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나를 위한 여행에서 '둘'을 떠올렸다

by 여행생활자KAI

눈 내린 온천 마을에서 일어나는 조용한 러브스토리,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설국>의 주요 배경은 일본의 전통 숙박 시설인 료칸이다. 이 책을 읽은 후 료칸에 대한 동경이 생겼다. 작가가 그려낸 료칸의 이미지가 비현실적이면서도 신비롭게 다가왔다.


일본식 정원, 다다미방, 화려함의 극치를 보여주는 가이세키 만찬..에도시대부터 이어진 일본 고유의 문화를 실제로 마주하면 어떤 기분일까. 완전한 고립이야말로 역설적으로 무한한 자유를 선물하기도 한다. 나는 저 멀리 외딴곳에 자리한 료칸에서 나만의 내적 자유를 누려보고 싶었다.


교토 외곽의 지하철역에서 내려, 다시 송영버스를 타고 구불구불 오르막길을 오르고 오르면 전혀 건물이 들어설 수 없을 것만 같은 자리에 료칸이 다소곳하게 고개를 내민다. 마치 소수의 사람들만 아는 비밀의 숲에 당도한 느낌은 덤이라면 덤이다. 이곳에선 중간에 나가고 싶어도 나갈 방법이 없을 것 같았다. 자발적으로 나 스스로를 가둔 셈이다. 아이러니하게도 한 발자국도 나갈 수 없는 이곳에서 나는 자유로움을 느꼈다.


도착한 순간부터 배어 나오는 고택의 향기에, 내 코끝은 료칸의 운치를 알아차렸다. 기대했던 대로 모든 것이 환상적이었다. 고즈넉한 다다미방에 머무르며, 계곡이 흐르는 정자에 앉아 잘 차려진 정식을 먹고, 게이샤의 공연을 관람하고, 달빛을 받으며 온천을 하는 일련의 상황들은 21세기가 아닌 에도시대의 어느 중간 즈음에 머무르고 있는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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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불어 너무 친절한 사람들, 너무 맛있는 음식들, 너무 좋은 풍경들, 너무 편한 서비스.. 과연 이런 장소가 세상에 또 있을까. 너무 좋아서 너무한.. ‘너무’라는 말이 지나칠 정도로 남발될 수밖에 없는 장소였다.


칠흑 같은 밤, 유일한 소리는 바람결뿐이었던 그곳에서 유카타를 벗어 던지고, 별빛에 일렁이는 온천에 몸을 담근 채, 수면 너머로 보이는 숲을 마주했다. 물끄러미 창밖을 바라보고 있자니, 토미오카 다에코의 <새살림>이 떠올랐다.


당신이 홍차를 끓이고, 나는 빵을 굽겠지요/ 붉게 물든 달이 떠오르는 것을 보고서야/ 그것으로 그뿐...


‘진심’, 그러니까 진짜 나의 마음은 편안함을 느낄 때 가장 먼저 나오는 감정의 이름일 것이다. 온전한 자유를 느껴보겠다며 이곳까지 찾아온 나는 이 안락함 속에서 사랑의 시를 떠올렸다. 마당이 있는 작은 집, 그 안에서 아내는 빵을 굽고 남편은 홍차를 끓이는 장면은 상상만 해도 평화롭다. 결혼이란 것은 ‘구속’보다는 ‘편안함’에 좀 더 가까운 단어라는 생각을 이 날 처음 하게 됐다.


료칸에서의 하룻밤은 완벽한 고립 속에서 완벽한 자유를 느낌과 동시에, 결혼이란 정해진 제도의 틀 안에서 내 스스로 자유로워질 수 있는 무엇을 찾아낸 시간이었다. 살아보니 결혼이란 것은, 토미오카 다에코의 시처럼 사소한 일을 함께 나누고 사소한 생각을 공유하는 일이었다. 때로 악을 쓰고, 미워죽겠다가도 손을 내밀면 마주잡을 수 있는 말 없는 친밀함 역시 결혼의 진짜 얼굴이었다.

사소한 친밀함의 나날들은 켜켜이 쌓여 그와 내가 인생의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는 다리가 되어 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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