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이라는 고독한 나라
칠흑같이 어두운 우주,
그 안에 작은 콩알 하나가 콩-박혀있었다.
동생이 곧 아버지가 된단다. 철부지 막내가 처음으로 나보다 어른스럽게 느껴졌다. 생애 최초로 마주하는 경이로운 만남에 그는 매우 들떠 있었다. 목소리는 온통 설레임으로 가득했고, 나는 기꺼이 함께 기뻐해주었다.
전화를 끊고서 한동안 가만히 까만 바탕에 흰 자국만이 뜨문뜨문 보이는 사진을 들여다보았다.
광활한 우주에 겨우 자리 잡은 작은 점.
외로워 보였다. 그 안에서 홀로 얼마나 적막할까. 때로는 영영 나가지 못하게 될까봐 무섭기도 할 테지. 새삼 아직 세상에 나오지도 않은 작은 생명체로부터 묘한 동질감이 느껴졌다.
일 년에 6개월 이상은 어두운 장막을 두른 독일이라는 나라에서 나는 자주 외로웠다. 이리저리 아등바등 끊임없이 유영했지만 우주는 광활했고, 안착할 수 있는 종착지는 없어 보였다. 내 한 몸 겨우 누인 이곳은 하우스(Hause)이지 홈(Home)은 아니었다. 나는 절대 이 나라에 동화되지 못할 것임을 안다. 그렇다고 귀국했을 때 다시 한국 사회에 잘 적응할 수 있을지도 확신이 없다.
물론 한국에 살 때도 고독의 시간들이 있었다. 그 결은 뭐랄까. 일종의 해결책이 있었다. 여행을 간다거나, 친구를 만난다거나, 아예 일에 집중한다거나… 독일에서는 친구가 없었고 일도 없었다. 코로나로 인해 여행마저 차단되었다. 외로움은 벼랑 끝까지 내몰렸다. 태양의 존재 유무가 의심될 정도로 매일 비가 내릴 때, 난방이 잘 되지 않는 100년이나 된 집에서 오들오들 떨며 물주머니를 안고 자야할 때, 인종차별인지, 접착력이 다한 것인지, 누군가의 실수에 의한 것인지, 좀처럼 알 수 없는 이유로 우리 집 명패만 떨어져 바닥에 나뒹굴 때, 말이 통하지 않아 내 의사를 똑바로 전달할 수 없을 때, 남편과 싸워도 갈 곳이 없어서 옷장 속에다 버럭 소리를 지르며 울음을 삼 킬 때, 마스크를 쓰고 다니는 키 작은 동양여자를 이상하게 쳐다보는 따가운 시선을 느낄 때, 친구들이랑 미친 듯이 한국어로 수다를 떨고 싶을 때, 무엇보다 엄마가 너무 보고 싶을 때…‘외로운 때’라는 것은 절대 떨어지지 않는 초강력 접착제 마냥 떼어내려 할수록 더 지독하게 따라 다녔다. 독일에서는 외로울 수밖에 없는 수많은 이유가 도처에 사리고 있었다.
가끔 새로운 환경, 문화, 친구들로 반짝였지만, 마음 한구석에는 항상 빛나지 않는 작은 별이 있었다. 그것은 설명할 수 없는 불안함, 초조함, 쓸쓸함, 그리움, 아득함의 다섯 꼭지점들로 밤만 되면 내 가슴을 콕콕 찔러댔다. 지금 고민해봐야 답을 찾지도 못할 숱한 상념들로 잠 못 이루는 밤들이 이어졌다.
이곳에 사는 내내 일주일에 두 세 번은 규칙적으로 새벽 3시가 되면 잠에서 깼다.
‘나는 왜 이 시간에 깨어 있을까?’
‘대체 왜 여기에 살고 있을까?’
본의아니게 30대의 절반을 독일에서 보냈다. 고국에서 멀리 떨어진 이억 만 리 이국의 땅, 매우 낯선 작은 도시에 사는 내가 비현실적이다. 끼이익- 새벽에도 어김없이 정기적으로 운행되는 오래된 트램은 이곳이야말로 싫든 좋든 네가 발을 딛고 살아야 할 시공간임을 알려준다. 눈치도 없다. 잠이 살풋 들락말락 할 때 내 멋대로 상상의 나래를 펼쳐본다. 여권도, 비행기 표도 필요없이, 저 트램에만 몸을 실으면 한국으로 갈 수 있지 않을까. 저 낡은 녀석이 나를 데려다 줄 수도 있지 않을까. 달콤함이 묻어나는 찰나 악몽이 덮친다. 행여나 영영 한국에 돌아가지 못하게 되지는 않을까 여기서 나 혼자 죽으면 어떡하나. 괜한 걱정도 해본다. 그럴 때면 혼탁한 악몽을 걷어내는 주문인냥 노래를 중얼거렸다.
또다시 헤메일지라도 돌아오는 길을 알아.
아이와 나의 바다/아이유
나는 돌아가는 길을 알고 있다고.. 확실히 기억하고 있다고.. 언젠가 이 하우스에서 벗어나 나의 홈으로 갈 거라고, 몇 번을 대뇌이다 잠이 들었다.
뱃속의 아가는 외롭다. 그래서 나 여기 있다고, 나를 좀 봐달라고, 발차기도 하고 입덧이란 것으로 존재를 증명한다. ‘괜찮아’. ‘안심하렴’ ‘사랑한다 아가야’. 우주의 주인인 엄마가 신호를 보낸다. 엄마의 바다에서 허우적거리는 아가에게 ‘탯줄’은 세상과의 강력한 연결고리다. 그것은 열 달이라는 고독한 항해를 지탱해주는 힘이 된다. 줄곧 나는 바다란 중성명사 ‘다스 메어(das Meer)’가 아닌 여성명사 ‘디 제(die See)’라고 생각해왔다. 그래서 바다가 마냥 망망대해처럼 느껴지지는 않았다. 나에게도 엄마가 있다. 탯줄처럼 연결되어 있는 친구들도, 인터넷 망으로 이어진 랜선 이웃도 있다. 분명 몇 번의 거친 항해를 거쳐 나의 바다로 돌아갈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마음을 추스리다가도 독일이라는 나라에 산다는 것은 외롭다. 왜? 이 글의 주제는 결국 돌고 돌아 다시 ‘고독’이다. 고독이라는 것은 녹진하게 나를 따라다녔다. 용수철 마냥 잠시 눌려졌다 핑-핑- 솟아올라왔다
어쩌면 고독이야말로 독일의 대명사일지도 모른다. 심지어 나라 이름에도 ‘독’ 이 있지 않은가. 이 나라는 사람을 미치게 고독하게 만드는 무언의 힘이 있다. 이쯤되면 게르만족의 개척자들이 “너희는 이 땅에서 응당 고독한 존재로 살아야 해.” 못 박아 둔 것은 아닐까 합리적인 의심마저 든다.
숭고한 조상의 뜻을 받들기라도 한 듯, 독일의 수많은 작가•철학자들은 고독했고 동시에 예찬했다. 괴테는 ‘영감은 오직 고독 속에서만 얻을 수 있다.’고 했고, 니체는 “그대는 다시 고독 속으로 돌아가야 한다. 앞으로 더 무르익어야 한다.”며 고독을 부추겼다. 평생 외롭게 살았던 것으로 유명한 쇼펜하우어는 <딱 좋은 고독>이란 책까지 냈는데, ‘우리는 혼자일 때, 비로소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느낄 수 있으며 그 안에 자유가 있다’고 말했다. (Nur in der Einsamkeit kann jeder ganz er selbst sein; in ihr allein ist Freiheit.)
우리가 절대 간과해서는 안될 점은 이들 대부분 이성적 사고능력을 탑재한 천재들답게 고독에 단서를 붙였다는 것이다. 괴테는 나 자신과 평화롭게 살아가며 무언가 해야 할 일을 확실히 갖고 있을 때, 고독은 좋은 것이라고 했으며, 쇼펜하우어 역시 우선 ‘고독을 즐기는 법’을 익히라고 했다. 결국 독일에서 고독이 독일지 득일지는, 고독을 가지고 재밌게 놀지 같이 침몰할지는, 본인에게 달렸다는 뜻일테다. 어차피 인간은 존재하는 한 고독할 수밖에 없다. 사람으로 태어났으니 고독은 숙명이다.
까만 우주에서 태어난 작은 점, 태생적으로 고독을 잉태한 나는 이 땅에서 샘솟는 고독을 가지고 놀아 보기로 했다.
‘고(go)' 달렸고,
‘독(讀)‘ 읽었다.
고독이 조금은 재밌어진 것도 같다.
Hallo, Einsamkeit(안녕, 고독!)
그렇게 <다독이는 밤>이 세상에 나왔다.
내 고독함의 산고...