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전 ‘놀면 뭐하니’에서 이효리가 엄마에게는 나도 모르게 마음과 다르게 퉁명스러운 말투가 튀어나온다고 고백했다고 한다. 10년 넘게 마음을 돌보고 있는 나에게도 아직까지 그런 모습이 남아있다. 쉽지 않은 영역이다 엄마와 딸의 관계.
나: “엄마가 말한다고 알겠어?”
엄마를 무시하는 말이다.
하아. 최근 몇달간 잘 지냈는데 또 나와버렸다. 엄마에게만 나오는 나의 말버릇. 아주 고약한 말버릇이다. 내가 봐도 참 싸가지가 없다. 어쩜 이렇게 싸가지가 없을까 싶을 정도로 못됐다. 항상 돌아서서는 후회한다. 아차. 내가 왜 그랬지? 이놈의 습관이란 게 참 무서워서 조심하자 해도 나도 모르게 나와버릴 때가 있다. 특히 내 몸이 지쳐서 정신줄을 놓아버렸을 땐 더더욱. 오늘은 참 좋은 마음으로 엄마와 데이트하는 날이었는데.
예전에는 엄마가 나랑 동생에게
너희는 나를 무시하잖아!
라고 화를 내면
아니라고!
저항했었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엄마를 무시한 게 맞았다. 내가 옳다고, 내가 엄마보다 더 많이 안다고. 배우려고 하지 않는 엄마가 싫고 무시하는 내가 분명 내 안에 있다.
엄마는 틀렸다는 내가 내 안에 있어서, 무의식이 나를 지배하는 순간 엄마를 경멸하는 내가 튀어나온다. 그리고는 내가 우위를 차지하며 엄마를 밟아버린다. 자존심이 강한 엄마는 나에게 무참히 밟혀버리고는 화장실로 들어가 버렸다. 경제권을 모두 나에게 의존하고 있는 엄마가 할 수 있는 건 그것뿐이다. 엄마의 마음은 어떨까? 너무 비참할까? 내가 너무 미울까.
뭔가 새로운 것을 설명할 때 화내고 짜증내며 무시하는 말투가 나오는 내가 나쁘다고 생각하는 엄마와, 모든 걸 스스로 학습하려고 하지 않는 엄마가 한심하다고 생각하는 나와의 대립은 10년째 진행중이다. 다만, 대립의 빈도가 줄어들고 있으며, 점점 엄마가 왜 그런 지, 내가 왜 그런 지는 마음으로 알아가고 있다.
엄마는 학습지향성이 낮다.
학습지향성: 새로운 지식을 습득하는 활동(연구와 학습)을 선호하는 정도
나이도 59년생으로 많은 편이기도 하지만, 어릴 적부터 연구를 좋아하는 편도 아니었다. 게다가 결혼 후부터 아빠가 모든 걸 다 해주는 방식으로 30년을 보냈다. 스스로 무엇을 해결해보지 않은 채 60대가 된 것이다. 타인이 해주는 게 익숙해 진 사람이다.
반면에 나는 어릴 적부터 모든 걸 나 스스로 알아서 해 왔다고 느끼며 자라면서 억울한 감정이 많이 쌓인 채 30대가 되었다. 심리학을 공부하고 자기분석을 꾸준히 하면서 알게 된 나는 두 살도 안 된 내 앞에 태어난 동생이라는 아이에게 적대감 혹은 황당함, 아니면 위기감을 느끼지 않았을까 싶다. 첫째는 폐위된 왕이라고 하는데, 아마도 여동생에게 질투심을 많이 느끼며 자란 나는 주인공 자리를 뺏기며, 혼자 다 잘해야 했던 어린 시절에 맺힌 감정이 많았나보다 싶었다. 많이 풀었다고 생각하는데, 그 사이에 만들어진 습관이 참으로 무섭다 싶었다. 그리고 내가 너무나도 당연하게 엄마에게 내뱉는 짜증과 무시 섞인 말투, 그리고 엄마를 판단하는 태도는 더 깊은 마음 속 무언가를 건드리고 있는 것 같다.
예를 들어, 엄마는 저러면 안 되지, 엄마 스스로 뭐를 좀 해야하지 않겠어? 라는 판단적인 마음. 엄마는 아직 나이도 젊은데 저렇게 놀고 먹는 사람인 게 부끄럽고 철딱서니 없다고 가치 절하하는 마음이 있다. 그러면서도 의식적으로는 내 능력으로 엄마가 원하는 삶을 편하게 살 수 있도록 돕고 싶은 마음이 있다고 합리화하는 마음도 있다. 내가 그 역할을 하면서 좋은 딸이 되고 싶은 마음, 책임감 있는 사람이고 싶은 마음이 크다. 그래서 난 엄마에게 못되게 말하고 난 다음 바로 후회한다. 내가 바라는 내가 아니기 때문이다. 난 엄마에게 예쁘게 말하고 싶다. 엄마가 내 마음으로 수용할 수 없는 사람일 지라도 덜 판단하고 싶다. 그냥 엄마는 그렇게 생긴 사람이니까. 타인은 내가 바꿀 수 없는 거니까. 엄마의 자유의지로 살아갈 거니까. 나는 엄마의 첫째딸로 관계하며 이번 생을 살아가는 데 충실하고 싶다. 착한 딸로서의 의무감이 아닌, 나의 자유의지로서 엄마와 진실 된 관계를 맺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