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상실의 시대에 사는 우리가 추구하는 것은..

작지만 확실한 행복

by 여행생활자KAI
“봄날의 곰만큼 네가 좋아”


내가 무라카미 하루키를 좋아하는 첫 번째 이유는 나의 청춘이기 때문이다. 풋풋했던 여고시절, 첫사랑과 난 <상실의 시대>를 서로에게 선물하며 책 페이지에 담긴 낯간지러운 문장들을 서로에게 고백하듯 보냈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문장들을 빌려 마음을 이야기했던 것이다. 지금 생각하면 피식 웃음이 나는 유치찬란한 사랑놀이였지만, 그때는 나름 진지했으며, 곱씹어 생각해보면 내 생애 가장 순수했던 가식 없는 애정표현이었다.


연애소설로만 생각했던 <상실의 시대>를 20대에 꺼내들었을 땐, ‘상실’이란 단어가 좀 더 내 마음에 줌(zoom in)되었다. 많은 이들이 그러하듯 첫사랑은 이미 끝났으며, 부모로부터 받기만 했던 성장기를 지나 처음 사회란 거대 장벽을 마주하면서 인간이란 고갈 혹은 퇴화되어 상실할 수 있음을 알았다. 자존심도, 인간성도, 가치관도, 상실 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진 것들이 참 많았고 사랑역시 여기서 비껴나갈 수 있는 단어가 아니었다.


30대에 이 책을 펼쳐들었을 때는 상실 그 후에 찾아오는 허무함을 알게 되었다. 사랑과 상실, 허무로 가득한 <상실의 시대>...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 책을 떠올리면 첫사랑이 가장 먼저 떠오른다. 무엇이든 처음의 경험이 가장 강렬한 것이니까.


내가 무라카미 하루키를 좋아하는 두 번째 이유는 그가 만들어낸 주인공들의 라이프스타일이다. 요즘 유행하는 작지만 확실한 행복, '소확행(小確幸)'은 그의 초기작에서 나왔다. (무려 30여 년 전에 트렌드를 예감한 작가라니.) 그들은 혼자 있기를 좋아하고, 클래식과 재즈를 즐겨 들으며, 간단한 재료로 파스타를 해먹고, 건강을 위해 달리기를 한다. 달리기만큼 온전히 혼자 즐길 수 있는 운동도 없다. 타인의 시선에 크게 신경 쓰지 않으며 크게 외로워하지도 않고 크게 기뻐하지도 않는 담담한 성격을 가진 주인공들이 마음에 들었다.


무미건조해 보일 수도 있는 그들이 행복해보였던 건 책 제목처럼 <이렇게 작지만 확실한 행복>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이 내게 ‘여행’이었고, 이번 일본 여행을 계획하면서 소확행의 일환으로, 일본어판 <상실의 시대>를 사리라 마음먹었다. 물론 일본어 수준이라고는 히라가나만 읽을 줄 아는 정도지만 그냥 내 서재 책장에 두고 싶었다. 일종에 지적 허영심이랄까.. 때때로 책은 읽는 것이 아니라 보는 것만으로도 행복할 때가 있다. 다 읽지 않았기에 완벽히 내 것은 못되었지만, 언젠가 내 것으로 만들고 싶은, 나만 소유하고 싶은 그런 책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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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적 허영심을 좀 더 완벽하게 채우고자 안도 다다오가 설계한 것으로 유명한 <마루젠&준도코 서점>에서 이 책을 사기로 했다. 세계적인 건축가의 작품이기에 엄청 화려할 것을 기대한다면 실망할 수 있다. 오히려 너무 단순해서 처음엔 왜 이 서점이 유명한지 고개를 갸우뚱 할 수도 있지만 그래서 더 완벽하게 책을 위한 공간이기도 하다. 군더더기 하나 없이 서점의 기능을 살린 내부는 마치 도서관을 연상케 했다.


간혹 책이 아닌 장식이나 인테리어가 주인공으로 느껴지는 서점이 있는데, 이곳은 오직 책이 주인공이어서 좋았다. 수많은 책들이 참 잘 어울리는 자리에 위치하고 있었다. 어떻게 하면 책이 돋보일 수 있을까를 고심한 흔적이 역력했다. 꼭 맞는 자리에 앉은 수많은 주인공들 가운데, 무라카미 하루키의 <상실의 시대> 일본어판을 골랐다.


책을 집어 든 순간 나는 “소확행”, ‘작지만 확실한 행복’을 누렸다.

이 책을 두고두고 보는 것만으로도 행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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