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경우, 인생의 절반 이상을 우울과 함께 살았다.
초등학교 4학년 때 읽은 책이 있었다.
1999년에 지구가 멸망한다는 내용의 책이었고,
사춘기 초반이었기에 나에겐 매우 충격적인 견해였다.
당시에 난 지금과는 매우 다른 성격이었다.
예의가 바른 것과는 조금 다른 감성으로,
내가 정말로 두려워하는 것이 있었으면
상대도 나처럼 될까 봐 누군가에게 그 이야기를 하는 것이 절대로 입 밖으로 나가지 못했다.
역효과로 그 비밀은 안에서부터 나를 갉아먹었다.
99년이 지나도 그 상처는 여전했고, 우울감과 허전함은 늘 샴쌍둥이처럼 내 옆에 꼭 붙었다.
(샴쌍둥이의 삶이 나쁘다는 뜻은 전혀 아니고, 나의 경우만큼은 내 쌍둥이는 유쾌하지 않았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습니다. 모든 가까운 인간관계를 진심으로 응원하고 존중합니다!)
지금 당장이 중요하다. 인생은 지금뿐이니.
수많은 의사와, 좋은 친구들과, 나쁜 친구들과, 책과, 상담사와, 적과, 성공과 실패를 통해 나는 너무, 너무 괜찮아졌다.
포괄적인 해결책은 '받아들임'이라고 생각해.
자신의 부끄러운 단점이 있다고 생각을 해보자. 뭐... 못생긴 발이라고 예를 들어보자면..
어차피 떼어내지도 못 할 발, 자꾸 못났다고 싫어하고, 미워하면 내가 얼마나 인생이 괴로울까. 매일 봐야 하는 발이고 남들도 매일같이 볼 텐데. 그 발로 매일 걸어야 할 텐데. 잘리면 더 괴로울 텐데.
하지만 그 발에게 반대로 고마워하면, 그 발은 혹에서 복으로 변한다. 나를 뛰게 하는 놈이고, 걷게 하는 놈이고, 남의 도움 없이 나를 이동하게 하는 가장 근본적인 든든한 수단이다.
우울증세에 고마워해 본 적은 없지만, 얘기 나온 김에 한 번 고마워해 보련다. 어쨌든 나의 경우에는 나의 노래들에 퀄리티를 더 해줬고, 내 감정의 폭을 넓혀주기도 했다. 이 글을 읽는 사람들 중 한 명한테라도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 수도 있고, 어릴 때부터 겪었기에 많은 일들이 나한테 닥쳐와도 내가 생존해낸 이유 중 매우 큰 이유가 아닐까 싶다.
고마운 것에 대한 더 큰 고마움이 생기게 한다. 자기 입으로 이런 상황에서 이런 말을 하면 이상하게 느껴질 수도 있겠지만 그래서 나는 사람을 좋아하고 정이 많은 게 아닌가 싶다. 더 주의 깊게 사람들을 보게 됐으니, 왜냐면 우울감은 삶에 대한 낭만감을 주기도 한다. 모든 것은 영원하지 않으니까 이 순간들이 더 귀중해지니.
어쨌든, 지금 우울하다면 정말로 극복하길 빕니다.
앉아서 깊은 고민과 절망에 빠진다면 더 나빠져가기만 하는 건 누구라도 추론할 수 있다.
물론 쉬어가는 타임도 필요하고, 세상이 잘 못 된 부분도 있지만, 변하지 않을 것도 많다는 것을 받아들일 필요가 있는 것 같습니다.
가끔은 그냥 뛰어야 할 때가 있는 것 같다. 사자가 뒤에서 날 잡아먹으려고 하는 감정처럼, 가끔은 그냥 살 생각만 해야 할 때가 있다.
불공정한 세상이 당연히 엿 같을 수 있다. 세상이 완벽과는 거리가 있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단, 그것에 대해서 생각만 하면 나는 천천히 죽기만 하는 존재가 되어가는 것도 틀린 말일까?
내 삶을 더 사랑하는 것이 더 나은 것 같고
내 사람들의 멋있는 점을 더 생각하려 하고
좋은 것에 대한 고마움으로 주위를 전환하는 쪽이 덜 괴로운 정도가 아니라 더 행복해지는 것 같아요.
난 아직 멀었지만, 여전히 그 감정은 가끔 올라오지만,
내 강아지가 독약을 먹지 못하게 막는 것처럼 나를 더 돌보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아마 세상 모든 사람이 조금씩 자기를 돌보려고 한다면, 남을 돌 보는 게 더 쉬울지도?
힘이 덜 들어서.
여유가 남아서.
우선의 답은 나부터 챙기는 것. 완벽주의는 생각도 안 하는 것. 작은 피해를 남한테 실수로 줄 수도 있으니 내 공간을 필요 이상으로 좁히지 않는 것. 천천히 고쳐나가는 것. 남의 판단은 받아들이지 않는 것. 누가 내 삶을 안다고 함부로 나한테 판단을 하나?
이런 작은 것들부터 생각하고 계발하다 보면, 멋있어지는 나의 모습을 조금씩 발견하게 되더라고.
정말로 정신줄을 놓고 살았던 과거의 답이 없던 허무주의자로서 하는 말이니, 우리 서로 비교하지 말고, 이 말은 편하게 믿어줘서, 도움이 됐으면 하는 글입니다.
화이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