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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유는 없다

쓸데없는 why사고도 있다.

아래의 글은 출간 예정인 <우리는 늘 같은 곳에서 넘어진다(가제), 스몰빅라이프> 초고의 일부입니다. 

왜 나에게 이런 일이 생겼을까
어떻게 나에게 이런 일이 생길 수가 있지
하필이면 나한테 왜 자꾸 이런 일이 생겨    


(신경 쓰이는 지인을 떠올리며) 그 사람은 나한테 왜 그런 말을 했을까
(퇴사해버렸으면 좋겠다싶은 회사사람을 떠올리며) 왜 저 사람은 자꾸 나를 괴롭힐까
(평생 사랑하자던 연인을 떠올리며) 어떻게 나한테 헤어지자고 할 수가 있어     


자기초월, 측 영성의 영역의 질문을 계속해서 던지고 있다면

고통은 더욱 증폭될 수밖에 없다. 애초에 답을 찾기란 어렵기 때문에 질문 자체가 의미없다.                         


[자기초월(영성): Self-transcendence(ST) ]

자기와 신, 우주만물과의 관계
이성과 논리로 설명되지 않은 창조적 영역을 수용하고 겸손함을 가지는 능력
자신을 우주의 통합적 한 부분으로 지각함.

후천적으로 개발이 가능한 성격(character)의 영역이다.
(출처: 마음사랑 & 클로닝거 연구진)

이성적이고 논리적인 편인 사람은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이 벌어졌을 때, 예컨대 이유를 찾을 수 없이 괴롭히는 누군가를 만나거나, 배신을 당하거나, 갑작스러운 이별을 통보받거나, 예고 없이 큰 질병에 걸릴 때 이유를 찾으려 애쓴다.     


그런데 나이를 먹을수록
이유를 찾지 못하는 일이 더욱 많아지는 것 같다.     


나의 첫 반려견 말티즈가 너무 허약한 13년을 함께해서, 두 번째 반려견은 튼튼하다고 소문난 잭러셀테리어를 데려왔더니 4개월만에 수술대에 올라 현재 시각 수술중이다.     

어릴 적부터 한 번도 아파서 병원간 적이 없던 나는 만 서른넷에 암에 걸렸고     

평생 우리 가족은 함께 살줄 알았지만 그 가족도 깨지더라.     


20대 후반, 나의 ‘자기초월’은 매우 낮았다. 가족의 붕괴는 절대 나에게 있을 수도 이해도 되지 않는 일이었으니까.     


그렇지만 이젠 굳이 이유를 찾지 않는다.

그냥 거기까지였구나. 그리고 내 삶을 살아가기로 했다.     


나를 낳아준 아빠 엄마라고 해서, 평생을 부부로 살아야한다는 법은 어디에도 없다. 애초에 나를 낳고 나에게 내가 죽을 때까지 두 분이 함께 살겠다고 약속하고 나를 낳은 것도 아니다. 나 또한 계획 없이 태어난 생명체다.     


이 모든 것은 내가 알지 못하는 영역의 일이다. 종교는 없지만 신의 영역이라 치자. 그토록 우리가 찾는 이유는 아마도 실체가 없는 것 아닐까? 그러니 이유를 찾지 못해 괴롭다면 그냥 이유 따윈 없으니 지금 어떻게 하면 덜 고통스러울 지에 대해 나에게 물어보는 것이 현실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 아닐까.     


이럴 땐 슬프게도 ‘why'사고는 큰 쓸데가 없다. 차라리 나의 고통을 알아주고 그렇게 고통스러운 내가 지금 원하는 것 중에 내가 해줄 수 있는 것 그것을 나에게 준다면 참 좋겠다. 그럴 수 있는 자기초월이 조금만 높아진 우리가 된다면 참 좋겠다.


(단, 자기초월이 극단적으로 높아도 문제다. 모든 것이 신의 영역이고 다 내 통제밖이며, 다 잘 될것이고 우주의 기운으로 해결될것이면 나는 할 수 있는 게 없다. 이건 현실이탈이라 자기초월 낮음보다 더욱 주의가 필요하다.)



글: Chloe Lee

사진: pintere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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