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 기억

by 숨님

내가 특별히 좋아하는 어릴 적 사진이 있다. 채도 낮은 에메랄드빛 현관문이 활짝 열려 있는 아파트 복도에서 찍은 사진이다. 동생과 나는 둘 다 치렁치렁 긴 머리를 높이 올려 양옆으로 묶고 남색 민소매 원피스를 입고 있다. 동생은 문밖에 나가 한 손은 허리에 착 올리고 한 손은 위로 들어 춤추는 듯한 포즈를 취하고 있고, 나는 현관 벽에 기대어 몸을 반만 밖으로 내밀고 있다. 사진 하단에 찍힌 날짜는 91년 8월 19일. 아빠의 휴가에 맞추어 설악산으로 여행 갔을 때 찍은 사진을 인화하기 전, 남은 필름 몇 장을 마저 쓰기 위해 엄마가 집에서 카메라를 꺼낸 날이었다고 한다. 아무 날도 아닌데 사진을 찍는 게 특별하게 느껴졌는지 분홍색 슬리퍼를 신은 우리는 재미있어 죽겠다는 표정이다.


뭐든 쉽게 잊어버리는 나는 사진으로 기억을 되살리곤 한다. 좁은 집 안팎으로 가득했던 뜨거운 햇볕, 동생과 마주 앉아 막바지 방학 숙제를 해치우던 낮은 책상, 베란다로 넘어오는 매미 소리. 집집마다 선풍기 한 대와 플라스틱 살에 모델하우스 광고지를 바른 부채가 흔한 냉방기구이던 때였다. 엄마는 아파트 복도에 오가는 사람이 없는 때를 골라 현관문을 활짝 열고 다리가 짧은 좌식 책상을 현관 앞으로 가져다 놓았다. 파다다닥 소리를 내며 돌아가는 파란 날개 선풍기를 한편에 놓고 베란다 창을 열어두면 맞바람이 불어 현관 앞은 세상에서 제일 시원한 자리가 되었고, 우리는 수박을 먹으며 ebs 라디오에서 나오는 성우들의 목소리에 함빡 빠져들곤 했다. <어린이 탐구생활> 책에 나온 ‘여름 과일의 씨를 관찰해 보아요’라는 문제 아래에 미리 말려 두었던 복숭아씨며 수박씨, 포도씨, 참외씨 같은 것들을 붙였다. 책장을 덮으니 책이 수북하게 부풀어 올랐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에세이집 <저녁 무렵에 면도하기>에서 십 대 후반의 풋풋한 사랑에 대해 이야기하며 ‘감정의 기억’이라는 단어를 언급한다. 모든 일이 신선하고 감동으로 가득한 날들은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가 버리지만, 기억만큼은 신선하게 머물러 우리의 남은 인생을 덥혀준다는 것이다. 나에게 여름은 민소매 원피스와 두꺼워진 방학 숙제, 선풍기 바람에 날리는 이마의 잔머리, 수박 국물 같은 것들이다. 91년 8월의 어느 날, 다른 날과 다를 바 없던 하루가 한 장의 사진으로 남아 삼십 년 후의 나를 미소짓게 한다. 선명하고 또렷한 여름의 기운 덕에 가능한 일이기도 하다.


올해 나의 아이들은 사진 속 나와 같은 나이가 되었다. 나는 우리 엄마가 그랬던 것처럼 바람 잘 드는 창가에 낮은 상을 펼치고 수박을 자른다. 수박을 먹는 아이들의 팔을 타고 투명하고 빨간 방울이 흘러 팔꿈치에 맺힌다. 얼른 팔에 수건을 갖다 대줄 때 나는 마흔 살의 엄마인 동시에 열 살 소녀가 된다. 그래, 수박을 먹으면 팔을 타고 국물이 흐르지. 나도 그랬어. 다 먹으면 슬리퍼 신고 밖에 나가보자. 매미가 나왔을지도 몰라. 나는 91년의 우리 엄마처럼 카메라를 든다. 엄마가 사진 찍어줄게. 금세 지나가 버릴 너희의 어린 여름을 내가 신선하게 붙잡아 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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