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 블루와 자가격리에 대한 백지님 보상 및 위로안

by 숨님

201224
사랑과 용서와 화해의 날, 크리스마스.
나는 원망과 저주로 부글거리고 있다.

코로나 사태가 장기화하면서 어린이 둘과 집에 갇힌 지 한 달이 넘었다. 올해만 벌써 몇 번째 격리인지 모르겠다. 학교도, 학원도, 어린이집도 모두 중단 상태. 어린이 둘은 서로 잘 놀고, 각자도 잘 놀았지만, 나는 점점 웃음을 잃었고 길 건너 엄마 집에 들르는 날이 많아졌다. 여름이고 겨울이고 매일 왕복 네 시간 출퇴근을 한 남편은 연말 즈음 휴가를 몰아서 쓰기로 했었다. 어차피 올해 안에 소진해야 할 휴가들이었다. 그래, 아빠가 있으면 단 몇 분이나마 혼자 산책할 수 있겠다, 아니면 셋이 나갔다 오라고 하고 집에 혼자 있을까? 동네서점도 한 번씩 갔다 올 수 있겠다. 어서 와라 휴가. 어서 와라 연말. 길고 긴 하루하루를 남편의 휴가 개시일만 기다리며 버티고 넘겼다.

휴가 첫날. 남편은 재택근무 수준으로 일을 했다. 나는 집에 있었다.
휴가 둘째 날. 남편은 잠깐 미팅만 하고 오겠다며 오후 반나절 나갔다 왔다. 나는 집에 있었다.
휴가 셋째 날. 아침에 남편이 눈을 질끈 감으며 메일을 보여줬다. 어제 만난 고객사 직원이 코로나 확진을 받았으니 미팅에 참여한 사람은 보건소 가서 검사를 받으란다. 남편은 보건소에 다녀왔다. 나는 집에 있었다.
휴가 넷째 날. 남편의 검사 결과는 음성이었다. 하지만 밀접접촉자로 분류돼 2주간 자가격리하란다. 나는 집에 있었다.

나는
지난 일 년 동안
거의
집에 있었다.

경기도는 유초중고 모두 내년 2월 말까지 전면 원격수업을 하기로 결정했다. 말인즉슨, 적어도 내년 2월까지 나는 어린이들과 함께 집에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눈을 뜨면 자가진단 앱에 접속해 의미 없는 ‘아니오’를 누르고, 밴드에 출석 체크를 하고, 밥을 차려 먹이고 이 닦아라 똑바로 앉아라 고개 들어라 선생님 말씀하시잖니 집중해라 잔소리를 두 시간 정도 하다가 다시 점심을 준비하고 치우고 설거지를 해야 한다는 말이다. 어린이들이 지루해하면 지루해하는대로 마음 불편하고, 놀면 노는대로 소음에 시달려야 한다는 뜻이다. 종일 망설임과 불안, 분노와 무기력 사이를 오가다 밤이면 자책하고 후회하고 다짐하는 날이 계속될 거라는 말이다.

나에겐 남편의 휴가 2주가 절실했다.

하루 전에 검사를 받아놓고는 결과가 나오기 전에 미팅한답시고 나왔던 그분을 원망하고 저주하고 싶다. 하지만 얼굴도 모르는 사람이다. 아무리 증상이 없다지만 확진 받았다고 하니 마음 놓고 욕도 못 하겠다. 내 원망과 분노와 사나운 눈초리가 갈 곳은 저기 저 방에 혼자 격리돼 있는 남편밖에 없다. 시도 때도 없이 눈물을 흘리며 울화통 터져 하는 나를 본 남편은 처음엔 좀 어이없어 하는 눈치였다. 그러다 안 되겠다 싶었는지 기안을 하나 써 왔다. 기안 문서의 제목은 [코로나 블루와 자가격리에 대한 백지님 보상 및 위로안] . 안에는 ‘그렇지 않아도 힘든 코로나 블루 상황에서 가졌던 기대와 계획이 수포로 돌아가면서 큰 상대적 박탈감에 빠져 좌절과 분노 증상을 보이는’ 나에 대한 아주 구체적인 보상과 위로 대책이 빼곡히 적혀 있었다. 나는 또 찔끔거리는 눈물을 훔치며 기안을 검토하고 결재란에 사인해 주었다.

두고 본다. 진짜 두고 볼 거다.






덧) 기안 제출 4시간 후, 남편은 격리된 방 안에서 대낮에 쿨쿨 잠든 채로 발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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