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이걸 왜 샀을까 1

자비 없는 이발기와 함께 한 하루

by 숨님

작년 크리스마스 즈음의 일이다. 일일 추가 확진자 수가 매일 천 명을 웃돌아 외식을 하거나 장을 보는 일이 일종의 도전같이 생각되던 때였다. 베란다에는 돼지고기며 어묵, 라면이 담겨온 택배 상자가 쌓여 점점 웅장한 성의 모양새가 되어가고 있었고, 몇 달째 미용실에 가지 못한 남편과 두 아들의 머리는 버려진 정원의 잔디처럼 자라 있었다. 새카만 머리카락이 빽빽하게 뒤덮은 남편의 옆모습을 볼 때마다 언젠가 자연사박물관에서 본 인류의 진화과정 모형이 떠올랐다.

그렇게 나의 이발기 쇼핑이 시작되었다. 평소 손재주가 좋다는 얘기를 듣는 편이었고, 아직 미용실에 가기는 너무 두려웠기에 ‘셀프’의 길을 택하기로 했다. 귀 위쪽과 목덜미 쪽만 조금 다듬으면 미용실에 가는 시기를 더 늦출 수 있을 것이었다. 유튜브를 열어 적당한 검색어를 입력하자 대번에 ‘절대 망하지 않는 남자아이 셀프 헤어컷’, ‘10분 만에 깎는 남자아이 기본커트’ 같은 영상이 주르륵 걸려 올라왔다. 영상은 따라 해 볼 만해 보였다. 댓글 창에는 국내외 여러 곳에서 전해진 셀프 이발 성공담이 수십 개 달려 있었다. 나는 며칠 동안 이발 영상을 보며 이미지 트레이닝을 한 뒤 클리퍼(바리캉)라고 불리는 이발기 하나와 미용가위 세트, 커트보를 구입했다.

이발기의 날은 생각보다 더 날카롭고 살벌해 보였다. 위이이잉하고 움직이는 칼날을 보고 있자니 깔끔하고 부드러운 셀프 컷 이미지는 연기처럼 흩어지고 어느 시트콤에서 본 듯한 장면이 자꾸 떠올랐다. 미용사가 한눈을 파는 바람에 머리 한가운데에 고속도로를 내놓자 난처한 표정으로 거울을 보던 남자. 선명하게 구획이 나뉜 머리를 바라보는 남자는 울면서 웃고 있었다. 나는 곧 그 미용사가 될지도 모를 운명이었다.

아이들은 어린이집에도 가야하고, 학교도 가야 하니 남편의 머리를 먼저 해 보기로 했다. 다랑이논처럼 길이 난 머리를 하고 지하철을 타고 출근하는 남편을 상상하며 이발기를 들었다 놓았다 하는 나에 비해 남편은 침착했다. 남편은 “망치면 그때 미용실에 가면 되죠. 뭐. 머리는 다시 자라요.”하면서 작은 의자를 화장실에 갖다 놓고 낑낑대며 어린이용 커트보를 뒤집어썼다. 분무기로 남편의 머리에 물을 뿌려 빗은 뒤 머뭇거리며 이발기의 전원을 올렸다. 이발기는 망설임이 없었다. 예리한 날은 남편의 뒷머리에 닿자마자 사삭사삭 소리를 내며 자비 없이 베기 시작했고, 나는 분명히 보았다. 이발기 소리와 함께 움찔하던 남편의 어깨를.


하는 사람과 받는 사람 모두 움찔거리며 유야무야 마무리된 그 날의 이발은 이발기 SBC-732의 처음이자 마지막 활동이 되고 말았다. 미용가위 세트와 커트보도 함께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남편은 일주일 후 미용실을 예약했고, 미용사는 남편의 머리를 이리저리 보고 갸웃거리다 자초지종을 듣고는 씩 웃으며 나를 위로했다. “남편분 머리가 쉽지 않은 머리예요. 이 정도면 잘하셨네.” 선생님, 사람마다 할 수 있는 일이 따로 있는 거였어요. 남의 머리를 건드리는 것이 이렇게나 큰 용기가 필요한 일이었군요. 나는 한동안 미용실 거울 옆에 서서 빠르고 정확하게 움직이는 미용사의 손을 지켜보았다. 두 손을 모으고 선 나는 이보다 더 공손할 수 없는 자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