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어의 힘

by 문지훈

Manipulation이라는 단어가 있다.

조종한다는 뜻을 가진 단어다. 기계 등을 조작할 때도 쓰이지만


다른 의미로는 사람을 속이고, 바보로 만들고, 이용하는 뜻도 담고 있다.



영어를 주로 사용하는 국가들은 이 단어와 매우 친숙하다. 미국 사람과, 영국 사람이나, 호주 사람과 대화해서 이 단어를 꺼내면 한국인이 떡볶이가 무엇인지 아는 것처럼 그들도 단 번에 알아본다.


Manipulative 한 사람은 남을 조종하고, 속이고, 이용하는 인간을 의미한다.


그런 사람을 우리는 인생에서 가끔 마주하고, 때로는 그들로 인해 매우 크기도 한 피해를 보기도 한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들을 위한 고유의 이름이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의 언어에는.


'머니퓰러티브한 새끼' 라는 표현이 대중화되려면 얼마나 오래 걸릴지 잠깐 상상해 보자. 어렵다.


친형이 지내는 호주에 잠깐 놀러 간 적이 있었다.

시드니에서 지내고 있던 날 중 어느 밤에, 갈색의 신비하고, 통통하고, 뚱뚱하고, 짧고, 순딩 순딩한 동물을 도시 한복판에서 봤다. 처음 보는 동물이었고, 분명히 포유류였다. 강아지와, 두더지와, 햄스터와, 새끼 곰을 한 몸에 담은 듯한 느낌을 주는 귀염둥이였다.


숙소에 돌아가서는 이 동물의 정체를 찾기 위해 검색도 많이 해보고, 친형에게 직접 물어보기도 했다.


굉장히 오래 묘사를 했는데도 결국 서로가 그 동물의 이름에 대해서 정의를 내리지 못하고, 나는 한국으로 돌아왔다.


난 지금도 가끔 '호주 동물'이라고 구글에 영어로 친 뒤에 검색하는데 이젠 생김새가 가물해져서 결국.. 못 찾고 내 가슴 안엔 답답함이 여전히 작게하도 남아있다.


어떠한 거대한 현상이나, 개념이나, 심지어 작은 동물이더라도 이름만 알면 단 한 번에 너무나 많았던, 온 세상을 덮었던 것만 같았던 모든 안개는 사라지기도 한다.


어제 지인 한 분을 만났다.

오랜만에 만났고, 늘 오랜만에 본다.

서로를 꽤 오래 알았지만 가끔씩, 꾸준히 봐 온 그런 관계.

동시에 만날 때마다 늘 반가운 관계.

그 동시에 서운함 따윈 느낄 수 없을 만큼 성숙한 관계. 난 그분을 존경한다.


어제는 평소보다 일 이야기를 거의 하지 않고, 어쩌다 보니 그분의 속마음을 계속 듣게 되었다.

누구나 속 안에는 아름다움도 있지만 고통이 있다. 그리고 대화를 편하게 하다 보면 그 고통을 보여주는 경우가 있다. 어제의 대화가 그런 경우였다.


위에서 이야기한 manipulative 한 사람을 매우 오래 겪어서, 그와 안 보게 된 지 10년이 더 지났는데도 여전히 자신의 자존감의 토대가 부패돼 있었다.

참고로 그 분은 대단한 사람이다. 자신의 분야에서 스타 플레이어다. 꿀릴 것이 없고, 완벽하진 않지만 동경까지도 가능한 인물이다. Manipulative 한 사람을 겪은 사람들은 대개 멋진 사람이여도 오래오래 자신에 대한 평가가 혼란에 빠지게 된다. 이 분의 경우도 자신을 믿는 동시에 부정적인 셀프 이미지와 부정적인 셀프 토크가 습관이 되어버린 것이다.


그분이 당한 그것. 그 끔찍하고 공포 가득한 혼란 속에서 당했던 조종. 그것을 gas lighting이라고 설명을 해주었고,


gas lighting은 manipulative한 사람이 쓰는 주 무기 중에서도 주 무기다. 꿀벌에게 침이 있는 것처럼.


머니퓰러티브한 사람을 만나서 오래 지내다 보면

결국 내가 나를 믿지 못하게 만들고, 나를 gas lighting 하는 사람의 말만을 따르게 되고, 어느새 영혼 없는 로봇처럼 변해 있는 것이다. 버튼이나 명령어를 줘야만 수동적으로 움직이게 되는 사람. 늘 공포에 떨고 있지만 왜 그런 것인지 정확한 그림을 머리 안에서 못 그리게 되는 사람. 온 세상이 먹구름에 덮여 있는데 그 안에서 비행을 해야 하는 사람.


꿈도 좇지 못하게 되고,

믿을 사람이 없어서 친구들도 멀리하게 되고,

사슬이 안 보이는 노예가 돼 있는 것. 그 안 보이는 사슬의 한 끝은 내 목에. 다른 한쪽은 노예주의 꽉 쥐어진 주먹 안에.


어제 지인에게 처음으로 위 두 개념을 소개해줬는데 너무나 놀라워하는 그의 모습을 보았다. 명쾌함을 만끽하는 눈빛이 보였다. 벽에 붙어있는 그림자의 정체를 늘 궁금해하다가, 그림자의 주인을 보게 된 느낌을 얻은 사람처럼 보였다.


'시발 그거였어' 하는 느낌.


다음에 하는 말은 잘난 척의 의미가 아니라는 것을 미리 강조한다. 그의 반응을 예상하고 말했다. 십 년 넘게 자신이 느낀 것을 단 한 번에 정리해서 이해할 수 있게 돼서 너무나 시원하다고 했다.


명확한 한 단어의 힘은, 정의 (definition)의 힘, 진실의 힘, 솔직함의 힘은 공통적인 무기를 토대로 한다.


그것은 투명함이다.


사기꾼들, 도둑놈들, 허풍쟁이들이 가장 싫어하는 것.


크리스털 같은 명쾌함, 간단함, 단순함, 간결함.


자신한테 사기 치려고 하는 사람을 만나본 사람들은 다 안다.


항상 그들의 수법은 좆같다.


많이 당해봐서 아는 사람으로서 이야기를 나눠본다.


흐릿함을 이용한다.

애매모호함을.

중얼거림을.


예를 들어보자.


기꾼: 지훈아, 사업 같이 하자.


지훈: 그래, 돈 있어?


기꾼: 있어


지훈: 얼마


기꾼: 그 얘기하다 보면 와꾸 나올 거야, 나 가게 5개 운영하고, 아는 형님이랑 이런 거 하고 저런 뭐 저 건물 내가 아는 사람이 해서 거기 사무실 하나 들어가 있어.


지훈: (뭐가 이렇게 많아??) 가게 뭐뭐 해?


기꾼: 저 호프집이랑, 돈가스 집이랑.. 내 동생들하고 운영해.


지훈: 가게 이름들은?


기꾼: 나중에 한번 같이 놀러 가, 요즘 바쁘지? 내가 한 번 쏠게 와서 사진이라도 한 장 찍어줘.


get it?


이 글을 보는 사람들 중 나보다 똑똑한 친구들이 많을 거라 믿지만,


안 당하는 방법은 언제나 그가 하는 모든 말에 증거를 대게 하는 것이다.


주소.

이름.

잔액.

매출.


이런 것들.


긴 말은 사실 필요도 없다.


리얼한 것은 언제나 원래 그래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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