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기요, 내 월급 당신이 주는 거 아니거든요?
사내 메신저로 인사 한 마디 건네고는
배경 설명 1도 없이 자신의 문의 사항을 들이미신 그분.
내 일이 아니지만 한 번 참고, 관련 사항을 찾을 수 있는 소스를 알려준다.
만족스러운 답이 아닌가 보다.
네가 알 거 같으니까 너한테 묻는단다.
내 일이 아니라니까 왜 네 일이 아니 냔다.
뭐라고 얘길 해줘야 하나?
잠시, 진심 정말 잠시 딥빡의 기운이 화르르륵 내 속에서 올라왔다.
그러나 이런 경우 내가 해줄 수 있는 가장 최선의 응대는
같은 대답을 더욱 친절하게, 그러나 AI 뺨치게 영혼 없는 ^^도 달면서 응대하는 것이다.
다행히 뒤늦게 상대분께서 묻고 계신 그 일이 내 일이 아닌 배경의 실마리를 찾으신 것 같다.
정말 다행이었다.
한 번 더 쨉을 날려왔다면 나도 정공법으로 들이받을 참이었으므로.
너도 나도 다행히 그 순간을 넘겼다.
숱한 시간을 나의 경계를 넘어오는, 선 넘는 인간들을 겪어내야 했다.
동아리라면 탈퇴라도 할 수 있지만 직장 탈퇴가 어디 그리 쉬운가?
게다가 또라이 질량 보존의 법칙을 듣고 보니 더더욱 참고 버티는 게 방법인 것 같았다.
다리 뻗을 자리를 보고 뻗으랬다고 안전한 사람에게는 정중히 선을 지켜 달라고 했지만
그렇게 부탁할 수 있는 상대는 극히 적었다.
그조차도 주위의 사람들에게 내가 화를 내도 되는 상황인지 다각도로 확인을 하고 난 뒤
준비하고 연습해서 정중히 애원으로 보일지도 모를 부탁을 하는 수준이었다.
나는 왜 그렇게 내 감정의 적정성을 검증하고 싶었던 걸까?
내가 틀릴까 봐 두려웠던 것이다.
정확하게는 예민한 사람으로 비춰질까봐, 그래서 이미지에 금이 갈까 봐 걱정이 됐던 거다.
큰 목소리와 사교성, 호탕한 웃음소리를 가졌다고
그 사람이 꼭 100% 외향적일 것이라고만 판단하면 큰 오산이다.
그것은 그 사람의 외향으로 보이는 수만 가지 중의 일부의 모습이다.
솔직히 내 속 시끄러움을 꺼내놓고 보면 대개 이런 반응이다.
"너 쿨할 줄 알았는데, 의외다."
전에는 이런 평을 들으면 꼭
"너 은근 소심하구나."
"예민한 사람이었어? 헐, 대박~"
들리지도 않는 마음의 소리까지 해석해 가며 너무도 불편했다.
어찌 보면 나도 그런 선입견을 가지고 있어서 그랬을지도.
그런데 요즘은 그런 반응을 받아도 덤덤히 이야기한다.
"내가 외향성과 내향성을 두루 갖춘 사람이라서 그래.
유머 한 마디도 다 의미가 있고 뜻이 있는 사람이라고."
"내가 생각의 깊이도 좀 되지?"
너스레를 떨며 자뻑성 멘트도 날린다.
관계가 불편해질까 봐 내 속에는 피가 철철 흘러내리는데 괜찮다고 해서는 안된다.
목숨을 걸고 내 영토는 내가 지켜야 하는 것이다.
안 괜찮을 때는 안 괜찮다고 말하는 게 진짜 괜찮은 것이다.
오늘 읽은 책에서 유은정 작가의 말에 여운이 길게 남는다.
상대와 '잘 지내고 싶은 것'인지 상대에게 '잘 보이고 싶은 것'인지 구분해야 한다.
숱하게 내 영역을 지근지근 밟고 지나간 사람들에게 찍 소리도 못한 이유는
잘 지내고 싶은 수평적 관계가 아니라 잘 보이고 싶은 수직적 관계를 내 스스로 만들었기 때문이었다.
스치듯 지나가는 점 같은 인연에게 함부로 수직적 관계를 허락하지 않겠다는 결심을 하게 된 가장 큰 계기는,
나의 세 우주들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라는 생각이었다.
나를 존재만으로 사랑해 주는 나의 세 아이들이 기다리고 있는 집으로 돌아가는 그 길을
패잔병처럼 축 처진 어깨로 몸을 억지로 이끌고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엄마아~~~~ 불러주는 승전가를 온몸으로 받으며 신나는 발걸음으로 현관을 들어서고 싶었다.
덧, 오늘 글의 제목의 원문 책을 공유합니다.
그리고 비슷한 주제의 책을 추천드려요. 저의 적정 인생론을 탄생시킨 소중한 책이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