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작기 독일
바야흐로 설국이었다. 하얀 눈으로 덮인 산이 병풍처럼 우리를 둘러쌌고 엄마와 나는 신선 마냥 그 아래 뜨거운 온천에 몸을 담갔다. 지상낙원이 존재한다면 바로 지금, 이곳일 거라고 생각했다. 머리는 시원했고 몸은 따뜻했다. 엄마는 이보다 더 좋을 수 없다는 황홀경의 표정으로 몸을 반쯤 누이고 있었다. 일본 벳부 여행의 마지막 날, 모든 것이 완벽했던 분위기를 깨트린 이는 다름 아닌 나였다.
“니 방금 뭐라 그랬노?! 독일? 독일을 간다고?”
엄마는 너무 놀란 나머지 순간 일어섰다가 물에 미끄러져 다시 탕으로 풍덩-빠졌다.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물로 얼굴을 다시 한 번 씻어내고 재차 물었다.
“니 엄마 심장마비로 죽는 꼴 보고 싶나! 자다가 봉창을 두드려도 유분수지, 무슨 말인데?!
이말 할라꼬 내보고 일본 여행 가자고 꼬셨나?!”
앙칼진 목소리가 조용했던 온천장을 울렸다. 음성에는 서운함을 넘어선 서슬 퍼런 칼이 들어가 있었다. 20대 후반부터 툭하면 해외여행을 가던 딸이 내심 불안했다. 어디를 그렇게 토끼처럼 뛰어다니냐며 핀잔도 줬다. 이제 결혼을 했으니 예전처럼 혼자 다니지는 않겠지 안심한 게 2년도 채 되지 않았다. 그런데 이번에는 며칠 여행을 가는 것도 아니고 저 멀리 독일로 몇 년을 살러가겠다니 엄마 입장에서는 기가 찰 노릇이었다.
같은 일이 반복되는 회사 생활에 염증을 느낀 남편은 유학을 통해 제2의 인생을 꿈꾸고 있었다. 나 역시 선택이 달가웠던 것은 아니다. 6개월을 투쟁했지만 치밀하게 계획된 의지를 꺾을 수 없었다. 결국 이제 겨우 30대 중반인데 한 번쯤은 다르게 살아봐도 되지 않겠느냐는 결론에 이르렀고, 그날 저녁 엄마에게 우리의 결심을 전달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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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온천 여행은 이 폭탄을 던지기 위한 밑밥이었다. 도무지 온전한 상황에서 말할 자신이 없었다. (물론 독일로 가기 전 엄마와 추억을 쌓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여행을 빌미로 최대한 좋은 기분을 이끌어 낸 뒤 말씀 드릴 심산이었지만, 배경이 근사하다고 해서 폭탄이 초콜릿이 될 수는 없었다. 폭탄은 폭탄일 뿐이다. 엄마는 히로시마급 폭격으로 거의 쓰러지기 직전이었다.
죄송하다는 말 외에 뭐라고 할 말이 없었다. 이미 결정을 했기에 사실상 통보에 가까운 말이었다. 엄마도 알고 있었다. 다 큰 성인이고 결혼까지 한 딸의 결정을 막을 수 없다는 것을. 그렇지만 인정하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엄마는 거듭 물으셨다. 꼭 가야 하냐고, 너는 안 가면 안 되냐고.
나는 엄마 품에서 태어났지만 차츰차츰 더 멀리 떠나갔다. 대학에 진학하면서 처음 집을 떠났고, 취업을 하게 되면서 완벽히 둥지로부터 독립했으며, 결혼을 함으로써 나만의 보금자리를 만들었다. 멀리멀리 날아가는 딸을 엄마는 늘 지지했다. 하지만 이번엔 좀 달랐다. 활공의 반경이 국내인 것과 국외인 것에는 큰 차이가 있었다. 그것은 언제든 보고 싶을 때 보지 못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엄마, 어차피 한국에 살아도 일 년에 몇 번 보는 게 다잖아. 멀리 떨어져 있다고 생각하지 마. 영상통화하면 되지. 1년에 한 번은 한국에 올게. 중간에 엄마가 독일에 놀러 와도 좋고.. ”
이때 만해도 물리적 거리의 아득함을 실감하지 못했던 나는 어른인 것처럼 엄마를 다독였지만 소용없는 일이었다. 폭탄 때문인지 온천의 열기 때문인지 엄청나게 울그락 불그락 달아오른 엄마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저 멀리 설산에서 밀려온 눈바람마저 그 열을 식힐 수 없었다. 뚝. 뚝. 어디선가 물 떨어지는 소리만이 이 정적을 채웠다.
난감했다. 엄마한테 무슨 말을 해야 할까. 미안한 마음뿐이었다. 나 역시 이역만리 외국에서 살아가야 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 엄마를 비롯한 가족, 친구들을 못 보게 된다는 막막함이 밀려와 칠흑 같은 밤하늘만큼이나 깜깜했다.
누구도 깨지 못할 것 같았던 두터운 침묵을 깬 것은 때 아닌 ‘지진’이었다. 갑자기 벳부 근처에 지진이 발생했다는 소식이 전해지면서 우리는 옷을 입는 둥 마는 둥 부랴부랴 온천탕에서 나왔다. 이거야말로 아닌 밤 중에 홍두깨였다. 지진이라니.
자세한 현지 소식을 들을 수 있을까 해서 온천 로비로 갔다. 데스크는 이미 인산인해였다. 누군가는 어딘가로 전화를 했고, 직원에게 문의를 하거나 화를 내는 모습도 보였다. 얼마 전 일본에서 큰 지진이 있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더 민감했다. 다행히 이번 지진은 경미했고, 안심해도 된다는 말을 거듭 확인한 뒤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며 객실로 돌아왔다.
예기치 못한 지진으로 독일은 완전히 덮어졌다. 살다 살다 지진이 구원투수가 될 줄이야. 일단 급한 불은 껐다 싶었다. 서운함과 화가 연소되기만을 기다리면 될 것이었다. 이런 내 마음을 눈치챘을까. 나란히 누워 있는데 엄마가 먼저 말을 꺼냈다.
“딸! 너는 지진에 고마운 줄 알아라. 아무튼 운도 좋아.
지진에 놀라고 독일에 놀라고 오늘 심장이 살아남질 않겠네. 니가 독일에 가도 우리가 살아 있으면 만나겠지. 안 그렀나?
그 나라는 지진 없제? 안전하제? 그럼 됐다.
니는 그동안 엄마한테 말도 못하고 혼자서 얼마나 마음고생을 했겠노. 홍서방은 내 딸 데꼬 독일까지 가서 고생시키면 알아서 하라케라.
엄마 걱정은 하지 마라. 니만 잘 살면 된다.
자자. 불꺼라.”
마치 츤데레처럼 딸이 평생 잊지 못할 주옥같은 멘트를 남기고 홀연히 깊은 잠에 드셨다. 고단했던 오늘을 증명하듯 낮게 코 고는 소리가 방을 울렸다. 정작 폭탄을 던진 당사자는 마음에 미진(微震)이 일어 잠을 이룰 수 없었다.
만약 나였더라면 이 상황에서 독일의 지진 여부를 걱정할 수 있었을까. 지진에 직면할 수도 있었다는 아찔함, 딸이 나를 두고 독일에 간다는 서운함만 왕왕 들었지 이 두 가지를 엮어서 딸의 안위로까지는 생각이 미치지 못했을 것 같다. 여기에 더해 딸이 마음고생했을 것까지 챙기는 김석자 씨의 포용력은 대체 얼마나 큰 것일까. 끝이라는 지점이 있기는 한 것일까? 엄마 말처럼 나는 운이 무지하게 좋은 사람이다.
이토록 근사한 당신 딸로 태어났으니까..
창밖으로 함박눈은 계속해서 내리고 있었다. 밤사이 조용히.. 소복이.. 쌓여 갈 것이다. 더럽혀지지 않은 하얀 결정체, 그 끝없는 순도 100%의 속성은 엄마 마음과 닮아있었다. 흰 눈에 엄마 얼굴을 비춰봤다. 오래도록 바라보았다. 독일은 눈이 많이 올까? 그랬으면 좋겠다. 눈을 보면 엄마 얼굴이 좀 더 생생하게 떠오를 것 같다. 눈의 기억 덕분에, 눈을 감아도 엄마가 눈에 보일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