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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행생활자KAI Jan 12. 2021

위대한 칸트의 후예, 독일의 인간CCTV

‘어? 또 나오셨네. 눈이 마주친 것 같은데..아닌가..’


눈길이 스치려는 찰나 행여나 들킬까 얼른 외면했다. 코로나 이후 집안에 오도카니 앉아있는 시간이 급격하게 늘면서, 작업을 하다가 집중이 잘 안될 때면 창 밖을 바라보는 습관이 생겼다. 도로변에 있는 건물 구조 상 이따금씩 맞은편 건물의 사람들이 보일 때가 있었는데, 나는 예기치도 못한 풍경의 규칙성을 발견했다.


할머니·아버지들은 마치 약속이나 한 듯 비슷한 시간에 창틀에 몸을 기대고 얼굴에 턱을 괸 채 바깥을 바라봤다. 보통 오전 10시, 오후 1시, 오후 3시, 오후 5시다. 대체적으로 시간을 칼같이 지킴으로써 그들은 위대한 칸트의 후예임을 몸소 증명하고 있었다. (그렇다고 모든 독일 사람들이 시간 약속을 잘 지킬 것이란 기대는 하지 않는 것이 좋다.)


처음에는 담배를 피우시나? 생각했지만 그것도 아니었다. 그저 멍하니 바라보는 것이 전부다. 사색 혹은 이를 빙자한 감시다. 2시간 간격으로 창밖을 관찰하는 이들은 말로만 듣던 독일의 인간의 CCTV 였다.

 CCTV의 나라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만큼 아파트, 편의점, 학교, 골목 곳곳에 감시의 눈이 분포하는 한국과 달리 독일에서는 오히려 카메라를 찾는 것이 더 어렵다. 기껏 해봐야 대형마트나 백화점 정도다. 대신 아파트 및 건물의 경우 소위 인간 CCTV라 불리는 이들이 광범위하게 포진해서 활약하고 있다.


좋게 말하면 이웃에 대한 관심, 나쁘게 말하면 지나친 관섭이라고도 할 수 있는 인간 CCTV는 특히 내가 살고 있는 동독 지역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과거 사회주의 체제의 구동독 시절, 정부는 ‘슈타지(Stasi)’라는 이른바 비밀경찰 제도를 운영했다. 비밀경찰들은 대부분이 민간인이었고, 교묘하게 이웃이 이웃을 감시하게 만들었다. 어르신들의 경우 어느 정도는 그 때의 습관이 남아있다고도 볼 수 있다. 사생활을 중요하게 생각한다는 이 사람들의 평소 가치관과는 심하게 상충되는 부분이지만, 살다보면 이런 아이러니가 한 둘이 아니기에 인생 자체가 모순이라 여기며 받아들이는 쪽이 정신 건강에 이롭다.


카메라 사각지대인 독일에서 인간 CCTV들이 역할을 톡톡히 해내는 것도 부정할 수는 없는 사실이다. 블랙박스 자체가 허용이 안되기 때문에 교통사고 시 목격자로서 증인 역할을 담당할 뿐만 아니라, 강력한 준법정신을 가동해 이웃이 쓰레기를 딴 곳에 내다 버리진 않았는지, 건물 내 규칙을 어기지는 않았는지 명명백백 밝혀낸다. 투철한 신고 정신 기능까지 탑재해서 이웃에게 다정한 주의를 주기보다는 조용히 바로바로 경찰에 신고하는 기지를 발휘한다. 물론 젊은 사람들은 분리수거까지 일일이 잔소리 하는 노인들로부터 꼰대의 냄새를 맡을 수도 있다.


  이웃을 감시하는 인간 CCTV가 처음엔 불편했지만 보다보니 한편으로는 연민이 갔다. 결국엔 그들도 외로웠던 것이 아닐까. 한국도 독일도 아마 전 세계의 노인들이 비슷할 것이다. 외로운 사람들이 넘치는 세상이다. 홀로있는 집안이 적적해서.. 창밖을 바라보는 것 외에는 딱히 어떤 소일거리도 없어서..한없이 늘어지는 시간을 견딜 수 없어서...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는 적요함을 시시때때로 움직이는 거리의 역동을 통해 매우고 싶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가끔 나도 멍하니 창밖을 바라본다. 신호등이 빨강에서 초록으로 바뀐다. 사람들이 횡단보도를 건너간다. 아무 일 없다는 듯 유유히 일정한 보폭으로 나아간다. 다시 빨강으로 신호가 바뀌면 이번엔 자동차들이 쌩쌩 지나간다. 규칙적으로 일상적으로 지나가는 찰나의 순간들을 보고 있노라면 묘하게 평화가 깃들었다. 굴러가는 자전거 바퀴들을 보노라면 삶이 그럭저럭 잘 굴러가고 있는 것도 같았다. 세상이 썩 나쁜 것 같지 않았다.


노인들 역시 나와 비슷한 생각을 했을거라 짐작해본다. 아장아장 엄마 손을 잡고 걸어가는 아이의 잔망스러운 발걸음을 보며, 트램 정류장에 잠시 앉았다 날아가는 나비를 보며, 어김없이 아침 7시면 문을 열고 빵 굽는 냄새를 풍기는 베이커리를 보며, 삶의 역동성을 포착한다. 나 홀로 살아가고 있는 것이 아님을 각개 전투를 달리고 있는 것처럼 보여도 세상은 다 같이 모여 둥글게 둥글게 원을 굴리며 돌아가고 있음을 창문으로 들어오는, 살아있는 날 것의 공기를 통해 느끼고 있음이 분명했다.


 언젠가는 오후 1시가 지나서도 할아버지가 나타나지 않았다. 내심 걱정이 일었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일상 한 모퉁이에 그가 들어와 있었다. 혹시나 무슨 일이 생겼을까. 괜스레 초조함으로 창밖을 예의주시했다. 아주 한참 시간이 지났을까. 드디어 유리문 사이로 할아버지가 얼굴을 내비쳤다. 휴- 무의식적으로 안도의 한숨이 나왔다. 그의 모습은 평소와 달랐다. 손주로 보이는 아이를 한 손에 안고 있었다. 그날은 창틀에 몸을 의탁하지 않았다. 바깥을 관찰하지도 않았다. 창문을 활짝 열고 다시 거실로 들어갔다. 가족이 찾아왔나보다. 그랬다. 인간 CCTV가 작동하지 않는 날은 외롭지 않은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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