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독립해서 살았던 집은 보증금 500만원에 월세 50만원짜리 원룸이었다. 대학 동창과 같이 살아서 그나마 월세 부담금이 25만원으로 적었다. 그 친구가 호주로 유학을 간 뒤로는 쭉 혼자 살았는데, 서울살이는 쉽지 않았지만 돈을 모아서 차츰 괜찮은 집으로 이사 가는 재미가 있었다.
27살이 되었을 때, 보증금 3천 만원 정도의 돈이 모아졌다. 좀 더 넓은 곳으로 이사를 가고 싶어 이리저리 알아보던 중 ‘피터팬 좋은 방 구하기’라는 인터넷 카페를 알게 됐다. 직거래이기 때문에 복비가 없다는 것이 가장 큰 이점이었고 한 푼이라도 아끼고 싶은 마음에 자주 카페를 들락날락하며 방을 찾아봤다. 며칠 밤을 새우며 검색한 끝에 응암동의 한 원룸이 내 눈에 포착됐다. 역세권이었고 남향이었다. 무엇보다 가격이 시세보다 저렴해서 바로 집주인에게 연락을 했고 다음날 집을 보러 갔다.
직거래인지라 집주인이 나올 줄 알았으나 실장이라는 분이 응대를 했다. 그렇다고 부동산 중개인도 아니었다. 이 사람의 분위기와 정체가 어딘가 모르게 수상했지만, 일단 안내에 따라 집을 둘러봤다. 건물 자체가 지은 지 오래되지 않아서 깔끔했고, 인터넷 설명대로 채광이 좋았다. 특히 작지만 베란다가 있다는 사실이 나를 흥분케 했다. 뜬금없지만 당시 김동률의 <베란다 프로젝트>라는 앨범이 나오면서 나만의 베란다에 대한 환상이 생겼고, 매번 방 안에서 빨래를 말리는 것도 지긋지긋했다. 장마철이면 집안에서 풍기는 그 쾌쾌한 냄새, 눅눅한 공기가 만들어낸 가난에서 탈출하고 싶었다.
베란다 때문인지 뭐에 홀린건 이미 마음의 결정이 섰다. 집이 마음에 쏙 들었고 혹시 월세를 5만원만 깎아 주시면 안 되냐고 은근슬쩍 물었다. 안되면 말고, 밑져야 본전으로 던졌는데 흔쾌히 그렇게 해주겠다는 답이 돌아왔다. 아니 이게 무슨 횡재냐 싶었다. 기회를 놓치면 후회할 것 같아서 부랴부랴 가계약서를 썼다. 바로 계약금의 10%인 3백 만원을 집주인 통장에 보냈다.
이 날은 마치 소설 <운수좋은 날>과 같았다. 후회의 패턴이 늘 그렇듯 되돌아보면 모든 것이 이상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실장도, 집주인과 상의도 하지 않고 바로 월세를 깎아주겠다는 것도 의심을 해봤어야 했다. 하지만 내 눈엔 5만원 절감과 베란다만 보였다.
계약을 하자마자 엄마한테 얘기를 했더니, 등기부 등본은 떼어 봤냐는 질문이 제일 먼저 돌아왔다.
“등기부등본......?!”
사회 초년생에게 등기부등본과 같은 부동산 용어는 매우 낯선 단어였다.
“아..니..... 근데 뭐 큰 일 있을까?”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이미 세상 모든 불안감이 나를 덮치고 있었다. 전화를 끊자마자 부리나케 등기부 등본은 떼어봤다.
세.상.에. 그 집엔 근저당이 어마어마하게 잡혀 있었다. 서류가 엄청나게 복잡했다. 그때서야 뭔가 잘못 돌아가고 있음을 파악했다. 원룸 근처 다른 부동산에 들어가 물어봤더니 내 놓은지 벌써 1년이 지나도록 안 나가는 집이라고 했다. 집주인이 위층에 살고 있다는 말이 떠올라 문을 두드려봤지만 빈집이었다. 근처 가게에 물어보니 사람이 원래 살지 않는다고 했다.
앗뿔사. 사기를 당한 것 같았다. 하늘이 노랬다. 물론 계약서를 다 쓰진 않았기 때문에 3천 만 원은 보전되어 있지만 계약금으로 보낸 3백만원이 문제였다. 떨리는 손으로 실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최대한 놀란 가슴을 누그러트리고 계약을 취소하고 싶다는 의사를 밝혔다. 그 분은 알겠다고, 일단 내일 만나자고 했다.
이때부터 별의별 생각이 다 들었다. 어쨌든 가계약서를 썼으니 돈을 돌려받지 못하면 어떡하지, 혹시 무슨 법적 책임이 내게 있는 것은 아닌지.. 잠이 안 왔다. 서울은 눈뜨고 코 베이는 도시라는 말이 실감 났다. 갑갑하고 막막했다. 세상 똑똑한 척 다했던 나는 여전히 세상물정을 모르는 아이였다. 엄마는 아무래도 어른이 같이 가는 게 낫겠다며 서울 이모부에게 도움을 요청했고, 다음 날 이모부와 함께 실장을 만났다.
“우리 딸이(이모부가 아버지인 척 연기를 했다.) 잘 모르고 계약을 한 모양인데요. 제가 부동산 등기부 등본을 봤더니 아무래도 근저당이 너무 많이 잡혀서 계약을 취소해야겠습니다. 해도 해도 이건 너무 하지 않습니까? 이런 건 미리 알려주셨어야지요.”
이모부의 풍채가 기선 제압을 한 것일까.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실장은 순순히 계약금을 돌려주겠다고 했다. 휴... 삼년 묵은 체증이 풀린다는 말은 이럴 때 쓰는 것이었다. 겨우 긴장이 풀렸다. (아직도 그 실장이라는 사람의 정체가 궁금하긴 하다.) 이모부에게 감사의 말을 전하고 잔뜩 풀이 죽어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엄마 돈 돌려받았어. 진짜 미안해. 걱정만 끼쳐서....”
당시 나는 엄마의 잔소리 백만 그릇을 먹을 준비가 되어 있었다. 다 큰 사회인이 부동산 계약 하나 제대로 못하냐고, 그렇게 경거망동하게 행동해서 어떻게 인생을 살아 갈 거냐고. 만날 혼자 잘난 척 하더니 꼴 좋다고.. 나 같았으면 분명 그랬을 텐데 엄마는 전혀 화를 내지 않았다. 비슷한 기색 조차 없었다.
“돌려받았으면 됐다.
살다보면 이거보다 더 큰 일도 생길 수 있다.
이건 아무것도 아이다. 액땜했다고..
반면교사로 생각하자.
절대 실수가 아이다. 하나 배운거다.
밥은 먹었나? 얼른 저녁 챙겨 먹고 자.“
‘실수가 아니야, 하나 배운거야’. 나는 순간 뭉클해져서 아무런 대구도 할 수 없었다. 엄마의 사전은 항상 밝은 쪽으로 해석됐다. 모든 문제들이 엄마에게 입력되면 긍정적으로 도출되었다. 어떤 나쁜 일에도 부정적으로 말씀하지 않았다. 한결같이 배워가는 과정이라고 하셨다.
엄마는 가난한 형편 탓에 학교를 길게 다니지 못했다. 나는 엄마에게 국어나 영어, 수학 같은 것을 배워 본 적이 없다. 그렇지만 매순간 삶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잊힐만하면 찾아오는 고비를 어떻게 넘겨야 하는지를 늘 말없는 실천으로 보여주셨다. 그것은 어떤 책에서도, 학교에서도 가르쳐주지 않는 것이었다.
가끔은 궁금했다. 대체 그 무한 긍정의 힘은 어디에서 나온 것일까? 엄마의 삶은 결코 밝지 않았다. 오히려 잿빛 투성이에 가까웠다. 그렇다면 엄마는 장막으로 가려진 어두움마저 빛으로 감싸 안는 특유의 따뜻함을 타고난 것일까. 초등학교 1학년 때 나는 엄마 얼굴이 햇님같다고 생각했다. 백일장 대회에 나가 처음으로 쓴 동시 제목이 ‘엄마 얼굴 햇님 얼굴’이었다. 그때 이미 엄마로부터 영원히 고갈되지 않는 태양의 에너지를 느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세상은 자주 나를 속였지만,
나는 결코 속지 않았다.
강렬한 엄마의 태양 때문이었다.
그 찬란한 빛 덕분에 내 삶은 그늘지지 않았다.
삶을 긍정하는 힘은 엄마가 주신
가장 위대한 유산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