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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행생활자KAI Oct 17. 2020

세상의 모든 딸들은 엄마에게 빚을 졌다

150만원 투자 회수

“딱 백오십만원만 투자해주면 안될까?”


대뜸 엄마한테 투자 제안을 했다.


“너는 갑자기 전화해서.. 백오십만원이 누구 집 애 이름이야? 그 돈으로 뭐 할 건데?“


“노트북 사려고. 나 무조건 사야 돼. 엄마. 꼭 갚을게”


지금이야 1인 1 노트북 시대 일 만큼 노트북이 흔하지만 내가 대학생이던 시절만 해도 학과 컴퓨터실을 이용하는 친구들도 꽤 많았을 만큼 값비싼 전자제품이었다. 투자까지 운운하며 노트북이 필요했던 것은 방송작가가 되기 위함이었다. 일반적으로 방송작가는 프리랜서이기에 방송국에서 개인 PC를 지급하지 않았다. 노트북은 막내든 메인이든 구분 없이 필수였다. 아직 방송작가가 되지는 않았지만, 노트북이 있어야 글 쓰는 연습도 하고 만에 하나 취직이 되면 바로 출근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엄마는 황당했을 것이다. 뜬금표로 전화해서 투자를 하라니. 우리집은 부족하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풍요롭지도 않았다. 즉 흔쾌히 일시불로 노트북을 살만한 여력은 안 된다는 의미였다. 남동생이 막 대학에 입학했고, 의붓 남매들이 고등학생이었다. 돈이 들어갈 데는 많았고 나오는 데는 적었다. 어려운 부탁인 줄 알았다. 그렇지만 엄마 말고는 나한테 투자해 줄 사람이 없었다. 고등학교 때부터 줄곧 방송작가가 되고 싶었다. 어떻게 해서든 졸업하기 전에 취업을 할 것이라고 악다구니를 썼다. 그만큼 절실했다. 엄마도 이 사실은 알고 계셨다. 일단 알겠다고 다음 주에 네 생일도 있고 하니 주말에 집에 한 번 오라고 하셨다.


 하늘이 엄청나게 파랬던 가을로 기억한다. 산들산들 바람에 기분이 날아갈 것만 같은 그런 날씨였다. 나는 엄마와 함께 고향에서 유일한 전자대리점이었던 푸른색 간판의 삼성 프라자에 갔다. 몇 차례의 직원 설명을 들었고 추천하는 가장 최신형 노트북을 샀다. 갑자기 어디서 돈이 났냐고 어디 로또라도 된 거냐고 물었지만 엄마는 끝끝내 말씀하시지 않았다. 돈의 출처보다 노트북이 생겼다는 것 자체가 너무 기뻐서 구태여 더 이상 캐묻지 않았다. 계산을 마치고 생애 첫 노트북을 들고 나왔다. 기기의 육중한 무게는 천군마마를 의미하는 듯해서 전혀 무겁지 않았다. 이미 방송작가가 된 것만 같았다. 무슨 배짱이었는지 그날 엄마에게 무조건 1년 안에 방송작가가 되어서 돈을 갚겠노라 호언장담했다.

 

 예상보다 투자 회수의 기회는 빨리왔다. 말하면 이뤄진다고 했던가. 노트북을 사고 두 달 후에 진짜 방송작가가 되었다. 대학교 3학년 때 취업을 했으니 꽤 빠른 편이었다. 라디오 리포터로 이미 방송국에 발을 디뎠던 나는 관계자분들이 질리도록 말했다. 저는 방송작가가 되고 싶다고, 공석이 생기면 시켜 달라고 엄청나게 들이댔다. 대학교 1학년 때 선배 대신 임시로 시작한 리포터였지만 끈을 놓지 않았다. 방송국 자체가 인맥으로 들어가는 경우가 많음을 수 차게 들었고, 빽도 없고 돈도 없던 나는 어떻게 해서든 이 끄나풀이라도 잡고 있어야 했다.우리 집 형편 상 방송작가 아카데미에 들어갈 만한 돈도 없었기에 나는 전부를 걸었다.  리포터를 그만둘 수 없어서 방학 때 남들 다 간다는 배낭여행도 한 번 못 갔다.  한 겨울에 엄청나게 큰 마이크와 녹음기를 들고 손발이 얼어붙도록 거리 인터뷰를 다녔다. 녹음기가 무거워서 바람에 휘청거려 넘어 진 적도 많았다. 오래된 청바지가 찢어져서 무릎이 까지고 피가 나도 택시를 탈 수 없었다. 최대한 돈을 아껴야 했다. 1시간 거리는 걸어 다녔고, 취재를 위해서라면 새벽이든 밤이든, 산이든 깡촌 시골이든 어디든 갔다. 조금이라도 눈에 띄려고 겨우 10분짜리 원고를 매일 밤을 새며 쓰고 또 썼다.


그러기를 3년째 반복하던 해, 한 프로그램의 작가가 호주로 유학을 가게 되면서 공석이 났다. 그 분들은 꽤 오래 성실히 일한 나를 자연스럽게 떠올렸고 나이는 어렸지만 믿고 일을 맡겨 주셨다. 꿈만 같았다. 내가 방송작가가 되다니.. 꿈을 이루다니.. 볼을 살짝 꼬집어 봤다. 아팠다. 아니 간지러웠다.

 살다보니 현실이 이토록 달콤한 순간도 있었다.

방송국을 나오자마자 엄마한테 전화를 걸었다.


“엄마 나 방송작가됐어!

“뭐라고? 진짜? ...”


엄마는 한동안 말이 없으셨다.

“엄마 듣고있어? 진짜야! 나 취업 했다니까!”


엄마는 흐느끼고 계셨다. 아빠가 돌아가신 이후 한 번도 내 앞에서 우는 모습을 보이신 적이 없었다. 그날 처음으로 딸 앞에서 기뻐서 흘리는 눈물만큼은 허락하셨던 것이다. 엄마에게 나의 취업은 홍수환 선수가 외쳤던 “엄마 나 챔피언 먹었어”와 맞먹는 소식이었다.


 첫 월급은 80만원이었다. 통장에 입금이 되자마자 절반을 갚겠노라 했지만 엄마는 무슨 소리를 하는 것이냐며 한사코 돈을 받지 않으셨다. 그 정도는 해 줄 수 있다고 생일 선물이라 여기고 넣어두라 하셨다.


이후 나는 계속해서 방송작가로서 경력을 쌓아나갔다. 엄마는 내가 하는 프로그램을 빠지지 않고 챙겨 보셨다. 텔레비전에 내 얼굴이 나오는 것도 아닌데 마지막 스크롤에 올라오는 ‘구성-강가희’ 내 이름 세 글자를 보기위해 방송시간이 아침이든 심야든 몇 시가 됐든 본방을 사수하셨다. 실상은 일개 프리랜서였지만 시골에서 딸이 방송작가라는 것은 동네 사람들의 부러움을 한 몸에 사는 일이었고, 나는 엄마의 가장 큰 자랑거리가 됐다. 엄마는 ‘딸'이야말로 인생의 로또라고 말하셨다.



 백오십만원의 출처는 몇 년 뒤에 알게 됐다. 외할머니께서 소천(召天) 하시던 날, 방송국에서 보내온 근조화환을 보며 엄마는 비밀을 털어놓으셨다. 여윳돈이 전혀 없었던 엄마는 자신의 딸을 위해 엄마에게 SOS를 쳤던 것이다. 외할머니께서는 몇 년을 나물 팔아 모으신 쌈짓돈을 선뜻 부치셨다. 손녀를 위함도 있었겠지만 궁극적으로는 자신의 딸을 위함이었다. 무턱대고 150만원을 달라고 했던 나를 퇴짜놓지 못한 엄마와 마찬가지로 외할머니는 딸의 부탁을 외면할 수 없으셨을 것이다. 이 사실을 전혀 알지 못했던 나는 외할머니 살아생전에 감사하다고 표현하지 못했다. 엄마는 말했다면 분명 내 성격상 돈을 갚았을 테고 그것은 외할머니가 원하는 바가 아니었다고 하셨다.


방송국에서 보낸 화환은 장례식장 맨 앞자리, 가장 잘 보이는 곳에 놓여졌다. 미처 전하지 못한 손녀의 마음은 외할머니 가시는 길에 꽃이 되어 동행했다. 그나마 다행이었다. 아주 조금이나마 보답할 수 있어서.. 나는 엄마에게 엄마는 엄마의 엄마에게,


그렇게 세상의 모든 딸들은
엄마에게 빚을 지고 살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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