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려견 훈육 영상을 보던 어느 날이었다. 열몇 번째로 재생한 영상에서 훈련사는 카메라를 흘깃 보더니 짐짓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자~ 여러분, 이제 여러분 강아지들 부르세요. 이리와~ 무릎에 앉히세요. 스피커 볼륨 높이세요. 강아지들이 들으면 기분 좋은 말을 해드릴 거예요.” 그러더니 카메라를 똑바로 쳐다보고 또박또박 이렇게 말하는 게 아닌가. “산. 책. 산책! 산책 갈까?” 댓글 창에 원성이 자자했다. ‘산책’ 소리에 목줄을 물고 와 꼬리를 프로펠러처럼 돌려대는 개들의 반려인들이었다. 나는 코코를 슬쩍 돌아보았다. 식탁 밑에 납작 엎드려 있던 코코는 나와 눈이 마주치자 귀를 한껏 젖히고 아주 곤란한 표정으로 쩝, 입맛을 다시며 고개를 돌려 시선을 피했다.
영상은 질의응답 형식으로 제작된 것이었는데, 별의별 질문이 다 있었다. ‘강아지는 저를 맨날 핥으면서 왜 제가 핥으면 싫어하나요?’, ‘강아지는 엘리베이터를 타면 순간이동했다고 생각하나요?’, ‘강아지도 맘대로 사진 찍는 걸 무례하다고 생각하나요?’ 하지만 목록을 눈으로 훑으며 스크롤을 아무리 내려도 내가 궁금해하는 건 나오지 않았다. 강아지가 식구들을 보면 슬금슬금 숨어요. 다정하게 부르고 눈을 맞추면 오줌을 싸요. 어떻게 하죠?
코코는 2020년 12월 27일에 우리 집에 왔다. 광명의 임시보호처에서 이동하는 내내 차창 밖을 힐끔거리며 바들바들 떨던, 흰색에 갈색 점박이 무늬가 있는 ‘시고르자브종’ 강아지. 임시보호자가 부르던 대로 코코라고 부르기로 했다. 경상북도 영덕의 어느 공장 뒤꼍에서 어미 개와 형제들과 함께 발견되어 구조된 지 채 석 달이 안 된 강아지였다. 코코의 엄마는 보호소에 있는 동안 안락사되었고, 형제들은 서울, 대전, 분당 등으로 뿔뿔이 흩어져 입양되었다.
나는 웬만큼 자신이 있었다. 열 살 때부터 지금까지 우리 식구들은 늘 동물과 함께 살았다. 금붕어, 거북이, 십자매 같은 작은 아이들부터 강아지 세 마리와 고양이 세 마리까지. 삼십 년 가까이 동물과 함께 살면서 키우던 개가 새끼 낳는 것도 보고, 그 새끼가 핏덩어리일 때부터 함께 키웠다. 목욕을 시키고 발톱을 깎고 약을 챙겨 먹였으며, 나이 들어 앞이 안 보이게 된 개가 다리를 절며 방을 헤매고 다닐 때 새벽마다 곁을 지키고, 마지막에 마지막까지 품에 안고 속삭이며 병원에 오갔다. 나는 정말로 자신이 있었다. 이 강아지를 잘 돌볼 거라는, 함께 행복할 거라는 자신이.
생각과 달리 우리 집에서 코코는 별로 행복해 보이지 않았다. 코코는 불러도 오지 않는 강아지였다. 가만히 있기라도 하면 그나마 나으련만, 누군가 자기를 부르면 고개를 낮추고 꼬리를 숨기고 슬금슬금 반대 방향으로 가버렸다. ‘이리 와’의 뜻을 반대로 알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의심할 정도였다. 눈을 맞추기 위해 무릎을 굽히고 손등을 내밀면 어김없이 오줌을 쌌다. 뭐가 그렇게도 무서운 걸까. 하네스를 손에 잡기만 해도 코코는 벌써 책상 밑으로 들어가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수의사 선생님이, 밖에 나가도 별일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 나가서 가만히 앉아만 있다 오라길래 한동안은 10킬로가 넘는 코코를 안아 들고 집 앞 공원에 나가서 앉아있기도 했다. 하지만 우리의 외출은 오래가지 못했다. 현관문을 열면 안긴 채로 똥오줌을 싸는 통에 옷을 망치는 건 둘째 치고, 아파트 복도에 흩뿌려진 것들을 치우느라 시간을 다 보내기 일쑤였기 때문이다. 코코의 산책에는 최소한 2인 1조가 필요했다.
한번은 가족 모두가 출동해 코코를 호위하듯 둘러싸고 산책하던 중에, 맞은편에서 자기 뒷다리만 한 강아지가 오는 것을 보고 기겁을 하고 도망간 적이 있다. 죽을힘을 다해 하네스에서 빠져나간 코코는 뒤도 안 돌아보고 왕복 6차선 도로로 뛰어들었다. 쫓아갈 수도, 눈을 감을 수도, 귀를 막을 수도 없는 순간이었다. 빵 빠앙- 길게 울리는 경적 사이로 쿵, 하는 소리가 들릴까 봐 얼마나 무서웠던지. 남편과 엄마와 함께 세 방향으로 흩어져 뒤진 끝에, 우거진 철쭉 덤불 아래에서 코코를 겨우 발견했다. 어둠 속에 웅크리고 있던 코코는 차라리 사라져버리고 싶은 얼굴이었다. 그날 이후 우리 강아지의 세상은 서른두 평 집안으로 한정되었다. 눈이 오는지 비가 오는지, 바람의 냄새가 어떤지 낙엽을 밟을 때 어떤 소리가 나는지 코코는 모른다.
몇 달이 지난 지금, 코코는 여전히 산책 보이콧 중이다. 하네스를 보면 책상 밑으로 숨고, 다정하게 부르면 꼬리를 숨기고 도망가기 바쁘다. 나 역시 코코만큼 산책이 두려워졌다. 미세먼지가 심하거나 궂은날이면 오히려 마음이 편안해지기도 했다. 이런 날씨엔 다른 집 개들도 다 산책 못 나오겠지? 하지만 늦은 밤에도, 이른 아침에도 길에는 개들이 있었다. 노랗고 빨간 옷을 걸치고 코를 킁킁거리며, 누구보다 즐겁고 당당한 태도로 꼬리를 바짝 치켜세운 개들은 어디에나 총총 발자국을 남기고 있었다. 외출했던 내가 집에 들어오면 코코는 요란하게 짖으며 펄쩍펄쩍 뛴다. 그렇다고 바로 쓰다듬으면 여지없이 오줌을 흘리기 때문에, 적당히 모르는 체하다가 흥분이 잦아들면 몇 발짝 떨어진 곳에서 말을 걸고 눈을 맞출 뿐이다. 억지로라도 산책을 데리고 나가는 것과 집에 있는 것. 둘 중 뭐가 더 코코에게 좋은 건지 아직도 잘 모르겠다. 그나마 생각한 것은 ‘무리하지 말자’는 것뿐. 이마저도 뿌연 다짐이라 어디까지가 무리하지 않는 것이고 어디부터가 필요한 행동인지 명확하지 않다. 다만 바랄 뿐이다. 따끈한 방바닥에 옆으로 드러누워 잠든 코코를 볼 때, 어쩌다 한 번씩 쓰다듬어도 도망가지 않고 내 손바닥에 체중을 실어 제 머리를 기대올 때, 조금쯤은 안정감을 느끼기를. 집 안에서도 밖에서도, 별일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주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