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린 로브라 비탈리, 마리옹 뒤발, <앙통의 완벽한 수박밭>
도둑맞은 그 수박은 다른 수박들보다 훨씬 더 탐스러웠을 것이다.
크고 먹음직스러운 데다 한 입 물면 아삭하면서 달콤했을 테고.
분명 어떤 수박보다 완벽했을 것이다.
얼마 전, 일 년 남짓 일하던 곳에서 재계약이 어렵게 되었다는 연락을 받았다. 결혼과 출산, 육아로 이어진 기나긴 경력 단절의 터널에서 나올 수 있게 해 준 곳이었다. 처음에는 그런가보다 싶었다. 코로나가 길어지면서 센터를 찾는 사람이 많이 줄어든 것도 사실이다. 나 역시 다른 일로 바빠 적극적으로 일을 늘리려는 노력을 하지 않기도 했다. 케이스가 없는 동안 오히려 시간을 벌었다며 신나게 다른 일들을 하고 돌아다닌 것도 나였다. 이름을 걸어 놓은 이상 나는 소속이 있는 사람이었다. 그저 일이 없을 뿐.
아무렇지 않았던 기분은 시간이 지날수록 차츰 가라앉아, 저녁 무렵이 되자 나는 세상 쓸모없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눈을 내리깔고 일없이 휴대폰 액정을 쓸어 올렸다 내렸다 하는 나를 보고 남편은 말했다. “이제 전직이네, 전직! 이왕 이렇게 된 거 그동안 시간에 쫓겨 못하던 것들 더 해 봐요. 만날 시간 없다고 하지 말고.” 전직이라니. 사실 뒤 문장은 제대로 듣지 못했다. 전직이라니.
유능한 상담사가 되고 싶었다. 나이가 들고 연륜이 생길수록 말 한마디 한마디에 진심을 담을 수 있는, 따뜻한 마음을 바탕으로 가진 기술을 사용하여 실질적인 결과를 이끌어내는, 누군가의 삶에 잠시 들어가 손잡고 걸어줄 수 있는 그런 상담사로 늙고 싶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그 밤, 모든 것이 원점으로 돌아간 것 같았다. 잃어버린 타이틀 하나가 너무 커서 그걸 뺀 다른 모든 것은 작고 하찮아 보였다. 어떻게든 이 길을 계속 가 보겠다고 비집고 들어갔는데 간신히 올라서 있던 벼랑 끝이 와르르, 딱 내 발만큼 무너져 내린 것 같았다. 내가 끌어안고 있다 빼앗겨 버린 수박은 다른 것보다 훨씬 더 달고 맛있었을 것이 분명했다.
다음 날 아침, 앙통은 엉망이 된 수박밭을 바라보았다.
끔찍한 일이 벌어졌지만 이상하게 수박은 더 싱싱해 보였다.
정말 놀라운 건 도둑맞은 수박의 빈 자리가 더 이상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엉망이 된 수박밭을 바라보는 앙통의 옆얼굴에 엷은 미소가 번져 있다. 정성을 들이던 것을 잃어버린 후 슬픔과 분노, 공허감에 몸부림치고 불안에 겨운 밤을 보내던 앙통은 난장판이 된 수박밭 앞에서 오히려 편안해 보인다. 더 이상 잃지 않으려고, 도둑맞지 않으려고 졸음을 참아가며 애쓰던 밤은 이제 끝났다.
슬쩍 앙통의 옆에 서 보았다. 갈아엎어진 나의 커리어 밭 여기저기에 아직 탐스러운 수박들이 넝쿨째 굴러다니고 있었다. 어떤 것은 잃어버린 수박과 다름없어 보이고, 처음 보는 듯 생소한 생김새를 가진 수박도, 아직 작지만 좀 더 공을 들이면 먹음직스럽게 큼직해질 듯한 수박도 보인다. 나의 사랑, 나의 정성, 나의 과잉과 결핍을 담은 수박밭. 엉망이 되어버린 수박밭. 빈자리가 보이지 않으니 한결 받아들이기 쉽다. 더할 나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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