 거침없이 종이 위를 달리는 색연필 소리가 들리고 B의 앞에는 이내 어느 전시회장 벽에 걸려있을 법한 그림이 완성되곤 한다. 과연 전공자는 다르다는 걸 코앞에서 느끼는 시간. 창작자로 사는 이야기를 하다 선생님이 물었다.
“B 님은 앞으로 어떤 걸 하고 싶으세요?”
“잘 모르겠어요. 일단 배우고 있는 건 몇 가지 있는데…”
짧은 침묵으로 이어지는 B의 말끝 언저리에 망설임이 진하게 묻어났다. B는 다른 사람들의 작품을 보면 자기 실력이 모자라 보여서 SNS도 즐겨하지 않고, 뭔가를 본격적으로 하기에는 부족한 점이 많아 이것저것 배우는 중이라고 했다. 저런 심각한 그림 솜씨를 가지고 있는데도 부족하다고 생각하는구나. 의아했지만 B가 하는 말들은 낯설지 않았다. 나 역시 그랬으니까.
시작은 언제나 두렵다. 낯선 곳에서 낯선 사람을 만나는 것이 떨리고 긴장되어 시작하기 전에 가능한 많은 것을 준비하려고 한다. 가령 유명한 맛집을 처음 찾아간다고 하면, 가기로 한 며칠 전부터 나는 검색을 시작한다. 가는 길은 어떤지, 시간은 얼마나 걸리는지, 몇 번 출구로 나와 무엇으로 갈아타야 하는지, 어느 쪽으로 가면 되는지 알아보고 로드 뷰를 보고 후기도 읽는다. 잊을 만하면 한 번씩 검색 결과를 확인하고 다시 검색해 보기를 반복하다 디데이에는 마침내 그 집의 주력 메뉴와 계절 메뉴까지 외울 정도가 된다. 하도 많이 봐서 이미 여러 번 다녀온 것 같은 착각이 들 때쯤 첫 방문을 하는 것이다.
시작에 대한 불안과 두려움이 가장 높아지는 건 지원서를 쓸 때다. 자기 검열을 하며 각종 서류와 자격증들을 첨부하고도 ‘내가 할 수 있을까?’, ‘좀 더 공부하고 준비가 되면 하는 게 낫지 않을까’ 하며 망설이느라 발송 버튼을 누르지 못한다. 혹시라도 일하게 되면 겪게 될지 모르는 상황들이 줄줄이 떠올라 발목을, 아니 손목을 더욱 거세게 잡는다. 아직 누가 같이 일하자고 한 것도 아닌데 전송 버튼을 앞에 두고 망설이는 모습이 흡사 끓이기도 전부터 ‘저 김칫국을 내가 잘 먹을 수 있을까?’ 걱정하는 꼴이다. 누가 준다고 한 적도 없는데.
이런 내가 지난해 문득 독립출판이라는 걸 하게 됐다. SNS에서 우연히 한 독립서점의 <책 처음부터 끝까지 만들어보기> 워크숍 공고를 보고 뭐에 씐 것처럼 DM을 보내고 말았다. 평생 내 사전에 ‘즉흥적’이라는 단어는 오르지 않을 줄 알았는데. 낯선 책방에 찾아가 처음 보는 사람들과 한 공간에 앉아 전혀 모르는 분야에 대해 강의를 듣는다니. 내가 이걸 왜 신청했지. 어쩌자고 그런 거지. 이미 입금을 하고 확인 문자까지 받았지만 첫 수업 날까지도 나는 환불 규정을 읽으며 망설였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한번 시작을 하니 시간은 어김없이 흘렀고 워크숍이 진행되는 5주 동안 웬일인지 놀랄만한 성실함을 발휘하여 강의 마지막 날 나는 정말 책을 손에 쥐게 됐다. 먹고 난 그릇에 남은 밥풀을 그러모으듯 모은 글과 그림이 책이 되어 나온 모양이 신기해 몇 번을 들었다 놨다 하고 쓰다듬었는지 모른다.
책 만들기 모임 이후 내 몸은 난데없는 시작도 해볼 만하다는 걸 꽤 학습한 모양이다. 책을 만들다 보니 글을 잘 쓰고 싶어 졌고, 혼자 쓰기에는 추진력이 부족해 글쓰기 모임에 들었다. 한번 구르기 시작한 눈덩이는 ‘시도’라는 이름표를 달고 언덕을 내려가며 그림 그리기, 북 바인딩, 우쿨렐레 등 다양한 크기의 눈 뭉치를 붙여가며 점점 더 커지고 있다. 덩치가 커질수록 점점 가속이 붙어 망설이는 시간도 짧아진다. 일단 붙고 보자, 한번 해보자, 하면서 척척 달라붙어 데굴데굴 굴러간다.
얼마 전에 들은 팟캐스트에서 “어떻게 하면 앞서 나갈 수 있나요?”라는 질문에 코미디언 김숙 씨는 이렇게 대답했다. “뭐든 해라. 이것저것 많이 좋아하고 많이 느껴보고, 그러다 보면 얻어걸리고 앞서 나갈 수도 있는 거 아이가! 봐라, 신발 던지기 게임을 해도 바구니가 하나밖에 없는 것보다 여러 개 있으면 들어갈 확률이 높아지는 기다!”
아직 해 보지 않은 수많은 시작 앞에서, 조금 덜 갖춰진 상태로 있어 보기로 한다.
어쩌면 이제 알기 때문이다. 어떤 일에도 완벽한 준비란 없고, 내가 준비한 범위 안에서만 흘러가는 일도 없다는 걸. 어떤 일은 무턱대고 시작해야 하며 다른 일은 그 자체로 힘을 받아 저절로 굴러가기도 한다는 걸.
꼭 앞서 나가겠다는 목표를 가지고 신발을 던질 필요도 없다. 그저 신발 한 짝 들어갈 바구니 하나 더 마련하는 정도의 일이라고 생각한다면, 그토록 유난스러운 마음의 준비도 버릴 수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