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는 미룰 수 없어. 이제 시작하자. 12월 어느 흐린 날 아침, 작은방 벽장 앞에 서서 호흡을 가다듬었다. 이 문 앞에 서기까지 몇 주의 게으름과 며칠의 못 본 척이 필요했는데, 드디어 몇 분 전의 충동으로 손잡이를 잡은 터였다. 문이 열리는 순간 우르르 쏟아질지도 몰라. 손잡이를 살짝 잡아당기는 동시에 반 발짝 옆으로 비켜섰다. 오랜만에 활짝 열린 벽장 안은 구석구석 빛 들어갈 틈도 없이 차 있었다. 크리스마스 장식, 철 지난 애들 옷, 덧신, 향초, 크레용, 쇼핑백, 포장지, 다리미, 다리미판, 수세미실, 다른 수세미실, 콘사, 면사, 벨벳사, 수면사, 울실, 마실, 불그스름한 실, 푸르스름한 실… 한 평도 안 되는 작은 공간을 빈틈없이 채우고 있는 수많은 물건과 어쩌다 생긴 틈에까지 구석구석 들어앉아 있는 뜨개실들. 저것들을 고르고 분류하여 상자에 담는 것이 오늘의 목표였다.
정리의 마법사 곤도 마리에가 ‘설레지 않으면 버리라’고 했다던가. 이번만큼은 나도 그 규칙을 머리에 새기고 착착 버릴 것을 골라내고 남길 것은 남기리라. 오늘을 위해 다이소에서 가장 큰 사이즈의 공간 박스를 세 개나 사다 놨다(그러고 보니 곤마리 씨는 ‘수납용품은 새로 살 필요 없다’는 말도 했다). 한 시간쯤 지나 고개를 들었을 때 방 안은 그야말로 초토화되어 있었다. 내 두 발이 디딘 곳을 제외하면 방바닥은 본래 색을 찾아볼 수가 없었고 침대는 빨래할 때가 한참 지난 거대한 세탁 바구니처럼 보였다. 온갖 물건이 나오던 메리 포핀스의 가방처럼, 벽장 안에 손을 넣었다 빼면 끝없이 무언가가 나왔다. 손을 댈 때마다 설레는 것들 투성이었다.
털실을 좋아한다. 선명한 색에 촉감도 굵기도 적당해 무얼 떠도 좋은 혼방사, 약간 뻣뻣한 덕에 모양 잡기 좋은 면사, 아기 피부에 찰떡같이 어울리는 보들보들한 수면사, 반짝반짝 눈이 부신 수세미실, 두툼해서 숭덩숭덩 뜨기 좋은 패브릭얀 등등. 뜨개실은 저마다 뚜렷한 개성으로 온몸을 두르고 무엇이 될지 모르는 무한한 가능성을 품고 조용히 웅크리고 있다. 편물을 완성했을 때 모습은 또 어떤가. 대바늘로 뜬 스웨터를 보면 왠지 모를 그리움에 미소 짓게 되고, 코바늘로 만든 인형은 경쾌하고 선명하다. ‘뜨개질’이라는 단어에서 마법 같은 온기를 느끼는 것은 나뿐만이 아닐 것이다. 인자한 표정의 할머니가 난롯가 흔들의자에 기대어 앉아 어깨에는 숄을 두른 채 무언가를 뜨고 있다. 벽난로에서 타닥타닥 장작이 부서지고 발치에는 떨어진 실타래를 톡톡 건드리며 노는 고양이가 있다. 그리고 현실의 나는 도안의 사각형을 세다 침침해진 눈에 인공눈물을 떨어뜨리고 다시 쭈그리고 앉아 굽은 등으로 뜨개바늘을 놀린다…. 상상 속 할머니의 여유나 평화와는 상당한 거리감이 있지만, 머릿속으로는 언제나 그런 장면을 생각하며 굽은 어깨에 어느 회사 판촉 담요라도 두르게 되는 것이다.
벽장에서는 최종적으로 라면 박스 열 개를 가득 채울 정도의 털실이 발굴되었다. 무언가를 뜨고 남은 실이거나, 뜨려고 샀지만 시작을 못 한 실이거나 뜨다 만 실들이 무려 열 박스. 끄집어내는 실뭉치마다 쓰다듬으며 “이거 내가 식빵 수세미 뜨려고 사 놓은 건데!” 하며 탄식하거나 “이게 여기 있었네? 당신 목도리 뜨던 거잖아. 7년 넘었나 보다 이제”하며 반가워하는 내 옆에서 쓰레기봉투를 들고 버릴 것이 나오기만 기다리던 남편의 얼굴이 허옇게 질려가고 있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새로 사 온 공간 박스에 실을 꾹꾹 눌러 담으며 나는 한껏 설레었다. 당장 떠보고 싶은 카드지갑 도안 봐 둔 게 있는데 어떤 실로 만들면 좋을까? 브롤스타즈인가 뭔가 하는 캐릭터가 요즘 유행이라던데 그거나 한번 떠볼까? 뭐라도 좋다. 그냥 두고 보고만 있어도 좋다. 끝내주는 솜씨나 경탄할 만한 재주는 없지만, 내 손끝에서 여무는 것이 무엇이든 과정은 즐겁고 결과는 사랑스럽다. 처음 겉뜨기, 안뜨기를 배우던 시절에서 어림잡아 20년이 지났다. 줄곧은 아니었지만 매 계절마다 불타올라 결국 라면박스 10개 분량의 실을 모으고 말았으니 스스로 뜨개인(人)이라고 불러도 좋을까. 나에게 뜨개질은 몇 달 만에 보아도 엊그제 만난 듯 정다운 오랜 친구. 털실 타래마다 떠오르는 얼굴들이 있다. 어떤 취미는 헤어지자마자 보고 싶은 얼굴이거나 긴 시간 함께 나이 들고 싶은 얼굴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