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무엇을 위해 일 하는가?

<변신>/프란츠 카프카

by 여행생활자KAI

해가 뜨는 시간에 하루를 시작해 마찬가지로 일출을 보며 하루를 마무리 했다. 방송 일 자체가 고강도였고 동시에 경력에 대한 욕심과 자리가 없어질 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겹쳐 부단히도 일을 했다. 주중 아침에는 케이블 스튜디오 프로그램을 했고 오후에는 라디오 생방송에 갔다가 저녁에는 공중파 뉴스를 했다. 주말에는 출근을 하지 않아도 되는 영화 프로그램 대본을 썼다. 샤워를 할 때도 전화를 받지 못할까봐 핸드폰을 딸기잼 통에 넣어서 욕실에 가지고 들어갔다. 특히 인기 연예인의 경우 매니저도 통화하기가 하늘의 별 따기여서 그들이 전화를 걸어왔다면 나는 무조건 받아야 했다. 매일 전쟁을 치러냈다. 이렇게까지 일을 해서 남는 것은 무엇일까? 일의 목적이란 어디에 있을까? 매번 같은 질문을 하면서도 답을 찾지 못한 채 몇 년을 되돌이표하며 출퇴근 도장을 찍었다.



<변신>의 영업사원 그레고르 잠자의 하루는 새벽 네 시에 시작된다. 기차를 타고 출근해서 쉬는 시간 없이 기계처럼 일을 한다. 그는 “불규칙하고 형편없는 식사, 결코 진실하게 이루어질 수 없는 인간적 교류를 악마가 가져가기를” 바랐지만 전혀 개선되지 않았고, 적성에 맞지 않는 회사를 그만둘 수도 없었다. 사업에 실패한 부모님이 큰 빚을 지게 되면서 집안의 실질적 가장이 되었기 때문이다.


카프카가 살던 20세기 초 노동자들은 매우 열악한 환경에서 일했다. 이주동의 <카프카 평전>에는 1907년 10월 2일, 프란츠 카프카 채용 전문이 나오는데, ‘무조건 의욕적으로 일할 것, 초과 근무 수당은 지불하지 않음, 2년마다 2주간의 휴가’라고 쓰여 있다. 그때나 지금이나 노동권 유린은 변함이 없다. 인간은 계속해서 자본에 착취당하고 있다.


가기 싫은 출근을 앞 둔 아침, 그레고르는 몸이 예전과 같지 않음을 깨닫는다. 께름칙한 예감을 안고 거울을 보는 순간 소스라친다.

“불안한 꿈에서 깨어났을 때
그는 흉측한 갑충으로 변해 있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한다.”



한 순간에 끔찍한 벌레로 변해버린 그레고르의 모습은 언제든지 버려질 수 있는 현대인의 불안하고 초라한 자화상이다. 경제적 의무를 이행하지 못하면 퇴물로 전락할 수 있었다. 능력을 상실하면 소리 소문 없이 사라지는 것이 자본주의의 이치였다. 시청률 저하로 하루아침에 프로그램이 폐지됐고, 윗선에서 마음에 안 든다는 이유로 진행자가 바뀌었고, 메인작가에게 괜한 말실수를 해서 그날로 가방을 싸야했던 막내작가도 있었다. 우리는 멋대로 쓰여 졌고 쓸모가 없어지면 버려졌다.


매몰찬 것은 가족도 예외는 아니었다. 집안의 기둥이었던 그레고르의 변신은 본인뿐만 아니라 모두에게 엄청난 충격으로 다가갔다. 처음에는 노심초사 보살펴주었던 식구들도 점차 그를 귀찮게 여기기 시작한다. 각자 일을 하게 되면서 경제적으로 자립하게 되자, 그레고르의 존재는 더욱 희미해져 갔다. 벌레가 된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저녁 무렵 거실에서 들려오는 가족들의 대화에 귀를 곤두세우는 것 뿐 이었다. 급기야 가족들은 그레고르를 진짜 벌레로 취급하기에 이른다. 아버지는 더 이상 참을 수 없다며 아들에게 사과를 던져 상처를 입힌다. 소외감에 떠밀려 벼랑 끝까지 내몰린 그는 쓸쓸히 죽음을 맞이한다.


공허하고도 평화로운 생각에 빠졌다.
콧구멍에서는 마지막 숨이 힘없이 흘러나왔다.



식구들의 ‘희망’에서 ‘절망’이 된 그레고르는 가족과 단절된 삶을 살았던 카프카 자신의 이야기다. 노동자 재해 보험국의 직원이었던 카프카는 주경야독형 작가였다.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글을 썼다. 내성적이었던 성격 탓에 대인관계 폭이 좁았으며 가족과의 사이도 좋지 못했다. 특히 가부장적이었던 아버지는 아들을 억압했고, 진보적인 그는 반항했다. 부자간의 불화는 평생 이어졌는데, <변신>에서 아버지가 아들에게 사과를 던지는 장면은 실제 부자간의 대결 상황을 극적으로 묘사했다고 볼 수 있다.


체코 프라하, 카프카 묘지

아이러니한 것은 그토록 증오했던 아버지와 카프카가 한 공간에 묻혔다는 점이다. 프라하의 카프카 묘지 앞에서 슬펐던 것은 죽어서 누울 공간마저 원하는 대로 이루지 못한 외골수 작가의 삶이 서러워서였다. 비단 가족뿐만 아니라 절대적으로 혼자 있기를 원했던 그는 결혼도 거부했다. <변신>을 쓸 당시 펠리어 바우어를 만나 잠시 마음을 주었지만 ‘사랑’, ‘글’, 두 가지 삶은 양립될 수 없다며 글을 선택한다. 연금술사들이 모여 사는 황금소로 22번지 작고 낮은 집에서 빛나는 금박들만큼이나 눈부신 글들을 써내려갔다. 일과 글을 병행하며 현실과 이상의 문턱에서 방황했던 불안과 부조리의 편린들을 종이에 눌러 담았다. 가진 것 없는 삶의 유일한 보석은 ‘글’이었다.


황금소로 22번지, 프란츠카프카 하우스
책은 우리 마음 안에 있는
얼어붙은 바다를 깨는 도끼


카프카의 말은 사실이었다. <변신>은 일과 피로에 지쳐 굳어버린 내 심장에 뜨거운 파동을 일으켰다. 생계를 담보로 고단함과 외로움을 숨긴 채 쳇바퀴를 굴려왔다. 상처에 베여도 반창고를 덕지덕지 붙이고 출근했다. 때로는 책과 영화를 보며, 가끔은 여행을 가며 재충전을 했지만 다시 현실이란 거대한 벽에 부딪히면 무너지기를 반복했다. 나는 오뚜기였다. 살짝 건드린 누군가의 손가락에 의해, 예상치 못한 바람에 의해 좌우로 흔들렸지만 항상 같은 자리였다. 넘어져도 그 자리로 일어섰다. 불평·불만을 하면서도 뒤뚱뒤뚱 맴돌기만 했다. ‘안정’이라는 유혹은 시간을 거듭할수록 벗어나기가 더 힘들었다. 사람들은 다들 그렇게 같은 경로를 빙빙 돌며 사는 것이라고 했다. 대체 우리는 왜 오뚜기처럼 넘어지면 곧바로 다시 일어서야 한다고 교육 받았을까. 왜 아무도 넘어진 김에 좀 쉬라고.. 때굴때굴 굴러서 다른 곳으로도 가보라고 가르쳐 주지 않았을까.


어느 날 이런 오뚜기에게도 상상조차 하지 않았던 일이 찾아왔다. 삶의 장점이자 단점은 예상 밖의 상황들이 내 의도와 상관없이 나를 끌고 간다는 점일 것이다. 본의 아니게 독일로 거주지를 옮기게 되면서 하던 일을 모두 그만두게 되었다. 정리를 하면서 제일 먼저 알게 된 사실은 나 아니면 안 될 것 같았던 자리가 빛의 속도로 채워졌다는 점이었다. 허탈하기보다는 오히려 가벼워졌다. 내려놓으니 보였다. 나는 나를 위해서 일을 한 것이 아니라 일을 위해서 일을 했다. 그 충성에 대한 보답으로 보수를 받았지만 설명할 수 없는 궁핍이 떠나질 않았다. 내가 원하는 삶의 모습이 아닌 줄 알았지만 안위를 구실로 잡고 있었다. 그렇다고 중독에 가까운 수준으로 일했던 과거의 나를 부정하지는 않는다. 그런 내가 있었기에 일이 아닌 나를 위해 살아봐야겠다고 다짐하는 지금의 내가 있다.


카프카는 일을 하면서도 펜을 놓지 않았다. 스스로에게 글 쓸 권리를 부여함으로써 자신의 존재를 증명했다. 그는 벌레로 변신한 그레고르를 통해 사람으로 태어나 하고 싶은 일을 하지 못하고 밥벌이의 수단으로만 살아간다면 벌레와 다를 바 없다는 메시지를 전한다. ‘적어도 괴물은 되지 말자’는 영화 대사처럼, 최소한 벌레가 되지 않으려면 나를 위해 살아야 했다. 내게 행복할 권리를 줄 수 있는 유일한 존재는 나 자신이다


https://www.youtube.com/watch?v=SUU11sryuQo&t=160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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