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지런하게 사는 것은 왠지 모든 인간이 응당 지켜야하는 가치인 것만 같다. 그런데 부지런하다는 것은 상당히 안정적인 행동패턴이기 때문에 후천적으로 바꾸기가 매우 어렵다.
선천적으로 부지런함을 낮게 타고났다면 생존에 불리한 것은 맞다.
당장 보상이 주어지지 않아도 지속해야 성과를 낼 수 있는 일들을 해나가는 게 삶의 속성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타인에게 혼나는 것에 더해서 나 스스로도 나를 혼낸다면 무엇인가를 할 수 있는 에너지가 더 없어진다. 나 자신을 달래가면서 원하는 목표를 달성하도록 칭찬과 케어를 퍼부어도 모라를 판이다.
이유 없이 슬프거나, 하루가 끝나면 녹초가 될 정도로 지친 나의 몸과 마음의 신호를 무시하면 나의 슬픔과 피로는 누적되어 나중에 더 큰 병으로 돌아온다. 혹시 점점 냉소적으로 변하고 있는 것 같다면 내가 왜, 언제부터, 누구에게, 어떤 상황에 더 냉소적인지? 나를 돌아보는 시간을 가지면 좋겠다.
주변 사람들에게 실망감을 자주 느낀다는 생각이 든다면, 구체적으로 어떤 면에서 실망감을 느끼는지, 왜 그렇게 느끼는지, 나의 마음을 돌아봐주는 시간이 더더욱 필요하다. 만약 이럴 때 자기를 돌아보는 시간을 가지지 않고 넘어가면, 나의 실망감은 해소되지 않은 채, 내 안에서 머물며 몸에 차곡차곡 쌓이다 언젠가 갑작스럽게 폭발할 수 있다. 참으면 병 된다. 감정도 우리가 매일 먹는 음식처럼 소화해야하는 대상이라는 점을 잊지 않길 바라는 마음이다.
번아웃이 올 것 같다면 그 느낌이 맞다
번아웃 증후군은 포부 수준이 지나치게 높고 전력을 다하는 성격의 사람에게서 주로 나타난다. 이런 특성은 소위 성취에 대한 야망이 높고, 특히 완벽주의가 높을 경우에 해당된다. 미래의 성공을 위해 현재 많은 희생을 하고 있다면, 완벽을 위해 끝없이 달리고 있다면 번아웃 증후군, 즉 소진되기가 쉽다.
일하기 자체가 불편한 정서를 피하기 위한 전략이 되기도 한다. 워낙에 감정조절이 어렵고 감정기복에 따라 멘탈이 휘청거린다면, 제정신으로 멀쩡하게 살아가기 힘이 들 때, 일은 굉장히 좋은 도피처가 된다. 적어도 일을 하고 있는 나는 일 때문에 피곤한 것이고, 일 때문에 힘든 건 괜찮으니까, 일하다 힘든 나는 좀 괜찮아 보이니까.
그런데 그렇게 달리는 나의 이면을 살펴보자.
왜 그렇게까지 잠도 포기하면서까지 달릴까 완벽주의라는 건 무엇일까.
사실 완벽주의라는 말은 허구의 개념이다. 이 세상에 완벽한 게 있을까 싶다. 완벽을 추구한다는 말이 더 사실에 가깝다. 이 때 꼭 알아야하는 건 완벽을 추구하는 것은 나의 선택이지만, 완벽한 상태에 도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나 스스로가 인지하면서 가는 것이다.
만약 무슨 수를 써서라도 완벽한 상태에 '도달해야만 해!'라고 스스로에게 주입한다면? 그리고 완벽한 상태에 '도달하지 않을 거면 아무 것도 쓸모없어!', '나는 실패자야!'라고 스스로가 생각하고 있다면 그 때부터 지옥행이다. 현실에서 완벽에 도달하는 일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완벽을 주입하고 강요한다면 결국엔 소진될 가능성이 매우 높다.
왜 해야 되는지 스스로 납득하지 못하는 행동을 꾸준히 유지하는 것은 매우 어렵다. “잘 나가는 사람들이 그렇게 했으니까”는 나 스스로를 납득시키기에 불충분한 근거다. 거기다 부지런한 기질을 타고나지 못했을 경우에 더 어렵게 느껴진다. 부지런하게 사는 것은 왠지 모든 인간이 응당 지켜야하는 가치인 것만 같다. 그런데 부지런하다는 것은 타고난 행동패턴이 결정짓는 바가 큰 특성이다.
당장 눈에 보이는 보상이 없더라도, 혹은 간헐적으로 보상이 주어지더라도 한 번 보상을 얻었던 행동을 지속하는 성격 차원은 타고나는 측면이 강하다. 부지런함을 기질적으로 높게 타고난 사람은 당장 보상이 없어도 미래의 보상이 예상만 된다면 지속하는 힘을 내재화하고 있다. 부지런함이 낮은 사람이 봤을 때 그들은 ‘부지런하고, 끈기 있으며, 성취에 대한 야망도 높고, 성공을 위해 많은 희생을 하며, 완벽주의자’의 특성을 보인다. 그들에 비해 나는 게으르기 짝이 없다. 게으른 건 무능한 거라며 나를 비난한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부지런함은 선천적으로 주어지는 기질이며, 후천적으로 바꾸기가 매우 어렵다는 사실이다. 기질은 유전자에 각인된 유전적 특성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부지런함이 높은 사람은 확신이 없어도 지속할 수 있는 행동의 이유를 갖고 태어나서 열정적으로 달리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이 꼭 바람직한 것은 아니다. 엄밀하게 분석해 보면 매우 열정적으로 보이지만 사실 나에게 필요한 게 맞는지 모르는 채로 달리기만 하는 것일 가능성이 있다. 열심히 한다고 해서 방향이 맞는다는 보장은 되지 않는다. 열심히는 전략이 아니기 때문에.
일단 부지런함이 낮게 타고났다면, 유전자에 각인된 유전적 특성은 큰 이변이 없는 한 안정적인 특성을 유지한다는 점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왠지 해야만 할 것 같아서 열정적인 척을 하느라 자신을 괴롭히고, 열심히 하지 않는 나를 꾸짖는다면 나는 내가 원하는 성과를 내지도 못할뿐더러 “나는 왜 저 사람들(인내력이 선천적으로 높은 사람들)처럼 못하지?” 자책하다 우울감만 커질 것이다.
그러므로 내가 게을러 보일 때도, 나태해졌을 때도 자책할 일은 아니다. 오히려 인내력 낮은 내가 인내력 높은 사람들처럼 따라가려고 부단히 애를 쓰느라 고생중인 것을 알아주는 마음가짐이 필요하다. 그렇게 고생하는 나를 알아주기는커녕 비난하고 다그친다면 안 그래도 낮은 인내력으로 애쓰는 나는 더 좌절하고 말 것이다.
부지런함을 낮게 타고난 경우를 인식하게 된 경우, 다음과 같은 반응이 나타난다. “내가 원래 그랬구나. 인내력이 기질적으로 낮게 태어났는데, 그걸 모르고 나를 그렇게 다그쳤구나. 인내력 차원이 낮게 태어난 나에게 인내력은 높아야한다고, 무조건 키우라고, 부모님에게 선생님에게 혼나오면서, 어느 샌가 나도 모르게 나를 혼내고 있었구나.”
허구의 완벽함을 달성하는 건 불가능하지만, 내가 가진 자율성을 발휘하여 그 누구의 기준이 아닌 나의 기준으로 '이 정도 했으면 만족해!'라는 기준을 잡고, 잘했다는 도장을 꽝꽝 찍어주는 건 가능한 일이다. 하루에 몇 번도 할 수가 있는 일이다. 그렇게 내가 나 스스로 ‘이 정도면 됐어’라고 정하는 일, 내가 나의 성취를 인정해주는 건 내가 할 수 있는 영역의 일일 것이다.
그렇게 매일 하다보면 어느 샌가 '완벽을 추구하는 것'이 아닌, '내가 만족하는 수준으로 일하는 나'의 모습이 갖춰지게 된다. 일을 하면 할수록 나는 이렇게 일하는 사람, 나는 이렇게 일하는 게 즐거운 사람이라는 '자기감'이 충족된다. 그렇게 사는 삶이 행복하게 일하는 삶 아닐까? 보통의 삶, 내가 정한 '보통'의 기준. 그게 나답게 사는 삶 아닐까.
보통만 합시다.
‘나만 빼고 남들이 열심히 할 것 같아 나는 쉬면 안 돼.’ 라고 자학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렇다면 그런 나는 마음이 아플 수밖에 없다는 걸 기억하면 좋겠다. 그렇게 시선이 외부로 가 있다면, 나는 쉬고 있어도 쉬고 있지 않으며 놀아도 노는 게 아니다. 결국 만성적으로 피로감만 쌓인다.
그렇다고 대단한 성과가 날 리도 없다. 이것저것 시도해봤자 실패감만 축적된다는 이야기다. 내가 진짜로 원하는 게 아니면 성과가 나기가 어렵다. 그래서 지속적으로 내 마음에게 물어봐야 한다. 대답해줄 때까지 지속적으로 물어보는 거다. 내가 진정 원하는 삶은 무엇이냐고. 한 번 묻고 땡. 하지 말고 대답해줄 때까지 물어보는 거다. 그럼 내 마음은 이야기를 하기 시작한다.
‘사실 내가 원하는 건 무엇이야!’ 라고 말해주기 시작한다. 그럼 그 이야기를 잘 들어보자. 그 이야기대로 해보자. 그 이야기를 들어도 괜찮다는 걸 경험해보자. 남들처럼 살지 않기로 내가 선택해보자. 그들의 인생은 그들의 인생, 내 인생은 나의 인생이라는 걸 내가 직접 경험을 통해 확인해보자. 점점 내가 선택하고 결정하는 삶에 대한 실체를 만날 수 있을 것이다.
여러 심리학 연구에서는 자기복합성(self-complexity)이 높을수록, 즉 자기를 개념화하는 구성요소가 많을수록 서로 분명한 경계를 갖고 기능할수록 회복탄력성이 높다고 한다. 다양한 상황에 맞게 다양한 나를 내가 구성할수록 다양한 상황, 설령 극심한 위기상황이 찾아오더라도 그에 맞게 대처할 수 있는 능력이 높아질 수 있다는 의미이다.
20대에게 자주 듣는 말이 ‘저는 다중이(다중인격자) 인가 봐요’이다. 내 안의 다양한 내가 느껴지는데, 서로 너무나 다르고, 심지어 너무 반대의 모습들이 상충해서 혼란을 느끼는 것이다. 그 중에 하나만 나였으면 좋겠는 마음이 많이 관찰된다.
이중인격자인 나는 싫어 하나의 바람직한 모습만 있으면 좋겠어
그런데 안타깝게도 내 안의 여러 가지 목소리가 들린다면, 그것은 다 나의 목소리이다. 그 목소리가 들리는 이유가 존재하며, 그렇게 상충되는 모습들이 나올만한 이유가 존재하는 것이다. 그 존재를 부정하게 되면, 외면당한 나의 마음은 또 다시 우울과 상실의 방에 갇힐 수밖에 없다. 사라지진 않으니까 그 안에 갇혀있을 수밖에 없다.
그러니 우리, 단 하나의 이상적인 모습을 정해놓고, 이리저리 편집해서 쓸모 있는 것만 조합해놓는 것이 나의 삶이 되지 않았으면 좋겠다. 설령 쓸모가 없다고 세상이 판단한다고 할지라도 나는 그것을 그대로 봐주면 좋겠다. 쓸모가 있건 없건 당장 돈 되는 것이 아니라고 할지라도 내가 무언가에 끌린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이것도 저것도 모두 나다. 편집해야할 것 같은 나도 나다. 그러니 내 안에 나를 아끼는 그 마음을 믿고, 나랑 친해지는 삶을 시작해보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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