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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행생활자KAI Nov 25. 2020

브런치 독자로부터 받은 한 통의 편지

친애하는 독일에 사는 한국 프라우(Frau, 여성)님들에게

                             

며칠 전 한 통의 이메일을 받고 한동안 멍 했습니다. 마음이 감화하여 심장이 핑크빛으로 물들어 갔습니다. 브런치를 통해 전해 온 익명의 그 편지는 연애편지에 버금 갈 만큼 저를 들뜨게 했습니다. 수줍은 고백도, 희망 섞인 합격 소식도 아닌 저와 마찬가지로 독일에 사는 한 여성 분의 격려가 담긴 편지였습니다.


몇 년의 세월 즈음 금방 지나간다고, 그러니 너무 조급해 말라고, 천천히 나의 길을 가라고.. 오랜 경험에서만 나올 수 있는 고매한 문장 한 줄 한 줄이 온 몸에 맥박처럼 뛰었습니다. 한 번도 보지 못한 어떤 이의 외로움을 헤아려주는 또 다른 어떤 이가 같은 땅을 딛고 있다는 사실은 무한한 위로, 그 자체 였습니다.



생각해 봤습니다. 과연 나라면 전혀 알지 못하는 불특정인에게 마음을 다해서 편지를 보낼 수 있었을까? 솔직히 말하건데 소심하고 수줍은 저로서는 시도조차 못했을 일입니다. 그래서 더욱더 그 분의 마음은 특별했습니다.


돌이켜보면 척박한 이 나라에서 우왕좌왕 하는 외로운 영혼이 온전히 발을 디디며 살 수 있었던 것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알뜰살뜰 챙겨주셨던 독일에 사는 한국의 프라우들 덕분이었습니다. 고맙다는 말로는 부족한 고마움을 받은 지난 날이었기에 한 번쯤은 저도 표현해 보고 싶었습니다.


어떤 이는 작은 댓글 하나에 손수 만든 마스크를 보내주셨고, 또 어떤 이는 제 애로사항을 마치 내 일처럼 여기며 일일이 정보를 찾아봐 주셨습니다. 꼭 큰 일이 아니더라도 블로그를 통해 인연이 닿은 이웃님들과 소소하게 독일의 정서와 문화를 공유하며 시시콜콜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는 것 자체가 큰 은혜였습니다. 그것은 키 작은 까만 머리의 동양인 아줌마가 덩치 큰 게르만족들 사이에서 정착할 수 있었던 에너지였습니다.


 그 말없고 위대한 존재감이 저를 살게 했습니다.

우리가 어떤 사람들인가요.

마트에서 맛있는 음식 혹은 한국 식품과 유사 제품이 발견되면 쏜살같이 랜선 이웃들과 공유합니다. 집을 구해야 할 때도, 독일어가 궁금할 때도, 아이가 아플 때도, 긴급 상황이 생겼을 때도 독일에 사는 한국 프라우들은 함께 머리를 맞대고 어떻게 해서든 해결을 이끌어 냈습니다. 생활에서 나온 아줌마의 지혜와 기지가 번뜩이는 순간이 많습니다. 그래서 일까요. 언젠가부터 전 아줌마,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아줌마들이 모여서 만들어 낸 힘을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아줌마라는 이 단어가 전혀 억세게도, 우격다짐으로도 느껴지지 않습니다. 독일에 사는 한국 아줌마의 힘을 자주 확인 했습니다. 아줌마, 프라우들이 가진 집단 지성의 힘은 이방인들이 정착할 수 있는 토대가 되어 주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대체 그 힘은 어디에서 연유하는 것일까요? 우리는 얼굴 한 번 보지 못했지만 독일에 사는 한국인 여성이라는 공통점 하나 만으로 서로의 마음을 보듬고 살아갑니다. 만나본 적도 없는데 그저 보이지 않는 랜선으로 연결되어 있을 뿐인데, 그 유대감은 절대 끊어 지지 않는 끈으로 똘똘 뭉쳐 있습니다. 여기엔 경제, 사회, 정치 이런 논쟁을 뛰어 넘는 어떤 보편적인 정서가 있습니다. 사실 ‘여성의 유대’ 혹은 ‘우정’이라고 밖에  설명할 길이 없습니다.




‘여성들의 우정’이 처음 기록에 등장한 것은 12세기 독일 빙겐의 수녀원장 힐데가르트 폰 빙엔(1098~1179)과 수녀들입니다. 서독 빙겐의 수녀원장이자 철학, 음악 등 다방면에 박학다식했던 그녀는 어머니 같은 존재로 수많은 수녀들을 이끌어감과 동시에 따뜻한 우정을 나누었던 것으로 전해집니다.

여성 최초의 우정이 기록된 독일이란 나라에서 ‘한국에서 온 여성’이라는 그 공통점 하나로 우정의 역사를 써 나가는 일은 참으로 경이롭습니다.


"하늘로부터 매우 밝은 빛이 내 침상에 쏟아져 내렸는데,
그 빛은 마치 타 들어가지는 않으면서 빛나기만 하는 불꽃같았다.
그 불꽃은 태양처럼 내 심장과 가슴을 따뜻하게 해주었다."



헬데가르트 폰 빙엔은 개시를 받았을 때의 경험을 이렇게 포현했습니다. 감히 그에 비할 바는 못되지만, 독일에 사는 한국 프라우들과의 직간접적인 정서적 교류들은 태양처럼 제 심장과 가슴을 따뜻하게 해주었습니다.



독일에 사는 한국 프라우들의 모습은 제각각입니다. 어떤 프라우는 수많은 역경을 통과해 현재의 삶을 누릴 수도 있고, 또 다른 어떤 프라우는 지금 이 순간이 번민 자체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다만 변하지 않는 진실은 그때의 내가 있기에 지금의 내가 있는 것이겠지요. 훗날 지금 독일에서의 삶을 긍정이든 부정이든 편안한 마음으로 상기시켜볼 수 있는 때가 오리라 생각 합니다.  


좀처럼 걷힐 것 같지 않던 겨울의 안개 속에서도 한 줌의 햇살은 찾아옵니다. 시린 겨울에도 하얀 낭만이 있기 마련입니다.

쉽지 않은 계절을 통과하는 내내 우리는 함께해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 생각하면 마음 한 편이 든든해 집니다. 사실 저는 이미 많은 프라우들의 온기로 충만해졌습니다. 그런 면에서 독일에서의 제 삶은 꽤 괜찮은 것 같습니다. 그렇지 않나요?

문득 창밖을 내다봅니다. 곧 첫 눈이 올 것 같습니다.  아주 작은 결정체들이 모여 흰 눈이 만들어졌다고 생각하니, 역시 세상은 결코 홀로 아름다울 수는 없나봅니다.                                              



다시 한 번 익명의 독자분에게 감사의 말씀을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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