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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막

by 숨님

잠든 아이들의 볼에 손바닥을 대 본다. 살짝 찬기가 느껴지는 매끈한 볼. 닿을 듯 말 듯 살살 스치면 보드라운 솜털이 간질거리고 코끝에서는 작은 숨소리가 들고 난다. 나는 이 아이들을 사랑한다. 자고 있을 때면 더욱. 아이를 낳고 키우는 건 수시로 부글부글 끓어 올라 곧 넘치려는 냄비의 불을 조절하는 일이다. 폭파 현장을 방불케 하는 밥상머리에서 끊임없이 투하되는 밥풀이며 반찬 부스러기를 줍고 치울 수 있는 인내심이 요구되며, 쉴새 없이 앉았다 일어서기를 반복할 수 있는 무릎 관절과 퇴근 시간 없이 버틸 체력이 필요하다.


19개월 차 연년생 남자아이 둘을 키우는 동안 주변에서 의도치 않은 격려(대단하다, 존경해)와 위로(얼마나 힘들까, 애 하나 있는 난 말도 말아야지)를 많이 받았다. 그럴 때마다 굳이 길게 말하기가 피곤해서 애매한 웃음으로 넘어가거나 대충 얼버무렸지만, 사실 육아는 꽤 할 만한 편이었다. 막상 낳고 보니 내가 생각보다 아이들을 더 좋아하는 사람이라는 걸 알게 됐고 아이들의 기질이 순한 것도 한몫했다. 집에 있는 것도 할 만했다. 날이 좋아서, 좋지 않아서, 날이 적당해서 집에 있는 모든 날들이 좋은 나는야 타고난 집순이니까. 육아의 고됨이나 체력소모보다 괴로운 건 내가 쓸모없는 사람이 되어 가고 있다는 생각이었다. 사람을 둘이나 세상에 내놓는 생산성의 최대치를 발휘한 지 불과 1년도 안 되었을 때였다. 세상에서 잊혀 가고 있다는 망상에 가까운 생각, 각고의 노력 끝에 얻게 된 지식과 기술이 무용지물이 되는 듯한 착각은 시시때때로 나를 붙들고 좁고 깊은 구멍 아래로 끌어내렸다.




집안일 말고 다른 일, 뭔가 다른 ‘생산적인’ 걸 하고 싶었던 나는 결과가 가장 눈에 빨리 보이는 ‘만들기’를 택했다. 놀이용 부엌 만들기. 일주일 동안 아이들이 잠들고 나면 서재 구석에서 3단 책장과 박스, 우드록을 자르고 붙였다. 다소 엉성하게 완성된 부엌은 이후 4년 가까이 놀이방 한구석에서 스테이크도 만들어 내고 우동도 만들어냈지만 이런 건 하나를 만드는 데 너무 많은 재료와 시간과 품이 들었다. 두 번은 못 할 짓이었다.

다음으로 눈에 띈 것이 뜨개질이었다. 당시 25개월이던 첫째 아이는 <미니특공대>의 ‘볼트’라는 파란 다람쥐 캐릭터를 좋아했는데, 방영한 지 얼마 안 된 만화라 그런지 아무리 인터넷을 뒤져도 볼트 인형은 구할 수가 없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볼트 인형은 이후 몇 달간 우리 집에 뜨개 폭풍을 일으킨 도화선이자 가장 허접스러운 첫 작품이 되었다. 기성품도 없는 유명하지 않은 캐릭터 인형에 도안이 있을 리 없었으므로 얼추 비슷한 체형의 인형들이 담긴 도안집을 찾아 뒤지기 시작했다. 처음 본 인형 도안은 얼핏 미로 같기도 하고 암호 같아 보이기도 했는데, 내가 원하는 모양의 인형을 만들기 위해 여기서 조금, 저기서 조금씩 도안의 일부를 뜯어 모아야 했다. 집에 있던 털실과 바늘로 더듬더듬 도안을 따라 토끼의 얼굴에 여우의 귀를 떠서 잇고, 부직포로 눈과 코를 오려서 한 땀 한 땀 꿰매 붙였다. 눈을 붙이고 나니 제법 귀여운 얼굴이잖아? 나 뜨개질에 재능 있는 거 아냐? 같은 소리를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지껄이고는 과감하게 목과 몸통을 이어 붙였는데……. 엥? 정면을 바라보고 있어야 할 볼트의 고개가 왼쪽으로 돌아가 삐딱하게 기울어져 있었다. 뜯어내고 다시 연결. 이번엔 하염없이 공손하게 인사를 한다. 뜯고 다시, 뜯고 다시를 반복하는 동안 볼트의 고개는 점점 힘을 잃어 떨어지지 못해 끝나지 못하는 시든 이파리처럼 맥을 못 추고 있었다. 목 부분만 유난히 꼬질꼬질한 데다 돗바늘이 거듭 지나갔던 곳은 다 벌어져 보기에도 험악했다. 뜨개 인형은 이어 붙이는 데서 분위기가 결정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팔, 다리, 머리, 몸통을 어디에 어떻게 이어 붙이느냐에 따라 인형은 귀여워지기도, 무서워 지기도 한다. 요령도 없이 무작정 시작해서 어떻게든 빨리 완성시키고 싶었던 나는 하는 수 없이 원래 캐릭터에는 있지도 않은 목도리를 만들어 목에 둘러 주는 것으로 성급히 첫 인형을 마무리했다. 얼른 아이에게 보여주고 싶어서 입과 손이 근질근질했다.

오리지널 볼트와 내가 만든 볼트


다음 날 아침, 아이는 볼트를 알아보지 못했다. 인형의 목도리를 만지작거리며 확신이라곤 하나도 없이 곰과 고양이와 여우를 대는 아이에게 “볼트! 엄마가 볼트 만들었어!”라고 삼십 번쯤 말해주었다. 아빠가 퇴근할 때쯤에야 인형을 가리켜 “보-트”라고 하는 아이를 보며 결심했다. 만든다, 인형. 누가 봐도 이게 뭐다, 라고 말할 수 있는 인형을 만들겠어. 이렇게 정체성 불분명한 작은 볼트 인형은 거대한 뜨개 바람의 씨앗이 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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