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디스 커, <누가 상상이나 할까요?>
“통화할 땐 하하호호 그렇~게 떠들더니, 나랑만 있으면 졸리고 할 말도 없고 그래?” 한바탕 쏘아붙이고 난 뒤, 우리 사이엔 정적이 흘렀다. 남편은 침대에 누운 채, 나는 화장대 의자에 앉은 채였다. 만나는 사람이 많고 일도 많은 남편은 거의 하루 종일 전화를 붙잡고 있다. 한 번 통화를 시작하면 기본이 한 시간. 옆에 있자면 일방적으로 들리는 목소리에 머리가 아프고 진이 빠진다. 그날 저녁에도 남편은 40여 분 간 이어진 첫 통화를 마치자마자 다른 이에게 전화를 걸었다. 다시 시작된 통화는 한 시간이 지나도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고, 나는 청소기를 밀면서 남편의 발뒤꿈치를 쫓아다니다가, 못마땅한 눈으로 시계와 남편 얼굴을 번갈아 보다가, 입모양으로 연신 험한 말을 만들어냈다. 가급적이면 통화할 일을 만들지 않고 친한 친구와도 좀처럼 길게 통화하지 않는 나로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미간에 주름을 잡고 십 분 넘게 온갖 싫은 소리를 늘어놓는데, 앞에서 남편은 자꾸 깜박깜박 졸았다. 감은 눈꺼풀 아래로 눈알이 빠르게 좌우로 흔들리는 게 보였다. 아주 잘 한다. 뚫어져라 쳐다보는 내 시선이 느껴졌는지 남편이 눈을 떴다. 게슴츠레한 눈 위로 갑자기 생겨난 쌍꺼풀이 서너 줄 흘렀다. “왜 또 그렇게 보고 있어요…” 왜 보겠어요. 이기려고 보지. 적당히 좀 하라고. 다시 한번 소리치려 숨을 들이마시는데 그 사이 남편의 눈은 또 감겨 있었다. 나는 멈칫했다. 요 며칠 자주 머리가 아프다, 피곤하다 하더니 혹시 어디 진짜로 아픈 건 아닐까. 만에 하나 잘못되기라도 하면, 이게 저 사람을 향한 내 마지막 말이면 어떡하지. 원망과 걱정이 뒤섞인 채로는 싸움이 될 리 없다. 게다가 한쪽이 램수면 상태여서는.
잠든 게 못내 얄미워 불은 끄지 않고 일부러 발소리를 내며 거실로 나와 책을 들었다. 처음 본 순간부터 지금까지 한 번도 좋아하지 않은 적이 없었던 주디스 커가 그린 할머니 할아버지. 이 세상을 떠나 하늘에 사는 남편 헨리를 만난 할머니의 얼굴이 환하다. 볼에는 붉은 기가 돌고 입꼬리는 내내 올라간 채다. 두 사람은 사자와 놀고, 스핑크스와 수다를 떨고, 수상스키를 즐긴다. 매일 오후, 혼자 남은 할머니는 꿈에서 남편과 만나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아쉬운 이별을 한다. 두 사람은 나란히 구름 위에 앉아 어깨에 기댄 채 함께 지나 온 시간을 떠올린다. 결혼을 하고, 아이들을 낳아 키우고, 함께 정원을 가꾸고, 나란히 소파에 앉아 텔레비전을 보던 옛날 기억을 떠올리면서 했던 얘기를 하고, 또 하고….
이 책을 읽으며 남편 생각을 하지 않기는 어렵다. 껴안고 하늘로 둥실 오르는 것 같은 할머니 할아버지의 얼굴을 한참 바라보았다. 두 사람의 눈빛이, 살짝 부푼 볼이, 꼭 잡은 손이 이렇게 말하는 것 같다. 나는 당신을 의지해요, 당신을 만나 행복해요, 당신도 행복하세요, 고마워요. 저쪽 방에서 코끼리 떼가 이동하는 것 같은 코 고는 소리가 울려온다. 환한 방에서 이불을 머리 끝까지 뒤집어쓰고 전투적으로 자고 있는 남편을 잠시 바라보다가 조용히 불을 끄고 문을 닫아 주었다. 어째 해가 갈수록 싸움이 싱거워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